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57화>
457화. 결착(1)
그 모습을 보던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배교비전에 적힌 내용으론, 귀문환영 안에서 무공을 펼치려면 최소한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배교비전에 적힌 글이 사실이라면, 내 내공이 오 갑자가 안 될 것으로 예상하고 나를 끌어들였다는 뜻인데…….’
귀문환영을 펼치기 위해서는 최소 삼 갑자의 내공이 필요했다. 그런 공력을 사용하면서 정신력 대결까지 벌이는 것은 여간한 고수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거기다 귀문환영의 압력 속에서 무공을 사용하려면 또다시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혈우대마종 이외의 사람들은 알아도 펼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심지어 그런 혈우대마종조차, 귀문환영을 펼치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사실 그냥 싸운다 해도 악불군을 이길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무리하면서 귀문환영을 펼친 것은 여전히 악불군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정신세계로 들어가 심상을 제압하여 꼭두각시를 만들어서라도 수하로 삼고 싶을 정도로 그는 악불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 이번에도 악불군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정신력을 보여 주었다.
악불군에게 그 어느 것보다도 더 강한 담수련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예상 못한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혈우대마종은 사랑을 몰랐다.
그는 결국 악불군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것이다.
하나, 이번에도 악불군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악불군이 들어 올린 검에서 금빛의 검강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혈우대마종은 무려 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고 말았다. 더욱이 귀문환영은, 펼치는 것은 수월하지만 거두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무리해서 거둘 경우 심력에 상당히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네가 귀문환영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
“자세히는 몰라도 들은 바는 있습니다.”
“들어? 어디서 들었다는 것이냐?”
혈교에서도 귀문환영에 대해 아는 자들은 없었다. 아니, 그가 아는 한 천하에서 아는 자는 있을 수 없었다.
“생사결을 벌이고 있는 지금, 제가 대답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긴 그렇구나.”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혈우대마종의 시뻘건 강기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선 악불군의 금빛 강기도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 * *
“아가씨, 벌써 반 시진이나 지났는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걸까요?”
귀문환영이 만든 검은 막은 반경 삼십 장의 넓이를 덮고 있었다. 무공인지 사술인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군웅들은 물론 측천무후조차 검은 장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반 시진이 넘도록 전혀 변화가 없자 차츰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무에 시간 제약은 없었으니 오래 걸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전혀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방주님께서 당하셨다면 이미 검은 막은 사라지고 혈우대마종이 모습을 보였을 거야.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방주님께서 잘 싸우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
차분히 말하는 그녀의 손은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흥건해져 있었다.
“저것 봐라!”
그때 관망장에 있던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커다랗게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검은 막에 다시 집중되었다.
검은 막을 뚫고 시뻘건 도강이 나타난 것이었다. 귀문환영을 이루는 기보다 더 강한 위력의 도강이 막을 뚫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관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뻘건 강기라면 혈우대마종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악불군은……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지려는 찰나!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협곡 전체를 덮었다. 주원장조차 황제라는 자신의 위치를 잠시 깜빡하고 벌떡 일어서며 같이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검은 막을 뚫고 금빛 검강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혈우대마종과 악불군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도강과 검강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간이 막을 뚫고 두 강기가 부딪칠 때마다 협곡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할아버님 생각에 지금 어떤 상황인 것 같습니까?”
백천학의 질문에 천제무황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나도 지금 저게 무슨 상황인지 확실치가 않구나. 뭔가 진법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달라. 어쨌든 악 방주가 계획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 보면 걱정한 것보다 잘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전 악 방주가 처음에 혈우대마종의 공격을 피하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주 현명한 작전 같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정면 충돌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피하면서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을 게다. 혈우대마종의 공격을 피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혈우대마종과 직접적으로 싸웠던 사람들은 무림 전체로도 열 명 정도밖에 살아 있지 않았다. 그중 천제무황을 비롯한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은 가장 가까이서 싸웠던 자들로, 혈우대마종이 얼마나 상대하기 어려운 자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악 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실하게 알 것 같습니다.”
천제무황의 말에서 지금 악불군이 얼마나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지를 능히 짐작한 백천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영웅이니 하는 찬사로도 부족할 아이 같구나. 솔직히 이 할애비는 당장이라도 저 안으로 뛰어들어가 악 방주를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천제무황은 예전 혈우대마종과 싸웠을 때의 그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해져 있었다.
그래서 혈우대마종과 가장 먼저 싸우게 된다면 이기지는 못해도 상당한 부상은 입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나, 혈우대마종의 천마혈강을 본 순간, 자신이 큰 오판을 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의 무공 역시 예전 싸웠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악불군이 그에게 치명상은 아닐지언정 피를 흘릴 정도의 상처를 입혔고, 진으로 보이는 검은 막에 들어가서도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님, 검은 막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백천학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조금씩 검은 막이 줄어들고 있었다.
* * *
“호랑이 토끼를 잡을 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고 했거늘,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도를 땅을 향해 늘어뜨린 혈우대마종은 처음과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주님께서 조금만 더 젊으셨다면 제가 이 정도까지 버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답하는 악불군의 몰골은 그가 서 있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처참했다.
상의 갈가리 찢어져 그의 건장한 상체가 다 드러났고, 몸 전체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입과 코에서도 피가 상당히 많이 흐른 흔적이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검은 혈우대마종을 향해 있었고 목소리 역시 여전히 힘이 있었다.
“노부가 흡기마공을 쓰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전설로만 떠도는 흡기마공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교주님께서 수백 명의 고수들과 며칠을 싸웠음에도 내공이 전혀 마르지 않는 듯했다는 전언을 듣고 혹시나 했을 뿐입니다.”
“고작 한 줄기 낭설만으로 짐작했다는 것이냐?”
“인간의 육체나 무공의 상리(常理)상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흡기마공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귀문환영에서는 흡기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느냐?”
“그것은 몰랐습니다. 아마 그것을 알았다면 제가 좀 더 잘 싸웠을 것입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 귀문환영이 만든 그림자 막이 완전히 사라지고 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자 탄식과 경탄이 섞인 경악성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탄식은 둘의 모습만 보았을 때 악불군이 패한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었고, 경탄은 백 년 전 무림을 홀로 상대했던 전전대 대마종과 홀로 지금까지 싸웠음에도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음에 보내는 찬사였다.
혈우대마종은 도를 다시 올리며 말했다.
“천마에게는 세 가지의 최고 무공이 있다. 모두 천마께서 돌아가신 후에 실전되었지만 노부가 모두 복원했다. 그중 하나는 무림인들이 천마혈강이라 부르는 혈황개세천마혈강이 있고, 검법으로는 천마혈성참이 있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무공은 천마수라도라 알려진 천마군림백팔수라도라고 할 수 있지. 지금부터 노부는 천마군림백팔수라도를 사용할 것이다. 이 도법의 특징은 펼치는 순간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했지만 교주님을 상대하기 위해 제가 수련한 검법이 있습니다. 전 그것으로 상대하겠습니다.”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는 말에 혈우대마종은 눈이 커지며 반문했다.
“지금 네가 창안한 무공을 사용하겠다는 말이냐?”
“창안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냥 그동안 배우고 익힌 무공들의 장점만을 모아 놓았을 뿐입니다.”
무공들의 장점만을 모아 새로운 무공을 만들었다면 그게 바로 창안이 아니겠는가…….
“허허허! 내가 정말 너에 대해 너무 몰랐구나. 너 같은 천고 기재를 이미 죽었어야 할 노부가 죽이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마신께서 정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구나.”
말을 마친 혈우대마종의 도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마혈강이 도에 주입이 되자 시뻘건 도강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솟구쳤다.
그러자 악불군도 검을 들더니 연신 자세를 바꿔 가며 검의 각도를 변화시켰다. 하나,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악불군의 몸 전체에 검날이 솟구친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실전된 천마의 전설적인 무공을 복원해 낸 희대의 마종과, 무공들의 장점을 골라 스스로 무공을 만들어 낸 희대의 천재가 벌이는 최고의 절기들의 향연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백여덟 줄기의 도강으로 변해 모든 공간을 잘라가는 천마수라도의 파괴력은 그의 말대로 엄청났다. 그런데 그 도를 모두 피해 내는 악불군의 능력 역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둘의 공방은 이십 초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사방 오십 장을 완전 폐허로 만들 정도의 파괴력으로 이십 초를 넘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공력의 소모가 있을 것이 자명했다.
놀랍게도 이십 초가 흐르는 동안 악불군은 도와 직접적으로 검을 부딪치지 않았다.
당연히 혈우대마종의 흡기마공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모든 공격을 보법을 통해 피하고 있는 악불군의 몸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악불군보다 적기는 해도 악불군의 검 역시 혈우대마종의 몸에 계속적으로 상처를 내고 있었다.
혈우대마종은 공격이 계속 실패하고 기를 흡기하는 것까지 막히며 내공의 소모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자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그의 얼굴에서부터 나타났다.
삼 갑자에 달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젊어 보이던 그의 피부가 급격하게 노화하기 시작했고, 검던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천제무황을 비롯한 절대 고수들의 얼굴에 ‘어쩌면 기적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어.’
지금 상황에서 혈우대마종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내공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도의 파괴력을 크게 낮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빠른 보법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초수만 더 길어질 뿐 빠른 승부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내공의 소모를 감수하고 더 강력한 공격으로 악불군을 죽이는 것이었다.
결정이 나자 혈우대마종의 도강이 더욱 길어졌다. 색도 빨갛다 못해 태양과 같은 열까지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 실패하면 난 죽는다.’
악불군의 혈우대마종이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자 이를 악물며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드디어 끝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