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1화>
461화. 변화(1)
“아가씨, 사귄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아세요?”
연화의 반문에 담수련은 아미를 좁히며 다시 반문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물어보는 것 같아?”
“그럼 아가씨와 방주님은 무슨 관계세요?”
사실 사화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눴다.
분명 둘이 알콩달콩할 때 보면 누가 봐도 연인 같았다. 대화 역시 서로를 너무 아끼는 것을 그녀들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 상황이지만 도대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제 천하의 영웅이자 왕야까지 된 악불군과 담수련의 관계가 주종 간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방주님께서는 너무 고지식해서 절대 먼저 아가씨께 다가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먼저 다가가시라고요.”
연화의 말에 담수련은 이해를 못 한 듯 다시 말했다.
“소군하고 나는 거의 매일 가까이 있는데, 어디를 더 다가가라는 거야?”
“아가씨, 그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뜻인데?”
“남자하고 여자가 사귄다는 게, 그냥 대화하고 노는 게 아니라고요. 여자들이 사귀는 거랑은 아예 차원이 달라요.”
잠룡세가의 무사 중 한 명과 사귄 적이 있던 연화는 이중에서는 남자에 대해 그럭저럭 경험이 있는 단 한 명이었다.
숨어서 잠깐잠깐 만나 인사하고 대화 조금 한 것도 경험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담수련은 상당히 흥미를 느낀 듯 다시 물었다.
“어떻게 차원이 다른데?”
“뭐라고 할까? 하여간에 제가 조 무사랑 사귈 때 느낀 건데, 자꾸 몸에 손을 대려고 하더라고요. 안으려고도 몇 번 했고.”
하지만 담수련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악불군과는 서로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비일비재했고, 이동할 때는 아예 그녀를 품 안에 꼭 안고 갈 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경험은 여러 차례 했지만 그다음을 몰랐다. 문제는 악불군 역시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만나면 어차피 몸이 스치고, 호위를 하다 보면 나를 안고 몸을 날릴 때도 있는데?”
“아이 참!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다르냐고?”
그때 듣고 있던 추국이 끼어들었다.
“아가씨, 연화 말 심각하게 들으실 필요 없어요. 조 무사랑 사귈 때 손도 못 잡아 보고 끝났는데 뭘 아는 척을 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추국 너는 남자랑 사귀어 보지 못해서 그래. 만날 때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게 있다니까?”
연화의 반박에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연화는 조 무사랑 어떻게 됐어?”
“그게…….”
연화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흑란이 킥킥! 거리며 부언했다.
“잠룡단 특별 수련이 있을 때, 조 무사랑 두 달간 못 만났는데 안채의 하녀랑 사귀더래요. 조 무사가 얼굴이 그럭저럭 잘생겼거든요. 방주님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말이에요.”
“조 무사가 다른 여자랑 사귀었단 말이야?”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계집애가 꼬리를 쳤다고 했어. 나 보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더 이상 믿질 못하겠더라고.”
연화가 급히 변명을 했지만 추국과 흑란은 피!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표정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남자가 사귀는 여인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럼 소군도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그 여인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니야?’
악불군이 자신을 놔두고 다른 여자랑 사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그녀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조 무사 같이 별 볼 일 없는 자식도 얼굴이 좀 반반하니까 안채 하녀들이 계속 꼬리를 쳤다고 하더라고요. 방주님은 신분이 왕이에요. 거기다 외모도 또 얼마나 잘생기셨어요! 이제 방주님 주위에 여자들이 무지 꼬일 걸라고요.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좀 더 과감하게 나가셔야 한다니까요.”
연화는 조 무사 얘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딴에는 아주 중요한 조언을 담수련에게 했다.
“어떻게 과감하게 나가야 하는데?”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 언제나 사화를 가르치는 입장이었던 담수련이 오늘 처음으로 그녀들에게 질문이라는 것을 계속하고 있었다.
분명 시작은 소걸아와 매향의 얘기였는데, 둘의 얘기는 전혀 나오지도 않고, 이상하게 악불군과 담수련의 이야기만 하는 그녀들이었다.
* * *
연회장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십왕에 봉해진 기쁨보다는, 무림의 최고 우환거리였던 혈교의 교주와 측천무후궁의 궁주를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악불군이었다. 하나, 그는 백천학과 간간이 귓속말을 나누거나, 누군가 질문을 하면 거기에 답을 할 뿐,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백천학을 제외한 모두가 그에게는 엄청난 선배이자 어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의 전공이 엄청나기는 했지만 악불군은 조금도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공손하게 모두를 대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이 모두에게는 아주 좋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 아니, 자시가 넘었으니 오늘이겠군요. 악 형의 명성이 아마 천하 방방곳곳에 퍼지고 세외까지 들썩이게 할 겁니다. 혈우대마종이나 측천무후와 싸울 때처럼 힘들지는 않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도 생각해서 하셔야 할 겁니다.”
백천학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악불군에게 작게 말했다. 명성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에 비례해 악불군의 명성에 흠을 내려고 하는 자들도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악불군의 위상이 절대자에 올랐기에 대놓고 뭐라고 하거나 거짓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자제할 것이지만, 악불군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를 꼬투리 잡는 자들은 무수히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제 악불군의 말은 무림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백 제의 조언을 언제나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제가 조언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도움을 청해도 되겠지요?”
“악 형께서 연락하신다면 전 언제나 환영입니다. 솔직히 매년 한두 번은 항주로 놀러 갈 계획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저도 백 제께서 오신다면 신발 벗고 뛰어나가 맞겠습니다. 배첩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시면 들르십시오.”
그때 기회를 엿보던 혈해사황이 술잔을 들고 악불군의 옆으로 다가갔다.
“악 방주, 노부가 술을 한 잔 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악불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께서 주신다면 당연히 받아야지요.”
악불군이 예상과 달리 매우 공손하면서도 싹싹하게 자신이 내미는 술잔을 받자, 혈해사황은 흐뭇한 표정으로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리면서 연회청이 조용해졌다. 특히, 혈해사황의 비열한 성정에 대해 잘 아는 천제무황과 구천마황은 검미를 살짝 좁히며 둘을 주시했다.
술잔을 넘을 듯 말 듯할 정도로 가득 술을 부은 혈해사황은 면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천호방과 본 혈해사계의 무궁무진한 발전을 기원하여 최대한 가득 담았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우리가 이 정도로 감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와 ‘사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파의 종주인 혈해사황이 정파를 대표하는 악불군에게 마치 대단히 친한 사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구천마황이 쓴소리를 하며 제동을 걸었겠지만 대화의 상대가 악불군인 지금, 그도 끼어들기가 어려운 듯 참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악불군이 즉시 했다.
“사황 어르신과 제가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노부와 자네가 공조해서 태양천주를 제거하지 않았는가? 정파와 사파 간에 협력해서 무림의 최고 원수를 죽였으니, 그거야말로 무림사에 기념비적인 일이 아니겠나?”
그러자 모두의 표정에 흥미가 나타났다.
악불군이 어떻게 태양천주를 죽였고, 그 사실을 왜 혈해사계에서 먼저 퍼뜨렸는지, 모두는 그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의아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께서 제게 태양천주가 나타날 곳을 알려 주신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거기다 태양십존까지 혈해사계에서 큰 피해까지 입으시면서 제거해 주셨으니, 그 또한 무림에게는 큰 홍복이라고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자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내 마음이 뿌듯해지는구먼.”
혈해사황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사실 태양십존을 죽인 일은 대단한 쾌거였다. 하지만 태양천주를 죽인 더 큰 쾌거로 인해 그대로 덮여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던 혈해사황으로서는, 악불군이 십왕이 모인 자리에서 언급해 준 것이 대단히 흡족했다.
하나 곧이어 이어진 악불군의 말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즉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르신께서 하신 결정은 제게 어르신께 가지고 있던 감사한 마음을 단번에 사라지게 하셨지요.”
“……노부가 대체 무슨 결정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혈해사황은 우선 발뺌을 하기로 했다. 사실 직접 공격한 것도 아니니 악불군의 말은 그저 추측에 불과했다. 그는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혈해사황의 특기이기도 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말하면 다른 어르신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순간 혈해사황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제의 악불군과 지금의 악불군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어제의 악불군이 무황과 비슷한 위상이었다면, 지금의 악불군은 무황의 위상을 월등하게 넘어선 상황이었다.
이제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사실이 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악 방주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악 방주에서 자네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던 호칭이 다시 악 방주로 돌아갔다.
“괜찮습니다. 그 일로 어르신께 무슨 악감정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놓치신 셈이시지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은데, 혈해사계에 한번 들러 줄 수 없겠나? 그럼 노부가 악 방주의 오해를 풀어 주겠네.”
“어차피 한 번은 혈해사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이렇게 초청까지 해 주시니 가까운 시기에 들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술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마시자 혈해사황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악불군과의 공조 사실을 알려 둘이 친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알리려던 혈해사황은, 오히려 자신이 뭔가 악불군에게 음모를 펼쳤다는 것을 알려 주는 상황이 되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다른 때 같으면 당장 화를 내며 적반하장 격으로 상대를 몰아갔겠지만, 혈해사황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도와 달리 천호방과 혈해사계가 친해지기는 어렵겠다는 느낌만 모두에게 주고 말았으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은 매우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비웃듯 이번에는 구천마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 방주.”
“예.”
“혈해사황의 술을 받았으면 노부의 술도 한 잔 받아야 하지 않겠나?”
“당연히 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악불군은 구천마황이 움직이기 전에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모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혈해사황이 술잔을 들고 먼저 다가간 것과 악불군이 구천마황의 앞으로 먼저 걸어간 것은 사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혈해사황 역시 구천마황처럼 행동했다면 악불군이 그에게 먼저 다가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주는 느낌은 달랐다.
이제 악불군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