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458화 (458/472)

<천검지애 458화>

458화. 결착(2)

혈우대마종의 전력이 담긴 천마수라도는 지금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위력으로 악불군을 향해 날아갔다.

백여덟 개의 도강은 두께가 세 배 이상 굵어지며 피할 곳조차 없도록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모습에 혹시나 하며 한 가닥 희망을 보이던 모든 군웅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악불군이 그동안 정면 대결을 피하며 역습을 노리는 방식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때를 기다리던 악불군은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동안 숨겼던 모든 전력을 끌어올려 받아쳐 나갔다.

시뻘건 도광이 덮은 공간 사이사이로 금빛의 검강이 스며들었다.

콰과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악불군이 서 있던 자리는 수십 개의 벽력탄이 한꺼번에 터진 듯 초토화되어 버렸다.

악불군은 혈우대마종의 천마혈강의 힘을 견디지 못한 듯 무려 삼십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무림의 고수가 착지도 못 하고 몸 전체로 그대로 떨어졌다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더구나 악불군은 이미 자타가 공인한 절대 고수가 아니었던가…….

비무장은 물론 관람장까지 수만의 군웅들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전혀 없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희대의 대마종을 맞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장렬하게 죽은 악불군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였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와아아아!”

그때 모든 군웅들이 벌떡 일어서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죽은 줄 알았던 악불군이 검을 의지하여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힘겹게 일어난 그는 한 주먹의 피를 토해 내더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천천히 혈우대마종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악불군이 혈우대마종의 앞 삼 장 거리에서 멈추자, 크게 울렸던 환호성은 멈췄고 협곡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번 생사결에서, 나는 무력으론 이겼으나 지략에서는 완전히 패했다.”

누구도 생각 못 한 혈우대마종의 말에 모두는 의미를 짐작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악불군은 말 그대로 구사일생한 처참한 몰골이었다. 하나 혈우대마종은 여러 곳에서 피를 보이고 있었지만 악불군과 비교하면 거의 멀쩡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일까…….

설마 그가 패배를 자인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악불군이 잘 싸웠다는 의미일까?

“어르신께서 귀문환영을 펼치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혈우대마종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교주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던 그가 어르신으로 호칭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검법의 이름을 아직 짓지 못했다고 했느냐?”

“예.”

“내가 지어 줘도 되겠느냐?”

“그래 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기로 스며들어 막을 길이 없었고, 검의 흐름이 너무 많아 감당이 안 되었다. 우주십만검결이라고 부르면 제격일 것 같구나.”

정파 최고 검식의 이름을 마도 최고의 마인이 지어 주었다는 것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기사(奇史)로 남을 일이었다.

‘우주십만검결.’

이후 이기어검을 넘어 악불군을 대표하는 무공의 탄생이었다.

“감사합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혈우대마종은 다시 말했다.

“내가 죽으면 어찌할 생각이냐?”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하나, 어르신의 몸 한 곳은 잠시 훼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혈우대마종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하게 다시 말했다.

“끝나고 나면 화장을 해 주거라. 본 교의 전통이니라.”

혈우대마종의 내공이 점점 약해지며 더 이상 둘의 대화를 못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환희로 변하고 있었다. 분명 보이는 상황은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악불군이 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혈우대마종의 말은 그가 패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단지 패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하고 있지 않은가…….

악불군은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비록 그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악불군은 무림인으로서 그의 무공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내공의 힘으로 버티던 혈우대마종의 몸에서 터지듯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이미 그는 회생할 수 없을 치명상을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몇 군데나 검에 당했기에 저렇게 한꺼번에 엄청난 피를 흘릴 수 있을까?

백 년이 넘게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던 혈우대마종의 죽음에 모두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혈우대마종의 시신 앞에 도착한 악불군은 그의 목을 검으로 잘라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혈우대마종의 목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한 번 죽었다고 소문이 났던 그였다. 하지만 목이 잘린 이상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엄청난 환호가 협곡을 덮어 버렸다. 무림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극적인 명승부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거기다 둘이 보인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으니 군웅들의 감격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천호검신!”

“천호검신……!”

정파와 마도 심지어 사파까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악불군의 명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못마땅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측천무후였다.

그녀는 몸을 훌쩍 날리더니 악불군의 앞에 섰다.

“이미 나이가 들 대로 들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 한 명을 이긴 것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떠는 것 아니냐!”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군웅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측천무후 같은 고수가 직접 보았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악불군의 공을 폄훼하고 무림에 평화를 가져올 절호의 분위기를 망쳐 버릴 심산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우!”

사방에서 그녀에 대한 성토가 곧바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손을 들자 모두의 입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이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악불군의 손짓 하나에 그대로 조용해진다는 것은 이미 그가 무림의 절대자로 등극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무후께서는 불만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불만이 아니라 당연한 이의 제기다. 난 십왕 따위를 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무림 최고의 고수로서 무림의 여제가 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분노했지만 가장 대노한 사람은 주원장이었다.

영웅대회를 개최한 것은 황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십왕 따위라는 말로써 그의 권위를 실추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선은 화를 참았다. 무림인은 무림인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유백온의 의견을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 중 한 명은 떨어져야 합니다.”

“너랑 본 후가 붙어 한 명이 죽으면 딱 맞겠구나.”

“불가(不可)!”

그때, 천제무황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그들의 중간에 내려섰다.

“천제무황, 네가 무슨 자격으로 불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천제무황에게까지 반말하는 그녀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에 군웅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무황이라는 단어는 내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내 상대는 악불군이다.”

궁주가 된 이후, 그녀의 타도 대상은 언제나 천제무황을 비롯한 세 명의 무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혈우대마종이 나타나자 그녀의 목표는 그로 바뀌었다. 그녀가 악불군과 혈우대마종의 싸움을 온 정신을 집중하여 본 것은 혈우대마종을 상대하기 위해서였지, 악불군은 그녀의 뇌리에 없었다.

하나, 혈우대마종이 악불군에게 죽은 이상 이제 그녀의 목표는 악불군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무림의 십왕이 아니라 홀로 우뚝 서 있는 무림의 여제이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있는 이상 천제무황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닥쳐라, 요사스러운 계집! 악 방주는 이미 악전고투를 벌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겨 보겠다는 얄팍한 술책을 벌이려고 하다니, 노부가 그것을 용납할 것이라 보았더냐!”

천제무황의 말에 측천무후의 입가에 비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네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수십 년간 무황들을 목표로 무공을 수련했던 그녀는 그들의 무공의 장단점을 모두 연구하고 대비책을 다 세워 놓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혈우대마종도 이길 수 있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으니, 천제무황이 자신의 앞을 막은 것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어르신,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무후는 제가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때 천제무황의 귀로 악불군의 전음이 들려왔다.

[자네는 지금 부상을 당했어. 내상도 심한 것 같은데 왜 이런 무리한 도전을 받아주려고 하는가?]

[무공에도 천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무공이 그녀의 가장 강력한 천적입니다. 저를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천적? 단지 그녀의 비무를 보기만 했는데 그것을 느꼈다는 말인가…….’

천제무황도 무공에 천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상대의 무공과 천적관계에 있는 무공을 익힌다면 이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무공이 어느 무공에 천적이 될지는, 직접 상대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천제무황은 악불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짓자 고개를 끄덕였다.

“악 방주.”

“예, 맹주님.”

“측천무후의 도전을 받아 줄 생각이 있는가?”

“어차피 겪어야 할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받아주겠습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랗게 주고받는 둘의 대화를 듣던 측천무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도전이라는 말에 빈정이 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악불군이 거절한다면 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막무가내로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무림의 여제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의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악불군의 상태로 미루어, 그를 제거한다 해도 얼마간 말이 많을 것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오늘 악불군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후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측천무후궁에서 악불군을 죽이기 위해 쫓았다면, 오늘 이후로는 악불군이 측천무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쫓게 될 것이 분명했다.

태양천주와 혈우대마종을 죽인 그의 영향력은 이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막강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으로서도 지금 그녀의 도발은 기회였다.

승리자가 열한 명이라는 것을 핑계로 그녀를 제거할 계획은 세웠지만, 공식적인 대회에서 그녀가 싸움을 피하거나 다른 사람과 싸우게 되는 변수는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변수를 그녀가 스스로 먼저 도발해 없애 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측천무후의 무공은 실로 엄청나서 모든 상대를 일 초에 다 제거하며 올라왔다.

악불군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우선 그녀를 이길 수 있다는 전제가 확실해야 하는데, 악불군은 무슨 자신감으로 내상까지 입은 상태에서 이 싸움을 하려는 걸까?

악불군이 꺼낸 천적이라는 말은 그저 천제무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측천무후의 비무를 보며 실지로 그녀의 무공의 커다란 단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의 무공이 그녀에게 아주 치명적인 천적이라는 것이었다.

천제무황이 물러서자 장내는 다시 정적에 싸였다.

측천무후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며 물었다.

“네가 불리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무후께서는 제가 상처는 많지만 실지로 큰 타격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봅니다. 솔직히 혈우대마종과 싸우기 전에 무후와 싸웠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네가 죽는다는 결과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겠지.”

“무후의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순간 측천무후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