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2화>
462화. 변화(2)
구천마황은 악불군이 자신의 앞까지 자리를 옮겨 술잔을 받자 기분이 고무된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따랐다.
‘정말 대단한 아이로구나. 무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천학이에게는 저런 친화력이 너무 부족한 것이 문제인데, 저 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모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구천마황의 미소를 본 천제무황은 감탄과 아쉬움이 섞인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감탄은 구천마황의 얼굴에 진정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게 한 악불군의 친화성 때문이었고, 아쉬움은 백천학에게 악불군 같은 붙임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백천학은 매우 반듯한 심성과 투철한 정의감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좋고 나쁨에 대한 호불호가 너무 뚜렷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절대자의 교육을 받아 온 것 때문인지, 어른들을 공경하고 교만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물론 지난 삶에서 천제무황 또한 그러했다.
하나 천제무황은 악불군을 보며, 절대자란 반드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생각했던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의 종주라는 구천마황과 악불군이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물론 마도는 사파랑은 다르다며 차별성을 주장하지만 정파에게는 똑같은 악당들일 뿐이었다.
당연히 천제무황은 혈해사황과 구천마황을 싫어했다. 특히 구천마황은 젊을 때부터 매우 날이 서 있던 성격이라, 혈우대마종을 상대하기 위해 모였을 때도 천제무황과는 의견 충돌이 많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괴팍함까지 생겨 수하들조차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한다고 들었는데, 그가 지금 악불군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악불군의 위상이 달라진 점도 이유겠지만, 상대가 누구든 기분 좋게 만드는 악불군의 특유의 매력도 큰 몫을 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따른 술을 악불군이 단숨에 마시자 구천마황은 더 기분이 좋은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 방주와는 초면인데도 원체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먼.”
비무장에서 얼굴은 보았으니 초면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도 어르신의 말씀을 많이 들어서인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만통광심 군사님께서는 어르신을 매우 존경하시더군요.”
“만통광심이 나를 존경하는지 무서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하긴 하지. 그러니까 천호방과는 척을 지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한 것이 아니겠나?”
“군사가 아무리 판단을 잘한다 해도 주군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지요. 전 어르신께서 우리의 조약을 길게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우리 마도는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고 뒤로 음모만 꾸미는 사파와는 다르다. 한번 맺은 조약은 반드시 지킨다.”
구천마황은 마치 혈해사황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사실 구천마황은 자신과 혈해사황이 같은 반열로 취급받는 것조차 매우 불쾌해할 정도로 혈해사황을 싫어했다.
혈해사황 역시 천제무황과 구천마황 둘 중에 한 명을 죽인다면 구천마황을 죽이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다.
‘저놈이 감히!’
혈해사황은 구천마황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강하게 받아치지는 않았다.
구천마황은 모욕을 당했다고 판단하면 주위 상황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당장 공격하는 성격이었다.
하나 혈해사황은 어떤 경우라도 유불리는 따져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그런 둘의 성격을 악불군은 모두 머리에 담아 두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십왕이 되어 다 같이 웃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지만, 후일 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틀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악불군은 그럴 경우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천마황과의 대화가 끝나자 다른 십왕들도 악불군에게 한 잔 받으라며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악불군은 최대한 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지금 무림의 실세가 악불군이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음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삼경에 가까워졌다. 여느 연회라면 이미 파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십왕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은 서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지만, 연회가 끝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면 또다시 세력 다툼은 벌어질 것이었다.
소림사나 무당파 같이 신도들의 시주가 문파의 재정을 담당하는 문파는 세력 확대보다는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우선으로 하는 편이었다.
들어오는 수입이 매년 비슷한데 세력이 커지면 오히려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기 때문이었다.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많은 방도수를 자랑하지만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문파의 영역을 침범할 이유가 없었다.
천하의 모든 문파가 개방만은 경계하지 않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른 문파는 달랐다.
특히 마도와 사파는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보호비를 받거나 다른 하위 문파로부터 받은 상납으로 문파의 재정을 충당하는 경우가 많아, 큰 세력은 필연적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큰 세력을 형성한 후에 세력 확대를 멈추면 싸움이 사라지겠지만 마도와 사파는 그게 불가능했다.
나쁜 짓을 못하게 하면 즉시 반역을 꾀하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성정상 조용히 문파만 수성하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기건 지건 끊임없이 싸우거나 최소한 주위 문파와 긴장 관계를 지속하면서 문제를 만들어야, 문파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도와 사파였다.
원나라와 태양천에 의해 무너졌던 무림은 지금 새롭게 세력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파는 예전 그들이 구축했던 세력의 복원이 최우선이었지만,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는 오룡세가와 태양천이 사라지며 무주공산이 된 지역까지 모두 먹어치우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본격적인 세력 다툼이 벌써 시작되어야 했지만, 혈교와 측천무후궁이라는 공통의 적이 등장함으로써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위협이었던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가 드디어 사라졌으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악불군이라는 새로운 초고수의 등장이 마도나 사파에게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와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주원장이 무림이 싸우는 것을 꺼려하고 악불군이 싸움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해도 모든 싸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싸움은 무림인들의 숙명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자들이 향후 어떤 행동을 벌이느냐는 매우 중요했다.
그중 가장 위험한 자는 마도와 사파의 종주인 구천마황과 혈해사황 밀려 그동안 존재감이 없던 천중신마였다.
세력이 약해 절대 고수로서의 위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은인자중했던 그였지만, 이제 십왕이라는 날개를 달았으니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에 맞먹는 세력을 구축하려 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에게 세력 확대는 전쟁의 선포였다.
악불군도 그것을 알기에 그의 술잔을 받으면서 천호방에 한번 들러 달라고 초대를 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가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초대를 하면 빈말이라도 시간이 나면 들르겠다고 하든가, 오히려 역으로 상대를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천중신마는 답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악불군이 초대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의미였다.
‘무림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구나…….’
악불군은 자신을 최대한 내세우지 않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파인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대화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정파인들이 대화를 나누기 꺼려하는 사람들도 악불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생각지도 않게 십왕에 뽑힌 백염신불과의 만남은 향후 무림 정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 무림의 내우(內憂)가 혈교와 측천무후궁이라고 한다면 외환(外患)은 새외 연합이었다.
그들은 태양천의 압박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나름 독자적인 활동까지 한, 자존심이 아주 센 자들이었다.
이제 태양천과 원나라가 사라지자 새외의 최고 세력으로 등장한 새외 연합은 지속적으로 중원에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달라고 하면서 수시로 월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파나 마도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정파와는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파나 마도와 연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담수련은 정파에서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지금보다 좀 더 친절하게 대한다면 그들의 위협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새외 연합 역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그들 연합이 매우 성격이 다른 세력이 모였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심하다는 것과, 서장 최고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포달랍궁이 새외 연합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포답랍궁의 최고수인 백염신불이 십왕까지 되었으니 포답랍궁의 입김은 더욱 강해지고 새외 연합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은 백염신불을 통해 새외 연합의 준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다.
사천이나 감숙의 무림인들에게는 대단한 호재일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이 거의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짧게나마 나눈 반면 백천학은 정파인들과만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천제무황이 직접 나서 백천학을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에게 인사를 시켰다.
천제무황 역시 그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면을 틀 기회가 다시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컸는지, 백천학이 있음에도 그들의 대화는 그리 부드럽지는 못했다.
특히 구천마황은 백천학에게 구천마성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그 역시 백천학이 마도와 사파에게는 매우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나름 친분을 만든 그들은 삼경이 되어서야 연회를 끝냈다.
그렇게 돌아가는 모두의 머리에는 향후 어떤 상황이 만들어질지에 대한 깊은 고심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심의 중심에는 하나같이 악불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 * *
천지개벽에 가까운 소식이 전 무림을 강타했다.
무림 십왕의 탄생과 고금 최고의 마종 중 한 명인 혈우대마종의 귀환, 거기에 모든 고수들을 모두 단 일초에 제압하며 마지막 비무까지 올라간 측천무후까지.
영웅대회는 무림인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요소가 가득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국 악불군일 수밖에 없었다.
태양천주를 죽이면서 이미 중원인들의 우상이 되었었던 그가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까지 제거했으니, 어떤 찬사도 그를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백 년 가까이 중원 무림인들의 절대자였던 무황들조차 이번 대회에서는 주역이 될 수 없었다.
덕분에 천호방 총단이 있는 항주는 완전히 무림인들의 성지처럼 변해 버렸다.
항주에 들어서는 무림인들은 모든 무기를 등에 매거나 보자기에 싸서 옆에 찼다. 손에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심지어 항주에 들어서자마자 말에서 내리는 무림인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모든 무림인들이 말에서 내렸다.
영웅대회가 끝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즈음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주루에 가면 호사가는 물론 영웅대회에 관람을 갔던 무림인들이 떠드는 대회의 이야기로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밖과는 달리 천호방 총단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