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59화>
459화. 승리(1)
“내 검식에서 단점이라도 발견한 듯한 말투로구나? 똑똑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놈들은 언제나 자신의 판단에 자신을 갖곤 하지. 그런데 그 단점을 내가 일부러 보여 줬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 그리고 나의 최고 절기는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다는 생각도 해 봤어야 하지 않겠느냐?”
놀랍게도 측천무후는 악불군의 생각을 이미 다 짐작하고 있었던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심지어 지금까지 보여 준 무공이 최고의 절기도 아니라고 했다.
악불군이 정말 커다란 오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악불군은 태연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똑똑한 사람들은 판단할 때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해서 결정하지요. 하지만 미련한 사람들은 한 가지만 생각해서 결정합니다. 무후께서는 제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지금 무후께서 하신 말씀도 이미 다 고려해 봤을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십니까?”
측천무후의 미소가 순간 싹 사라졌다.
‘이놈이 정말 뭔가 자신이 있어서 받아줬다는 건가?’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네놈이 혈우대마종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본 후가 본 것을 말한다면 혈우대마종은 너무 너를 만만히 보았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계속 멈칫했다. 그가 처음부터 사정없이 몰아쳤다면 여기에 시체로 남은 것은 너였을 것이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고요. 무후께서 사정없이 몰아쳐 보시지요. 그럼 누가 이곳에 시신으로 남았을 것인지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측천무후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 보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 초.
아니 실지로 일 초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 그녀의 검이 악불군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채채채채챙!
검날이 스치는 소리가 협곡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상당수의 무인들이 순간 귀를 손으로 막을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어느새 십 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둘은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명, 측천무후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측천무후궁에서는 육백 년간 그동안 모은 모든 검식의 장점만을 취합하고 중원의 모든 검식의 단점을 분석해 어떤 무공이라도 막을 수 없는 최고의 검식을 만들었다.
바로 천라섬전검법이었다.
모든 방어를 뚫고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 순식간에 적의 목숨을 빼앗아 버리는 천라섬전검법은, 그녀가 십이 성 완벽하게 익힌 이후 누구도 그녀의 일 초를 받아 낸 사람은 없었다.
악불군이 익힌 천륭검보 역시 세세하게 분석되어, 천라섬전검법을 천륭검보의 무공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분석까지 이미 마친 터였다.
심지어 태생이 천년마교였던 초대 측천무후는 마교의 검법들까지 상당수 가지고 왔기에, 혈우대마종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지로 혈우대마종과 그녀가 싸웠다면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검식이 혈우대마종의 무공에 천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사용한 검은 천륭검보의 검법이 아닌데?”
측천무후의 말에 악불군은 자신의 검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천륭검보의 자세로 만들 수 있는 초식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익히는 사람에 따라 초식이 달라지지요.”
태연히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악불군은 생각보다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검이 그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호신강기고 방어막이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반격을 할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상 대결이 생각 외로 효과가 매우 좋다는 것을 느낀 후 거의 매일 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사결을 겪고 있었다.
적의 공격은 인세에 없는 아주 강력한 공격을 상정하고, 자신은 자기가 아는 무공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무공이 그가 상상했던 공격과 흡사했고, 그는 그것을 막을 방책을 만들어 두었었다.
하지만 실전은 상상과 좀 달랐다. 방금 그녀의 검을 어떻게 막아 내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천적이고 뭐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혼이 될 뻔했던 것이다.
어쨌든 막아 냈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가 그녀의 공격을 막을 능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 번은 운이 좋아 막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운이 계속 따라주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측천무후는 다시 공격에 들어갔다.
* * *
“아가씨, 전 가슴이 떨려서 못 보겠어요.”
혈우대마종과의 싸움은 거대하고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귀문환영 안에서 싸운 것이 더 많았고, 귀문환영에서 나온 후에는 놀랄 겨를도 없이 경악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이미 악불군이 이기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고 보았기에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측천무후와의 싸움은 실로 가슴이 떨릴 정도로 살벌했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지만, 한 수 한 수마다 강력한 살기가 뻗어 나가 당장이라도 악불군이 죽을 것 같았다.
연화의 말에 담수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어찌나 긴장하고 있는지,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전 이 싸움은 말렸어야 한다고 봅니다. 직전 혈우대마종과 생사결을 펼친 방주님은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쉬지도 못하고 금방 싸우게 한 것은 너무 불합리해요.”
추국은 상당히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천호방의 모든 간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악불군과 천제무황 간의 전음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기에 그대로 싸움을 인정해 준 천제무황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무황 어르신의 탓이 아니다. 방주님께서 원했던 거야. 만약 측천무후가 나서지 않았다면 방주님께서 먼저 그녀에게 비무를 신청했을 것이다.”
“무황들도 있고 이미 십왕에 뽑힌 사람들이 있는데, 왜 방주님만 계속 강적들과 싸워야 하는 건데요?”
추국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혈우대마종과의 싸움을 승리로 끝낸 것은 누구도 예상 못 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측천무후까지 악불군이 맡아야 했는지 모두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야.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치와 천하의 공적까지 막아 줄 수 있는 커다란 공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소군은 가지고 있었어. 모두 나 때문이야…….’
담수련은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악불군이 자신을 버리기만 했다면 그는 최고의 명성과 세력을 가지고 안전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오로지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분명 맞았다. 하나, 한 가지 그녀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분명 그녀의 보호였지만, 지금 악불군은 최고의 고수들과 싸우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 자신도 몰랐던 승부사의 기질이, 무공이 높아지고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확실하게 발현되고 있었다.
* * *
일 초에 끝낼 생각이었던 측천무후는 공방이 이십 초를 넘기 시작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혈우대마종을 우습게 볼 정도로 강한 그녀였지만, 언제나 일 초 만에 상대를 제거한 것이 싸움이 길어지자 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측천무후궁에서는 그녀를 키우면서 수련과 병행해 실전 감각도 키우기 위해 수많은 고수들을 불러들여 희생양으로 삼았다.
실지로 생사결을 벌인 무림인들은 거의 백 명에 달했다. 하지만 너무 빠른 승부로 인해 진정한 실전 경험은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당해 본 적이 없던 그녀는, 상대의 검이 자신의 코앞을 지나가고 간발의 차이로 심장을 비켜 가는 등 처음 겪는 위기 순간이 계속되자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국 계속 막히는 천하섬전검법을 벽옥수월천라검으로 바꾸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분명 벽옥수월천라검은 천고의 절기였다.
하나 그것은 검후가 익힌 무공이었고, 악불군은 이미 그 검법에 경험이 두 번이나 있었다.
거기다 천하섬전검은 너무 빨라 지금껏 악불군은 우주십만검결을 시도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검식을 바꾸면서 악불군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측천무후의 검이 화려한 검무처럼 변화하자 주위 공간은 검의 꽃으로 가득 찼다.
분명 검후보다 두 단계는 화후가 높았다. 하지만 공간 자체를 완전히 도강으로 덮었던 혈우대마종의 천마수라도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순간 악불군의 검에서 금빛 강기가 주변 팔방 공간을 덮었다. 혈우대마종에게 구사할 때는 그의 천마혈강이 너무 강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군웅들은 혈우대마종이 왜 악불군의 검식에 우주십만검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금빛 강기가 만들어 내는 검결은 실로 셀 수 없이 많아 십만 개를 너끈히 넘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측천무후는 거의 공격 없이 방어만 하는 악불군을 보며 내공이 소진되어 공격할 공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나, 그것이 절호의 기회를 잡기 위한 악불군의 미끼였음을 이제야 직감했지만, 이미 피할 곳은 없었다.
벽월수월천라검결이 만들어 낸 화려한 검꽃과 악불군이 만들어 낸 황금빛 검결을 본 군웅들은, 지금 생사를 가르는 엄청난 결투가 벌어지는 중인데도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혈우대마종 그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네놈이 진정으로 교활하다는 뜻임을, 내가 자각을 못 한 것이 천추의 한이구나.”
측천무후는 자신이 당한 것이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혈우대마종과 마찬가지로 온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르던 협곡은 거대한 환호성으로 덮여 버렸다.
이미 십왕의 의미는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악불군 단 한 명만을 위한 영웅대회가 되어 버렸다.
상당히 힘겨운 듯 크게 한숨을 내쉰 악불군이 측천무후의 머리를 잘라 들어 올리자 또다시 커다란 환호성이 지축을 울렸다.
그리고 악불군의 그런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다.
담수련이었다.
* * *
“하하하하! 짐이 오늘 안계를 크게 높였어. 무공이란 것이 사람을 죽이는 기술 정도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토록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오늘 십왕을 봉하는 자리이니 몇 가지 당부 좀 하겠네.”
십왕으로 정해진 열 명의 무림인들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공경의 예의일 뿐 황제의 권위에 복종하는 군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대회를 통해 무림을 건드리는 것이 황실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한 주원장은 더 이상 예에 관한 것은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이제 왕이 되었으니 그대들의 봉토를 하사할 것이네. 원하는 지역은 지금의 세력권이 좋겠지만, 다른 곳을 원할 경우 반드시 유 태사령과 의논을 해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또한 군신의 예는 취하지 않는다 하여도 황실에 충성할 것은 약속해 주어야 할 것이네. 그것은 왕으로서 황제에 대해 행해야 할 의무일세.”
“황실에 충성할 것입니다.”
비록 한 대에서 그치는 왕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권한과 나라에서 내리는 봉록은 상당했으니, 충성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까울 리 없었다.
“관에서 무림의 일에 관여는 하지 않겠네. 단, 싸움이 커져 치안에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이 되면 황명으로 싸움을 멈추게 할 생각이네. 하나, 짐이 명을 내리기 전 무림왕인 그대들이 싸움이 없도록 힘써 주었으면 하네.”
“최대한 평화로운 무림을 만들 것입니다.”
“그럼, 세세한 것은 유 태사령과 얘기하고 내 당부는 그 정도에서 끝내겠네.”
모두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주원장은 환관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열 명의 환관이 금으로 치장한 작은 상자를 양손에 들고 모두의 앞에 섰다.
경건하게 상자를 넘겨받은 십왕들은 안을 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들이 생사를 걸고 싸운 결과물이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