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56화 (456/472)

<천검지애 456화>

456화. 각오(2)

천마혈강을 뚫고 허리를 베었다는 것은, 검이 강기의 흐름을 타고 들어왔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은 허리였지만 다음은 심장일 수도 있었다.

예전 구문황에게 심장을 찔렸던 기억이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있는 혈우대마종으로서는 더 이상 악불군을 경시할 수 없었다.

혈우대마종은 자신의 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도는 도중지왕으로 불리는 천황마도(天荒魔刀)로 그 무게만도 삼백 근이 넘었다. 보통 사람은 들기도 버거운 무게였다.

거기다 도의 끝에 대부분의 무게가 쏠려 있어, 어떤 무기든 부딪치면 모조리 잘라 버린다는 전설의 명도였다.

전설의 명검인 천륭검과 명도인 천황마도의 격돌은 호사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무기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절대 무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혈우대마종이 상처를 입는 모습을 본 군웅들은 당연히 환호를 해야 했지만 관람장은 조용했다.

악불군 역시 부상을 당한 듯 입가에 토혈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내상과 외상은 경중에 따라 다르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웠지만, 고수들 간의 결투에서는 내상을 입는 것을 더욱 경계했다.

더구나 천황마도를 번쩍 들어 올린 혈우대마종의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며 군웅들은 침을 꼴깍 삼킬 뿐이었다.

그림자가 커지면서 천마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가 내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마기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확연하게 천마의 형상을 띤다는 것은 그가 당대의 천마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것을 본 군웅들은 혈우대마종에 대한 공포가 점점 더 커졌다. 백 년 전 말로만 들었던 전설적인 대마종이 천년 무림의 최대 숙적인 천마의 화신이라면, 단순히 비무에서 이겼다 하여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가슴에 악불군에 대한 기대와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만약 악불군이 기적적으로 혈우대마종을 이긴다면 달마대사와 버금가는 이름으로 천년 무림 역사에 기록될 것이 확실했다.

악불군은 자신이 자신했던 우주십만검결을 분신십이수까지 사용하며 펼쳤음에도 허리에 자상을 입히는 정도의 상처밖에 못 주자 실망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고무적이라고 생각했다.

혈우대마종도 결국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군웅들이 걱정할 정도의 내상은 아니었다.

아니, 전에도 한 번 경험한 일이었지만, 토혈을 하고 오히려 기의 움직임이 더 원활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영약이나 영초를 이용한 시술은 보통 십분지 일정도의 효력만 발휘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담무룡의 실수로 악불군은 인세에 다시 없을 특이한 일이 벌어졌고, 그 엄청난 영약의 효력을 거의 십 할 이상 흡수하는 데 성공하는 대기연을 만났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나쁜 성분이 있었다. 악불군의 발전을 가로막던 그 탁한 기들은 웅어리가 져 가슴을 막고 있었는데, 악불군의 토혈은 그 나쁜 기를 토해 낸 때문이었다.

악불군을 방해하던 나쁜 기운은 그 힘이 매우 강력하여 운기조식으로도 제거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혈우대마종의 강력한 힘에 밖으로 배출된 것이다.

혈우대마종의 뒤에 그리워진 천마의 형상이 갑자기 살아 있는 듯, 앞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악불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억압하는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쉽게 몸이 피해지지 않았다.

쥐가 고양이를 만났을 때 몸이 굳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다른 점은 쥐는 공포에 의해 몸이 굳어지는 것이라면 악불군은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음에도 몸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귀문환영(鬼門幻影)! 분명 귀문환영이야.’

배교비전에는 그들의 무공 말고도 기상천외한 무공과 술법들에 대한 설명도 적혀 있었다.

귀문환영은 마교에서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하는 교주만의 술법으로, 교도들이 그 안에 갇히면 온갖 환영에 시달리다 교주에게 충성하게 만든다고 되어 있었다.

배교에서도 믿음이 적은 교도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귀문환영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귀문환영의 단점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귀문환영에 갇힌 사람이 시술한 자보다 정신력이 더 강할 경우, 오히려 시술한 자가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악불군은 천마의 환영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에도 당장 피하지 않고 고심에 빠졌다.

무공의 아닌 정신력의 싸움.

어쩌면 무승부가 아니라 이길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만약 진다면……

악불군은 모험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악불군은 귀문의 환영 안으로 자발적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군웅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마의 환영이 점점 커지다가 악불군까지 삼킨 이후, 그곳에 검은 구멍이라도 생긴 듯 그림자가 모든 것을 감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혈우대마종도 악불군도 심지어 그들이 있던 장소까지 완전히 검게 막이 둘러진 것이다.

* * *

“아가씨, 저, 저게 뭐예요?”

하지만 담수련 역시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추국이 물었다.

“아가씨, 방주님께 아무 일도 없으시겠지요?”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버렸고 목소리는 떨렸다. 질문과는 달리 이미 악불군이 죽을 수도 있다고 단정한 것 같았다.

그녀들의 질문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간부들도 모두 귀를 쫑긋하며 그녀의 발언에 집중했다.

지금 일어난 현상은 모두가 듣도보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려 일다경이 지나 담수련이 입을 열었다.

“나도 저 현상이 뭔지 몰라. 그런데 악 방주께서 피할 수 있음에도 저 안으로 들어가셨어. 뭔가 생각하신 것이 있기에 그런 판단을 했다고 생각해. 난 악 방주께서 거뜬히 지금 상황을 이겨 내실 거라고 믿는다.”

책사로서의 냉철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말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기대가 섞인 희망적인 그녀만의 주관적인 생각이 가미가 되었지만, 그녀의 발언은 곧 천호방도들을 통해 다른 문파의 군막으로도 전해졌다.

정파인들은 손에 땀을 쥐며 속으로 응원을 시작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에서조차 악불군을 응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도와 사파에게도 천년마교의 후신인 혈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적이었고, 혈우대마종은 공포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 * *

“담 군사가 그런 분석을 했다고?”

담수련의 발언이 관람장에 퍼지고 곧 주위를 경계하던 금의위에 의해 유백온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유백온의 전언을 들은 주원장은 눈에 댄 망원통을 떼며 반문했다.

“예.”

“네 생각도 그러하냐?”

“전 멀리 있어서 악 왕야가 어떤 마음으로 피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황상께서 망원통으로 계속 관찰하셨으니 악 왕야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더 정확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하긴, 분명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갔는데 그냥 서 있었어. 그 엄청난 공격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피할 능력이면 그렇게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긴 하구나.”

“담 군사의 분석과 예측 능력은 솔직히 저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악 왕야가 당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백온 역시 약간은 희망 섞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나 주원장이나 악불군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응원했는데, 그 사람이 진짜 이긴다면 누구나 그 사람에게 빠지게 된다. 지금 악불군이 그런 상황이었다.

동귀어진이라도 해서 혈우대마종을 죽이면 좋고, 최소한 내공이라도 최대로 소모시키고 부상까지 입힐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결투였다.

그런데 지금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악불군은 살아 있는 신화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가고 있었다.

* * *

[할아버님, 지금 혈우대마종이 펼친 수법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혈우대마종과 악불군을 삼켜 버린 검은 그림자를 보며 백천학이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글쎄다. 나도 저런 수법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구나. 예전 혈우대마종과 그렇게 싸웠어도 그가 저런 수법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지금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지금이 비무 대회가 아니라면 직접 가서 저 안으로 나도 뛰어들어 보고 싶구나. 하지만 누구라도 지금 저 안에 뛰어든다면 그건 악 공자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우선은 기다려 보자꾸나.]

[아미타불! 백 시주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악 방주는 단명할 상이 아니었습니다. 혈우대마종이 펼친 수법이고 실질적으로도 혈우대마종의 무공이 악 방주를 능가함에도 이각이 다 되도록 아무런 현상도 없다는 사실은, 악 방주께서 지금 아주 잘 싸우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광천 대사의 말에 천제무황과 백천학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들의 눈은 그림자가 만든 검은 구역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 * *

흑백으로 나누인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을 점유한 검은 세계에는 혈우대마종이 서 있었고, 세력은 약하지만 나름 견고하게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백색의 세계에는 악불군이 서 있었다.

귀문환영의 안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둘의 정신 세계 안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혈우대마종이 서 있는 검은 세계는 백색의 경계선을 넘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백색의 세계는 밀리는 듯하다가도 다시 버티며 견고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

악불군이 귀문환영에 빠진 후 처음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직 젖도 못 뗀 어린 동생이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장면이었다.

정신력을 약화시키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증가시키기 위해 악불군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약한 기억을 먼저 떠오르게 한 것이다.

악불군도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를 감싸고 있던 백색의 자신의 세계가 급속도로 검은 세계에게 먹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악불군의 눈에 마차에 탄 앳된 얼굴의 담수련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께 드리라고 과일을 전해 주었다.

순간 악불군의 뇌리에 희망과 감사가 크게 일어나며 검은 세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귀문환영의 공격은 잠시도 쉼이 없었다. 악불군이 육관에서 격었던 고통과 어려움이 떠오르면 곧 담수련을 보러 간다는 기쁨이 그것을 눌러버렸다.

겨우 자신의 몸 하나를 두를 정도로 작았던 백색의 세계는 어느새 상당한 구역을 확보한 듯 꽤 커져 있었다.

[천마지체를 타고 태어나 그의 모든 무공과 정신력까지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탄생부터 강호에 나올 때까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어려움을 모두 몸과 정신력으로 이겨 냈다. 그런데 어떻게 하찮은 인간의 아이가 나의 심력을 버텨낸다는 말인가?]

[교주님의 정신세계는 증오와 파멸로 구축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정신세계는 사랑과 안녕으로 쌓여 있습니다. 교주님의 편협한 정신력으로 저를 굴복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악불군의 답을 들은 혈우대마종의 얼굴은 극도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높이 들고 있던 천황마도에서도 시뻘건 도강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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