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0화>
460화. 승리(2)
누런 황금빛의 신패.
왕을 상징하는 왕패였다.
전면의 테두리에는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무림왕이라는 글자와 함께 황제를 상징하는 옥새(玉璽)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뒷면에는 어느새 그들의 명호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승부가 나는 순간, 장인들이 즉시 새긴 듯했다.
물론 이미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무황들이지만, 진짜 왕이 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모두는 두 손으로 공손히 상자를 받았다.
“그럼 무림의 왕들을 위한 연회가 연회청에서 있을 것이니 모두는 그곳으로 이동하게. 그리고 악 왕은 짐과 잠시 얘기 좀 하고.”
악불군은 십왕 중에서 백천학과 함께 가장 뒷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앞자리에 선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악불군 스스로 뒤를 자처한 것이다.
주원장은 악불군만 부른 것에 모두가 오해라도 할까 두려운 듯 부언했다.
“왕들도 알겠지만 악 왕과 짐은 사적으로 호형호제했던 사이라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지 기약하기 어려워서 잠시나마 회포를 풀려는 것이니, 절대 편애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
편애한다 해도 어차피 불평할 사람은 이미 없었다. 무림의 최대 위험 인물들을 홀로 모두 처치한 악불군의 무명(武名)은 이미 무황들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악 제.”
둘이 남자 주원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악불군을 불렀다.
“황상께서 어찌 저 같은 평민을 그렇게 부르십니까? 예전처럼 그냥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이제 악 제도 평민이 아니지 않는가? 어엿한 왕의 이름을 막 부를 수야 없지.”
“그래도 전 편히 불러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주원장은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불군아.”
“예.”
“짐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면 풀도록 해라.”
“서운한 감정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황상께서는 만백성을 다스리는 천자입니다. 위험 요인이라 생각하시면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사료됩니다.”
“너는 짐에게 위험 요인이냐 아니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오늘 이후 황상을 더 이상 뵙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 왕으로서의 권한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이유가 있느냐?”
“전 정치와는 연결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꿈은 대협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이건 제가 황상을 뵙는다면 세인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주원장은 악불군이 정치와는 아예 선을 긋겠다는 결심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사적으로 짐의 아우인데, 더 이상 보지 못한다면 너무 서운하지 않느냐?”
“제가 황상 곁에 없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다만, 황상께서 감당하지 못할 위기가 닥치신다면 그땐 불러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황상을 돕고 다시 전 무림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입니다.”
“너는 믿겠다. 다른 무림인들도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네가 막아 줄 수 있겠느냐?”
순화하여 딴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황실에 대한 반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만약 황상께 딴마음을 먹는 무림인이 있다면 제가 앞장서서 막겠습니다.”
이미 무림의 최고 실세가 된 악불군의 말에 주원장은 만족한 듯했다. 하지만 악불군이 딴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을 막을 장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짐이 너를 따로 부른 것은, 이후에도 너에 대한 감시는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절대 너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황실이란 곳이 그런 곳이니라. 공신은 물론 대신들도 금의위에서 모두 감시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야 황상의 심기가 편해지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전 상관없습니다.”
“이제 다음 행보는 어디서 시작할 생각이냐?”
“혈교와 측천무후궁은 수장들만 죽었을 뿐, 아직 무시 못 할 전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냥 둔다면 제이, 제삼의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가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주로 돌아가는 즉시 그들에 대한 추적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다시는 천년마교나 측천무후궁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완벽하게 정리할 것입니다.”
“알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네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말씀하십시오.”
“왕은 짐이 직접 봉한 직위다. 비록 황실 일에 직접 간여를 할 수 없는 명예직이지만, 봉토가 하사되고 봉록도 나갈 것이다. 네 마음대로 왕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상관없으나, 항상 왕으로서의 권위는 언제나 세우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원장은 악불군이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를 공경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자, 주원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거리며 말했다.
“이제 짐은 불군이 너를 친형제 이상으로 믿을 것이니 짐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이미 한번 의심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감시를 붙이겠다고 말하면서 친형제 이상으로 믿는다는 말이 상당히 모순됨을 그는 알기는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악불군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 * *
무림 십왕을 위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각.
영웅대회의 관람장에는 아직도 수많은 군웅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경우 사람들은 더 크게 감동하는 법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악불군이 혈우대마종에게 죽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가 오히려 혈우대마종을 죽인 쾌거에 대한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큰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측천무후까지 이겼으니, 악불군은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의 세계에 근접한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모두는 생사결의 장면을 얘기하고 또 했다. 한 사람이 악불군의 검이 이렇게 움직였다고 말하면 또 다른 사람은 아니라며 자신이 본 광경을 다시 얘기하는 식이었다.
이 사람과 대화를 하고 또 저 사람과 같은 대화를 하고, 그런데도 전혀 질리지 않는 듯 모두는 즐겁기만 했다.
특히 십왕을 배출한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는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정식으로 왕으로 봉해졌으니, 당장 관이나 군부에서 참견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무림 세력들도 대놓고 적대시하는 행태를 지양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왕을 건드리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세력권에서는 무서운 것이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그들에게 날개까지 달린 셈이었다.
그들은 무림 십왕이라는 지위가 스스로에게 족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십왕을 배출한 정파는 아주 조용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문파 최고수들의 죽음으로 침통해하는 다른 정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제무황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결과에 상관없이 자중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실지로 이번 영웅대회로 위상이 더욱 높아진 문파는 천무성궁이었다. 십왕을 두 명이나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많은 문파의 주요 간부들은 천호방의 군막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장 달려가 말을 걸었다.
이제 악불군의 시대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급조된 임무는 천호방과 친분을 쌓는 것이었다.
이미 악불군과 혈맹지약을 맺은 문파들은 저절로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다.
혈맹지약의 가장 중요한 조약이 바로 서로의 문파가 위험에 처하면 즉각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건드리면 악불군과 싸우게 된다는 말인데, 누가 있어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 심지어 태양천주까지 무황과 동급이거나 능가한다는 고수들을 모두 제거한 악불군과 대적하려고 하겠는가…….
“아가씨께서도 황궁에 가시지 그러셨어요?”
주원장이 십왕을 황궁으로 초대했을 때,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고, 담수련을 두고 떠나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더라도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없도록 최대한 조용히 알려지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연회장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출신을 물었을 때, 황제와 십왕이 있는 자리에서 곧 밝혀질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당장 밝힌다면 분명 안 좋은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음을 그녀는 걱정한 것이다.
“그런 자리에 내가 나서는 것은 보기 안 좋아. 그리고 이제 천호방을 기습할 간 큰 무림인들이 있겠어?”
“하긴 그렇지만, 방주님 옆에는 언제나 아가씨께서 있었는데 이번 같은 중요한 자리에 빠지시는 것이 좀 속상해요.”
사화는 담수련이 악불군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측천무후까지 제거한 후 담수련은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런데 막상 영광의 자리에 빠진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때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울리기 시작했다.
“군막을 치지 않은 무림인들은 이제 관람장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공지한 대로 절대 황도로 가시면 안 됩니다!”
구문제독부 군병들이 모두에게 이만 떠나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가까운 주루나 기루를 찾아 술판을 벌일 그들이었지만, 구문제독부는 황도인 남경을 완전 포위한 채 누구도 성도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 황조 때부터 허가받지 않은 무림인들이 황도에 들어서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만큼 황실은 무림인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황제의 암살을 시도할 경우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라 해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들은 무공을 아는 근위대에게 황궁의 호위를 맡겼고, 황제의 침소는 매일 밤 바뀌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심지어 지금 영웅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무림인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
황도의 경비를 책임진 구문제독부로서는 초비상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조용해지겠네?”
담수련은 아직도 아까의 감격의 여진이 남은 듯 눈이 촉촉했다.
“조용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밖에 나갔던 흑란이 들어서며 말했다.
“왜?”
연화가 반문했다.
“정파 사람들이 계속 몰려와서 장로님들과 대화를 하려고 줄을 섰어.”
“정말?”
연화는 급히 군막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하지만 군막 주위는 천호사기단이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어서 바깥 상황을 볼 수 없었다.
악불군이 황궁으로 들어가면서 건넨, 담수련에 대한 경호에 만전을 기하라는 한마디에 모든 천호방도들이 군막 주위를 에워싸고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방주 호법을 비롯한 천호특별단도 주위에 숨어서 경계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제 천호방의 위상은 무림맹을 능가할 거다. 소군 역시 그냥 무림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절대자가 되어 있을 거고. 너희도 이제 행동에 조심해라. 소군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들이 언행이나 행동을 경박하게 하면 소군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
담수련의 말에 사화는 자신들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매향이는 아까부터 안 보이네?”
“호호호!”
담수련이 매향이를 언급하자 다른 사화들이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내가 경박하지 말라고 방금 주의를 줬는데 그게 무슨 웃음이니?”
“사실은요. 매향이 지금 소걸아 소협과 같이 있어요.”
“소걸아 소협과? 왜?”
“방주님께서 황궁에 가고 나서 갑자기 소걸아 소협이 왔더라고요. 처음에는 아가씨를 뵈려고 온 줄 알았는데 매향이 에게 가서 뭐라고 소곤대더라고요. 그러더니 둘이 같이 어디 갔어요.”
연화의 말에 흑란이 부언했다.
“매향이가 겉으로는 소걸아 소협이 너무 지저분하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하면서 사실은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소걸아 소협은 다음 대 무림의 중추적인 역할 하실 큰 인물이 될 사람인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재단을 하면 안 된다.”
따끔하게 한마디 한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그맣게 물었다.
“그런데, 둘이 사귀는 거야?”
담수련의 질문에 모두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