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5화>
465화. 시작(1)
‘한 시진이나 대화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뭘까?’
제갈우명은 현 무림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샅샅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보고는 머리로 다 기억을 하고 있으니 정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혈맹지약을 맺은 문파들과 한 시진씩 대화를 나눌 정도로 심각한 사안은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추적하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얘기 역시 한 시진씩 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다. 매우 단순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자신이 악불군이라면 가장 먼저 무슨 일부터 할까를 고심하던 그때, 맹주전의 무사가 들어왔다.
“군사님, 맹주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우명이 들어오지 않자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전언이었다.
천제무황이 재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악불군의 움직임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급하신 것 같더냐?”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언짢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지금 들어가마.”
맹주전의 무사가 돌아가고 보고할 자료를 준비하던 제갈우명은, 군사전의 전서 담당자가 급히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우문상일도 그의 급한 표정에서 급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물었다.
“어디서 온 거냐?”
“소림사에서 온 것입니다.”
“이리 줘 봐라.”
제갈우명이 먼저 쪽지를 채 가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 맹주전으로 달려갔다.
“허허, 군사님께서 저렇게 허둥대는 것은 처음 보는군. 악 왕야의 시대가 왔음이 확실하구나. 내용이나 내게도 알려 주고 가시지. 궁금해서 어떡하지?”
우문상일은 제갈우명이 자신에게 급보의 내용도 알려 주지 않고 달려갈 정도로 허둥대는 것을 보자 즉시 악불군에 대한 정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처음 악불군을 보았을 때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대단한 후기지수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위치에 올라설 줄은 몰랐는데…….’
* * *
어느새 무당파까지 들른 악불군은 행선지를 동남쪽으로 바꿨다. 무림맹이 있는 군산으로 향한 것이다.
제갈우명이 받은 쪽지는 바로 악불군이 무림맹에 보낸 배첩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보고였다.
영웅대회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무림맹은 악불군이 무림맹에 온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그가 개별적으로 만났던 문파들과 무림맹과의 만남은 그 의미가 매우 달랐다.
무림맹은 다른 세력을 공격할 수 있는 전력이 있는 거대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마도와 사파는 무림맹의 공표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강호행을 할 때면 언제나 있던 시비도 이젠 전혀 없었다. 어떤 무림 세력도 천호방을 건드리는 것은 지금은 금기였다.
하물며 장강의 수적들은 이미 천호방을 지옥의 나찰보다 더 무서워했다.
예전 강호행 때 악불군이 수적 소탕령을 내리면서, 어부들을 괴롭히던 수적들 수십 곳이 말 그대로 작살이 났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탄 배가 나타나면 모든 배들이 길을 열었고, 수많은 어부들은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적을 제거한 것이 어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소군의 인기는 엄청난 것 같아!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와 함께 밖에 나가면 양민들이 도망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거든.”
“좋은 정책을 펼치면 언제든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생각합니다. 황상께서도 좋은 정책을 펼쳐 빨리 나라가 안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담수련은 말을 흐렸다. 주원장의 성정이 현명한 황제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경쟁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잔인했지만, 어렵게 자라 온 탓인지 백성들에게는 그래도 좋은 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좋게 평가할 수 있었다.
그때 이십 척이 넘는 쾌속선들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배에 걸린 기로 미루어 무림맹에서 보낸 배들이었다.
악불군의 배를 호위하듯 둘러싼 쾌속선들의 난간에 수많은 무인들이 줄을 섰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한 중년인이 포권을 하며 크게 소리쳤다.
“저는 무림맹 외곽의 경비를 담당하는 황보웅천입니다. 오늘 악 왕야께서 귀한 발걸음을 이곳까지 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그의 외침이 끝나자 모든 무사들이 검을 빼서 공중으로 들어 경의를 표했다.
[침착해. 그냥 가볍게 목례만 하면 돼.]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악불군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담수련이 급히 그의 손을 살짝 잡으며 전음을 보냈다.
이제 악불군은 어디를 가든 먼저 예를 받는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위엄을 보여야 하는 것 또한 악불군의 책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왕이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의 전음에, 악불군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황보웅천이 다시 소리쳤다.
“이제부터 저희들이 호위하겠습니다.”
군산의 초입인 이곳은 평소에도 어선은 물론 상선과 여객선 등 수많은 배들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뱃전으로 나와, 이십 척이 넘는 무림맹의 호위선들에 둘러싸여 무림맹으로 행하는 악불군의 배를 보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에게는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장관(壯觀)을 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악불군이 군산호로 들어가던 시각.
구천마황은 간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악불군이 한 달이나 칩거하다가 갑작스레 정파들을 돌면서 뭔가 의논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이냐?”
“이미 남궁세가와 개방, 소림사, 화산 그리고 무당까지 들렀습니다. 지금은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통광심의 보고에 구천마황은 검미를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장로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악불군이 지금 벌이는 행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느냐?”
구천마황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될 경우 만통광심에게 묻기 전, 장로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철저하게 머리로 분석된 만통광심의 의견과 수십 년 동안 마도의 무림인으로 살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경륜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장로인 단대경이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성주님, 지금 악불군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기세입니다. 그런 그가 중요 정파를 방문해 뭔가를 의논하고 무림맹으로 향했다는 것은, 본 성에는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노염백이 반대 의견을 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악불군은 예전부터 평화를 강조했고, 무림인 간의 전쟁을 극도로 경계하는 황상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자입니다. 그런 그가 무림에 혼란을 가져올 계획을 세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천마황은 둘의 의견이 모두 그럴듯한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의견은 없느냐?”
“악불군은 스스로를 정파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정파의 특징이 뭐겠습니까? 뒤로는 위선을 떨더라도 앞에서는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명분을 강조하는 자들입니다. 천호방과 본 성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더욱이 십왕 연회에서 그 조약은 꼭 지킨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했습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 성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호법인 뇌중범의 의견이었다.
“또 없느냐?”
하지만 더 이상의 의견은 없는 듯 모두는 고개를 숙였다.
“만통광심.”
“예, 성주님.”
“너의 분석을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아직 분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하의 만통광심이 장로와 호법들도 금방 의견을 낼 수 있는 이런 간단한 일을 분석하지 못하다니, 말이 되느냐?”
“장로님과 호법님은 무림 경험에서 우러난 직감을 말하신 것이지요. 하나, 군사는 직감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본 성에 즉각적인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악불군의 행동이 분석이 어려울 정도의 행동이라는 말이냐?”
“그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신생 문파의 방주로서 십왕이 되었고 엄청난 명성까지 얻었으니 다른 정파와 친분을 다지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 달이나 칩거했는지가 분석이 안 됩니다.”
“나도 영웅대회에서 돌아온 후 삼 일 가까이 폐관을 했지 않느냐? 악불군은 최대의 강적들을 모두 상대했다. 그 정도 폐관은 충분히 이유가 된다.”
“삼 일과 한 달은 그 차이가 매우 큽니다. 저는 악 방주께서 그 기간 동안 깨달음을 정리한 것뿐 아니라, 향후 자신의 계획을 세웠을 확률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무림의 최대 관건은 혈교와 측천무후궁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이다. 이미 전 무림이 협조하며 그들을 쫓고 있다. 그렇다면 한 달이나 계획을 세울 정도의 사안이 없지 않느냐?”
“그럴 사안이 없는데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분석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림맹을 나온 이후 악 방주께서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하는지를 본다면 그땐 정확한 분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구천마황은 만통광심이 너무 확대 해석을 한다고 느꼈지만, 우선은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모두가 반대하는 와중에 천호방과의 불가침조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관철시킨 만통광심의 판단이 대단히 현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좋다. 악불군의 행적은 계속 보고를 받도록 하고 다음 사안으로 넘어간다.”
구천마성 역시 아직 아수라마전과 화룡세가의 잔당들을 모두 소탕하지 못한 관계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세력 안에 적을 두고 있다면 남무림을 완전히 제패했다고 할 수 없었다.
거기다, 두 세력의 소탕에 성공한다 해도 점창파와 해남검문 등 남무림에 본거지를 둔 정파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안내된 장소는 맹주의 집무실이었다.
이미 배첩을 통해 천제무황과 백천학 그리고 제갈우명 세 명만 배석한 채 대화하고 싶다고 요청한 터라, 맹주전은 아주 조용했다.
악불군의 요청을 중시하여 맹주전 전체의 호위 무인들까지 모두 나가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악불군은 문 앞에서 서 있던 백천학과 두 손을 꽉 잡았다. 포권이 아니라 손을 잡았다는 것은 둘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방증이었다.
“담 소저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천학은 담수련이 역용도 안 하고 면사도 쓰지 않은 채 나타나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첫눈에 마음이 갔던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악불군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를 직접 본 후 마음을 접은 그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다시 흔들기에 충분했다.
“십왕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백 왕야.”
담수련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백천학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리끼리는 그 왕야라는 소리는 하지 말지요. 듣기 거북해서 죽겠습니다.”
“백 제도 그렇지요? 저도 그게 영 적응이 안 되더군요.”
백천학의 말에 악불군도 거들자 천제무황과 제갈우명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다음 대 정파를 책임질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면 그것은 향후 무림의 커다란 우환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친해졌으니 그들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모두 자리에 앉자 천제무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달씩이나 모습을 감추는 바람에 무림에 얼마나 많은 억측과 소문이 떠돌았는지 아느냐?”
“여러 가지 생각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 생각은 끝났느냐?”
“마음의 정리는 끝났습니다. 하나, 아직 결정을 완전히 못해서 여러 문파의 어르신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제갈우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동안 보인 행각에 대한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바로 악불군이 정리했다는 사안이었다.
분명 그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임은 분명했다.
“그럼 본 맹에 들어온 것도 그 문제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냐?”
“아닙니다. 결정을 못 했다면 아직도 다른 어르신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천제무황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럼 결정했기 때문에 맹에 들어오겠다고 한 것이란 말이냐?”
“어르신이나 백 제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번 사안은 어르신의 조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허락이 필요합니다.”
“허락이라……. 그래 말해 보거라.”
그 모습을 보던 제갈우명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