<천검지애 455화>
455화. 각오(1)
사실 새로운 방법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악불군은 그를 상대할 방법을 여럿 생각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도 슬슬 시작해 봐야겠구나. 여흥 정도는 되길 바라마.”
분명 작지만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말한 혈우대마종은 두 팔을 양옆으로 쫘악 펼쳤다.
그러자 그가 탄 가마가 공중으로 일 장 정도 더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시뻘건 강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단 일 수로 천 명을 죽였다는 천마의 천마혈강선이었다.
천마혈강선은 악불군의 검이 날아온 방향의 모든 공간을 그대로 덮쳤다. 걸리는 것은 바위고 나무고 심지어 땅바닥까지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저, 저게 사람의 무공이 맞는 거냐?”
망원통으로 보고 있던 주원장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지금 혈우대마종이 사용한 수법을 자신의 군대에게 사용한다면 저 한 수에 일만 대군이 몰살당할 것 같았다.
“혈우대마종은 이미 오래전에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자입니다. 그래서 담 군사께서는 이번 비무에서 반드시 혈우대마종을 죽여야 한다고 강조하시더군요.”
유백온도 천마혈강선의 위력에 경악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악불군이 저런 자를 죽일 수 있겠느냐?”
“담 군사 말은 악 왕야께서 절대 그냥 죽지는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냐? 설마 악불군이 혈우대마종과 동귀어진이라도 한다는 것이냐?”
“동귀어진이 되면 할 것이고, 안 되면 최소한 부상이라도 입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삼차 비무에서 이긴 자들에게 혈우대마종을 제거하라고 명을 내리십시오.”
“그건 비무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느냐?”
권력을 잡기 위해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긴 전력 있는 주원장이 규칙을 따지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었다.
하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황제로서 말을 바꾸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영웅대회의 취지는 십왕을 뽑는 것입니다. 이미 삼차 비무에서 이긴 자들의 수는 열 명이 되었습니다. 혈우대마종이 이긴다면 열한 명이 되는 것이지요. 황상의 권한으로 십왕만을 인정하기에 혈우대마종은 제거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약속을 어기고 혈우대마종을 합공해서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에는 변명이 너무 약했지만,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모양새만 갖춘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말을 바꾸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저들이 짐의 명을 따르겠느냐?”
“그들도 지금 혈우대마종을 죽이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이 많은 군웅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체면상 자신들이 직접 합공해서 죽이자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황상께서 명을 내리시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설 것입니다.”
주원장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혈우대마종과 다른 사람을 싸우게 하고, 혈우대마종이 이기면 다른 승자들과 같이 합공하는 것이 악불군에게는 유리할 터인데 왜 담 군사가 악불군을 가장 먼저 싸우게 했지? 담 군사는 악불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지 않느냐?”
“태양천주를 죽인 이후, 천호검신이라는 명호가 무림인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분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악 왕야께서 살신성인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럼 악불군은 천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냐?”
“예. 그는 진정으로 천하의 안녕을 위해 무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백온의 말에 주원장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망원통을 눈에 댔다.
비무를 벌이는 협곡은 천마혈강선에 위해 초토화되고 있었다.
사방에 있는 바위들은 모조리 깨지거나 가루로 변한 지 오래였고, 간간이 있던 나무들도 모조리 부러지거나 찢겨 더 이상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보였다.
‘이놈 봐라?’
천마혈강선의 공격에도 악불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혈우대마종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살수들이 사용하는 은잠술이나 사술들은 신묘한 술법이기는 하나 결국은 무엇인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천마혈강선 같이 모든 공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면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악불군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천마혈강선을 막아 내거나 피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나 막는다면 그 즉시 악불군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딘지 느껴질 터이니, 지금은 피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촘촘한 그물망처럼 빠질 데 없이 공격하는 천마혈강선을 피하면서 여전히 혈우대마종에게 종적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단순히 피하는 것만으로 혈우대마종이 당황까지 한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정말 지독한 공격이구나! 계속 이런 식이면 피하다가 지치겠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잘 버티고는 있지만 악불군 역시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천마혈강선을 피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몸을 날리고 자세를 바꿨다. 천마혈강선에 담긴 기운이 얼마나 강력한지, 스치기만 해도 내기가 흔들거릴 정도였다.
혈우대마종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은 승산이 너무 희박하다고 느껴, 최대한 몸을 숨기고 그의 공격을 피하다가 기회를 잡아 역습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혈우대마종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 위력이 예상을 너무 많이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악불군은 의아함을 느꼈다.
‘인간의 몸으로 저런 엄청난 공력을 수련만으로 축적이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다 해도 저걸 계속 저렇게 사용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피하면서도 계속 혈우대마종의 약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악불군은 비상식적으로 높은 혈우대마종의 내공에 의문이 생겼다.
천제무황은 악불군에게 혈우대마종과 싸울 당시의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차륜전을 펼치며 그를 몰아치는 수백 명의 무림인들을 상대하던 혈우대마종은 샘물처럼 끊이지 않는 공력을 과시했다고 했다.
심지어 강력한 공격을 받은 후에는 더 강한 공격을 펼쳤다고 했다.
당시 들을 때는 그저 감탄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축적된 내공이 무한정 있지 않은 이상, 그런 공격이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흡기! 그래 흡기밖에 없어. 혈우대마종은 말로만 전해지는 천마의 흡기마공을 익힌 것이 분명해.’
상대가 공격하면서 사용한 공력을 흡기한다면 그거야말로 무한한 내공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상대의 공격까지 약화시킬 수 있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가 익혔다는 말만 돌았을 뿐 그것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악불군은 천마 역시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그 많은 마공을 창시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서였다. 더욱이 천년마교의 교주는 모두 천마라 칭해 왔다.
악불군은 공략에 대한 단초를 발견하자 자신의 모든 내공을 방어로 변환했다. 심지어 천륭검에 담겼던 내공까지 거두었다.
내공이 전혀 없는 검으로 혈우대마종의 호신강기를 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처럼 내공을 사용하면서 흡기를 못 한다면 분명 호신강기에도 틈이 생길 것이었다.
악불군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천마혈강선은 주위를 모조리 파괴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짐작을 뒷받침하듯, 여유만만하던 혈우대마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주위를 모조리 파괴한 혈우대마종의 가마가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가마에서 몸을 일으킨 혈우대마종은 주위를 주욱 둘러보았다.
모든 행동을 내공을 사용해 움직이던 그가 드디어 내공의 사용을 줄인 것이다.
“실망이구나. 천호검신이라는 명호까지 얻고 무황들을 능가한다는 소문까지 퍼졌기에 노부는 그래도 멋진 대결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만 다닐 줄은 몰랐구나!”
피잉!
그때 혈우대마종을 향해 천호시가 다시 날아갔다.
그러나 천호시는 천마혈강에 의해 그대로 가루로 변해 버렸다.
순간 혈우대마종의 표정이 역력하게 변화를 보였다.
천호시에 내공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놈이 내 무공의 정체를 눈치챘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수천 번의 싸움을 했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흡기마공을 이제 겨우 몇 합 겨룬 악불군이 눈치챌 리가 없었다.
그로서는 악불군이 무공의 원리를 따져 자신의 흡기마공을 유추해 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 혈우대마종의 천마혈강선이 땅바닥을 향해 날아갔다. 악불군이 지둔술을 이용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반경 삼 장의 땅에 수십 개의 구멍을 낸 그는, 여전히 악불군이 미세하게 자신의 천마혈강선을 피하는 것을 느끼고는 처음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장에서 시뻘건 장강(掌罡)이 뻗어 나왔다.
위력은 비슷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뻗어 나가는 천마혈강선과 달리 원하는 지역만 강타할 수 있어, 역시 내공의 소모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변한 혈우대마종의 공격을 보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한 악불군은, 그의 내공을 소모시키기 위해 천호시를 계속적으로 그를 향해 날렸다.
“이런 장난이나 치려고 영웅대회에 나를 초대한 것이냐!”
혈우대마종은 날아오는 천호시를 모조리 가루로 만들며 화가 난 듯 크게 외쳤다.
그도 지금 간발의 차이로 악불군을 놓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혈우대마종의 공격을 이렇게까지 피해 낼 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악불군이 배교의 무공과 천륭검보의 보법 그리고 백인막의 은잠술을 종합해 만든 보법이 곧 천하인들이 탐내는 절기가 될 것은 분명했다.
악불군은 혈우대마종이 내공을 조절하자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결심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혈우대마종은 드디어 악불군의 모습이 나타나자 다시 천마혈강선을 일으켰다. 하나 곧 표정이 살짝 변하며 공격을 멈칫했다.
악불군의 모습이 무려 열두 개나 나타난 것이었다.
“네놈이 분신십이수를 어떻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배교의 분신십이수를 혈우대마종은 단번에 알아본 듯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분신십이수는 마교에서 절전된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혈우대마종이 멈칫하는 순간을 악불군은 놓치지 않았다. 최소한 빠르기만은 그가 조금 우위에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열둘이나 되는 악불군의 분신이 동시에 혈우대마종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혈우대마종은 이십 년간 매일 싸움만 했던 백전, 아니 만전(萬戰)노장이었다.
쾅! 쾅! 쾅……!
순식간에 상황을 인지한 그의 천마혈강선과 장이 악불군의 모든 분신을 강타했다.
그러자 곧 사방에서 탄식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신 하나하나가 허상이 아닌 실상처럼 모두 피를 뿜어내며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음…….”
그리고 곧 혈우대마종의 침음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륭검이 그의 허리를 스쳐 간 것이었다.
순식간에 빨갛게 변해 가는 자신의 옆구리를 본 혈우대마종은 탄복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에서 도를 꺼내 손에 잡았다.
“모든 분신이 실제이며 허상이라……. 그 와중에 나의 호신강기를 뚫고 허리를 베다니, 실로 탄복할 만한 수법이구나.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천륭검보의 무공과 배교비전의 무공, 그리고 무당과 소림사에서의 기연까지, 자신이 얻은 모든 깨달음을 이용해 악불군은 나름 완벽한 초식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완벽까지는 몰라도 혈우대마종과 상대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의 초식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바로 후일 무림 최고의 절기 중 하나로 꼽히는 우주십만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