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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64화 (464/472)

<천검지애 464화>

464화. 기다림(2)

‘오늘도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일어나야 하나?’

늦은 시간까지 주루에 앉아 천호방의 정문만 보고 있던 백룡신권은, 다른 문파 사람들도 슬슬 돌아가고 주루 역시 문을 닫을 준비를 하자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굳게 닫힌 정문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장원 안에서 여러 불빛의 이동을 느낀 것이다.

늦은 시간이니 경비 무사들이 횃불이나 등불을 들고 경계를 하는 것은 어느 문파나 있는 일이었다. 하나 그동안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 악 방주께서 모습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한참을 주시하던 백룡신권은 평소와 달리 많은 불빛이 안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자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맹에 보낼 정보가 생긴 것이다.

‘나보다 빨리 눈치챈 자들도 있나 보네?’

백룡신권은 맞은편 주루에서 천호방을 감시하던 자들 몇몇이 급히 자리를 뜨는 것을 보자 급히 몸을 날려 사라졌다.

사실 악불군이 직접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고, 모습을 보였다 해도 다른 세력보다 먼저 그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을 느낀 감시자들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세력에게 연락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 * *

“한 달은 너무 길었어. 다음부터는 이렇게 길게 폐관하는 건 안 돼.”

어언 한 달 만에 악불군을 본 담수련은 생전 처음으로 투정을 부려 보았다.

악불군이 폐관을 한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그녀였지만, 나이가 든 후 악불군과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때문인지 매일 밤 대화로는 그리움을 달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가씨를 오래, 혼자 계시게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삐친 듯 입술을 삐죽대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마음이 풀렸는지 금방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소기의 목적은 이뤘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깨우친 것 같습니다.”

“와아! 도대체 소군의 능력의 끝은 어딜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수련하면서도 한 단계를 넘기지 못하셔서 못내 아쉬워하셨는데, 소군은 한 달에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깨달음도 깨달음이었지만, 더욱 중요한 마음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결정?”

“예, 저로서는 그 판단이 무공 수련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결정은 유보한 상태고요.”

“무슨 마음의 결정인데 소군이 그렇게 힘들었다는 거야? 나도 알면 안 돼?”

“결정되면 아가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맨날 결정되면 말해 준대……. 그 결정 때문에 아직도 내게 답을 안 준 게 여럿 있는 거 알지?”

“이번 결정이 되면 그 답까지 모두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뭔가 느낌이 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담수련의 얼굴을 빤히 보던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군, 간부들이 모두 안채로 모였습니다.]

흑석영의 전음에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물었다.

“제가 간부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아가씨께서도 같이 만나시겠습니까?”

거의 모든 간부 회의에 참석해 온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은 답이 달랐다.

“아니야. 난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 소군 혼자 만나.”

“안채 회의실에서 만날 것이니, 언제라도 오시고 싶으시면 오십시오.”

안채 회의실이면 그녀의 처소의 옆 전각이었다.

보통 간부회의는 방주전이 있는 대회의청에서 열렸지만, 담수련의 처소와 거리가 좀 있다는 이유로 그녀의 처소의 가까운 전각에 회의실을 하나 더 만들어 둔 상태였다.

군사를 위해 방주가 움직인다는 의미로, 다른 문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천호방의 간부들은 모두 그러려니 했다.

그냥 쉬쉬하며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그녀는 간부들에게 악불군의 아내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회의실에 악불군이 들어서자 모든 간부들이 오체투지를 했다.

“이게 뭐하는 행동입니까? 이런 과한 예를 아주 싫어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악불군은 검미를 찌푸리며 질책하듯이 말했다. 비록 수하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예우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자 고철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저희는 방주님께 예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림의 최대 원수인 태양천주와 혈우대마종 그리고 측천무후까지 제거한 무림의 영웅이자 절대자에 대해 예를 취한 것입니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받아 주십시오.”

고철황의 말이 끝나자 모든 간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번 한 번만 저희들의 예를 받아 주십시오!”

잠시 모두를 둘러본 악불군은 그들의 충정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자신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악불군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받아 달라니 이번은 받겠습니다. 여러분의 충정은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일어나십시오.”

그러자 추명혼이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악 왕야 천세! 천세! 천세!”

그러자 모두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복창을 했다.

“천세! 천세! 천세!”

만세는 오로지 황제의 앞에서만 할 수 있는 찬양이었다. 천세라는 찬양은 오로지 왕에게만 할 수 있는 찬양이니 예법에는 전혀 어긋남이 없었지만, 악불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루한 빈민의 삶을 살다가 담수련을 만나 그녀의 호위 무사가 된 것만으로도 그는 감지덕지, 정말 환호를 지를 정도로 좋았다. 담수련의 호위 무사가 그에게는 정말 엄청난 감투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왕의 칭호를 받고 천세란 말을 듣고 있으니,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악불군은 추명혼을 보며 말했다.

“태상호법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입이 매우 무거운 편인 추명훈은, 회의 때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적었다.

당연히 누구를 커다랗게 찬양하는 일은 그의 성격상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자진해서 먼저 천세를 외쳤으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불군의 농담에 경직되어 있던 모두의 얼굴이 풀어지며 미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제가 어려울 때 저를 믿고 따라온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수하이기 전에, 형제이자 숙부이고 할아버지입니다. 제 지위가 좀 달라졌다고 변하지 마십시오. 그럼 제가 소외된 느낌이 듭니다.”

“저희는 방주님을 방도로서 따른 것이 아니라 주군으로 충성할 뿐입니다. 저희들의 목숨은 온전히 주군의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주군을 섬길 것입니다.”

장수가 수하를 자신의 친족처럼 대하고 수하가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는 군대는 절대 패하지 않는 법이었다.

든든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혈교와 측천무후궁은 교주와 궁주만 죽었을 뿐, 그들의 전력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하나, 지휘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두 혼란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소걸아에게 그들에 대한 추적을 부탁해 놓았습니다. 내일부터 본 방은 본격적인 그들의 추적에 동참할 것입니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외당당주 마진우가 커다랗게 답했다.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일은 외당의 일이니, 이번 추적은 그의 소관이기도 했다.

“제가 지금의 위치에서 안주한다면 방도들은 위험에 노출될 일도 없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천호방을 세운 취지에 어긋납니다. 전 담 군사님과 함께 외유에 나설 것입니다. 아마 상당한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구천마성과 혈해사계 거기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천중신마까지, 제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모두 제 적이 될 것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과 당혹함이 나타났다. 지금 악불군의 말은 무림을 대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아주 무서운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주군, 황상께서 무림인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극히 꺼려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전쟁을 벌인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상황을 방치한다면 후일 결국 큰 혈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내린 결론입니다. 다행히 그분들이 제 뜻을 따라 준다면 무림은 백 년간은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군께서 결정하셨다면 저희는 무조건 따를 뿐입니다.”

동정어옹의 말에 악불군은 고맙다는 표정을 한 번 보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결정으로 천호방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많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주군을 따르지 않았다면 이미 저희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평생 살수로 금전을 받고 사람을 죽여 왔습니다. 이제 무림의 평화라는 사람다운 목표를 위해 죽는다면 저희에게는 영광입니다.”

기정경이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크게 외치자, 고철황이 즉시 뒤를 따랐다.

“도둑질만 육십 년을 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사람다운 삶을 가져 봤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악불군은 모두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아닌 자신감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악불군을 따라 급히 일어선 간부들 한 명 한 명의 앞으로 가, 그들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무림의 평화를 가져오는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물론 악불군과 담수련이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던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이번 계획까지 성공한다면 악불군은 무림 역사상 최고의 대협으로 불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 * *

이른 새벽, 천호방의 정문이 열리고 이미 무림에 유명해진 담수련의 마차가 수많은 무사들의 호위 속에 나타나자 감시자들은 급박해졌다.

천상차라고 이름 지어진 담수련의 마차는 악불군의 움직임과 언제나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시작된 악불군의 첫 행선지가 어디일지는 모든 무림인 세력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첫 행선지가 남궁세가라는 것이 밝혀졌다.

악불군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남궁세가는 가주가 중요 인물들을 데리고 합비 성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처음 방문할 때 장로가 마중을 나온 것도 대단한 예우였는데, 일 년도 안 되는 사이 이젠 가주가 직접 나올 정도가 된 것이다.

악불군이 남궁세가에 머문 시간은 단 한 시진이었다. 가주와 악불군 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곧장 북쪽으로 이동한 악불군의 다음 행선지는 개방이었다. 정확하게 혈맹지약을 맺은 문파들부터 찾기 시작한 것이다.

개방에서도 한 시진 정도 머문 악불군의 다음은 소림사였다. 잠시도 쉼 없이 움직이는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소림사는 악불군처럼 십왕에 봉해진 광천대사가 있기에 더욱 세인의 관심이 쏠렸지만, 역시 머문 시간은 한 시진이었다.

* * *

“군사님, 맹주님께서 찾으시는데 왜 안 들어가십니까?”

우문상일의 걱정어린 질문에 제갈우명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맹주님께서 나를 찾는 이유를 뻔히 아는데, 난 아직 상황 파악도 안 되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모르는데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이냐?”

“아직 파악이 안 됐다고 말씀이라도 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림의 모든 이목이 악불군에게 쏠려 있기는 했지만, 두 명의 십왕이 존재하는 무림맹은 여전히 중원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가진 세력이었다.

악불군이 드디어 움직였다는 보고를 받고, 첫 행선지가 남궁세가라는 서신을 받았을 때까지는 제갈우명도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이미 자타가 공인한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외유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첫 행선지가 남궁세가라는 말에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문 시간이 단 한 시진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단지 인사차 갔다면 한 시진은 너무 길었고, 축하를 받기 위해 갔다면 한 시진은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틀 후, 개방을 방문하고 곧장 소림사로 움직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개방에 머문 시간 역시 한 시진 정도라는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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