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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66화 (466/472)

<천검지애 466화>

466화. 시작(2)

담수련을 슬쩍 본 악불군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도와 사파의 세력을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악불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제무황과 제갈우명의 표정이 확 변했다.

제갈우명은 그렇다 쳐도 완벽한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이룬 절대 고수인 천제무황까지 놀랐다는 것은 악불군의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백천학은 많이 놀라지 않았다. 이미 둘 간에 많은 대화를 했고, 어느 정도 악불군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악 방주.”

“예, 어르신.”

천제무황은 악불군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반문했다.

“지금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는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삼백여 년 전 무림에 정사대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무림인이 죽었을 것 같으냐?”

“큰 혈겁이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백 년 전 무림의 대혼란 시기와 일 갑자 전 태양천의 침입으로 무림이 존폐 위기에 빠질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죽은 자들의 수만 따진다면 정사대전 때가 더 많았다. 그만큼 정파와 사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이 따른다.”

“정사대전이 반드시 일어난다면 저도 결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세력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자네가 몰라서 그런다. 사파나 마도에게 세력을 축소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선전포고라고 봐야 한다. 제이의 정사대전이 필연적으로 벌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르신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겨우 무림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정파는 여전히 예전의 성세에는 많이 못 미친다. 그런데 또 대규모 전쟁이 벌어져 제자들을 잃는다면 재기하기 어려운 문파도 생길 것인데, 어찌 무림맹의 맹주인 노부가 허락하겠느냐?”

악불군은 이미 천제무황이 불허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구천마성의 세력은 지금 속칭 남무림이라 불리는 광동, 호남 남부, 강서 남부, 광서 거기다 복건의 일부까지 퍼져 있습니다. 원나라가 물러나면서 모두 무주공산으로 변한 지역입니다.”

복건과 호남남부 그리고 강서 지역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탄탄한 전력을 갖춘 정파들이 여럿 존재했었다.

일대일로는 구천마성에 상대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건드리는 순간 큰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기에 구천마성에서도 대놓고 침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천에 의해 모두 멸문하고 살아남은 자들도 소수에 불과해 결국 문파 재건에 실패한 지역들이었다.

정파가 자신들의 문파 재건에 바빠, 그곳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자 모조리 구천마성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강서 북부와 복건 역시 악불군이 없었다면 모두 구천마성의 세력으로 변했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라고 그것을 몰라서 놔두고 있는 줄 아느냐? 지금 정파의 상황은 구천마성까지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태롭다.”

“그동안은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르신과 백 제 그리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악불군의 명성만으로도, 이미 정파의 전력은 두 배로 커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 방주가 정파이니 전체적인 전력은 정파가 더 크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천호방은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았지 않느냐?”

“그래서 말인데, 천호방도 무림맹에 입맹할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림맹을 대표해서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를 방문해 그들의 세력권을 지정해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무림맹과는 전면전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할 것입니다.”

악불군이 무림맹에 입맹하겠단 말에 천제무황과 제갈우명의 눈이 커졌다.

천호방이 무림맹과 행보를 같이하는 순간 무림맹은 거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전력을 갖게 될 것이 자명했다.

한마디로 더 이상 마도나 사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 힘이 강해졌다 하여 세력을 축소하라는 식의 강압을 펼친다면 역시 전쟁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제갈우명은 급히 손익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구천마황과 혈해사황이 전쟁을 피하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자들의 성정이 얼마나 패도적인데 힘에서 밀린다고 세력을 줄이겠느냐? 그래, 혈해사황은 구밀복검(口蜜腹劍)할 수도 있겠지. 하나 구천마황은 바로 반발할 것이다.”

제갈우명의 말에 천제무황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둘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무림인은 정파에는 없었다.

“정파에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만 확실하게 보여 준다면 오히려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국지전은 피하기 어렵겠지만, 전면전은 절대 없도록 해야겠지요.”

“맹주님! 악 방주님과 마도와 사파의 세력 확장에 대해 깊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이대로 그들의 세력 확장을 그냥 두었다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면 그들의 전력은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큰 구역을 원하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정파와 부딪칩니다. 제궤의혈(堤潰蟻穴)이라고 했습니다. 막을 수 있을 때 막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전 악 방주의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

백천학까지 찬성 의견을 내자 천제무황의 표정이 굳어졌다.

광동을 기반으로 했던 구천마성은 원나라 패망 후 남무림 전체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그들이 관할하는 구역은 예전의 두 배 이상 넓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수입이 많아지고 수하들도 늘 것은 자명했다. 세력권의 크기에 비례해 전력이 커진다는 것은 무림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천제무황이 답을 하지 않고 고심을 거듭하자 담수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르신이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방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달이나 숙고를 하신 것이지요. 어르신을 뵙기 전에 다른 문파를 방문한 것도 그만큼 이 계획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왕이 되신 세 분은 뭐라고 하시더냐?”

“어르신과 같은 고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잠재적인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셨습니다.”

“세력을 축소하라고 촉구할 것이라는 말도 했느냐?”

“예, 방주님께서는 만약 마도나 사파에서 반발한다면 직접 앞장서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천명(闡明)하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시 악 방주가 앞장은 선다는 말이냐?”

악불군은 한 문파의 수장이고, 더구나 왕의 신분이자 이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정도로 높은 명성을 구축한 터였다. 그런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위험까지 무릅쓰고 굳이 전면에 나서면서까지 이런 계획을 밀고 나가려는 것인지, 천제무황과 제갈우명은 의아했다.

“이미 젊은 나이에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명예와 명성을 모두 얻으셨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앞장서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갈우명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변함없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친 악불군이 입을 열었다.

“……무림이 평화로워지면 양민들도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유할 수 있습니다. 전 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힘없고 돈 없는 양민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한다느니, 마도와 사파는 악을 추구하니 그들을 제어하는 것은 정파가 해야 할 일이니 등, 판에 박은 대답과는 완연히 결을 달리하는 악불군의 대답에 모두는 잠시 숙연해졌다.

어찌 보면 진정한 대협이란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촌각(寸刻)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천제무황의 입이 열렸다.

“……노부가 허락을 한다면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이냐?”

“지금은 혈교와 측천무후궁을 추적하여 소탕하는 일이 최우선이니 잠시 시간을 벌 생각입니다.”

“시간을 벌다니? 그건 무슨 의미냐?”

상황이 아직은 무르익지 못했으니 조금 더 기다리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시간을 번다는 것은 그 전에 무엇인가 일을 벌일 생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먼저 중경에 들려 천중마도문을 방문할 생각입니다.”

“천중신마를 만난다는 말인가?”

“예. 우선 그분을 만나 제 뜻을 따라 달라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같은 십왕이지만 구천마성과 혈해사황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받고 있는 천중신마였다. 악불군은 구천마성과 혈해사계 역시 천중마도문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화가 잘되면 좋지만 만약 잘 안 풀려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반발은 최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쩔 생각인가?”

“그분을 도발해 저를 공격하게 할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만 명분이 없을 때, 무림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십왕을 죽인다면 황상이 언짢아하실 텐데?”

“이미 황상께서는 무림의 일은 제게 일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악불군은 이미 천중신마를 제거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허허허! 정말 자네는 거침이 없구먼! 만용이라고 하기에는 능력이 받쳐 주고, 논리가 정연하고 계획까지 철저하게 세워 실행에 옮기니 너무 급진적이라고 볼 수도 없고. 자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무림은 아마 최고 전성기를 맞이할 것 같구나.”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 전에 무림맹에 입맹한다면 어떤 지위를 바라느냐?”

“지위는 백 제와 비슷한 정도면 됩니다. 다만 맹의 결정에 대해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한만 주십시오.”

“맹은 연합체이기 때문에 장로회의에서 다수결로 결정이 나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만약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 규정이 생긴다면 그 순간 맹은 무너진다.”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그렇다면 맹의 결정을 잘 따르고 있는지를 수사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교묘한 제안이었다.

맹의 결정을 잘 따르는지를 수사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면, 그가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그를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되는 것이니 안 따를 수 있는 권한이기도 했다.

“맹에는 이미 감찰당이 따로 있다. 거기다 너를 당주 자리에 앉힌다면 더 높은 간부들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특별 감찰단을 새로 신설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 제가 지금 중원 총순찰이니, 저는 중원 총감찰 자리라면 공평할 것 같기도 합니다.”

중원 총순찰은 중원의 무림맹의 모든 무력을 지휘 동원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맹의 요직 중 요직이었다.

그런데 백천학과 같은 권한을 줘야 한다면 모든 조직을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밖에 없었다.

천호방이라는 방의 방주이자 무림 십왕의 한 명이고, 이미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그에게 무림맹의 모든 조직과 사람을 감찰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준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여 주는 것과 같았다.

천제무황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맹의 권력의 반은 악불군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갈우명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악 방주에게 너무 큰 권한을 쥐여 줘도 다른 문파에서 반발이 없겠느냐?”

“누가 어떤 자리에 가든 반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반발을 공공연히 하느냐, 뒤에서 숨어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악 방주께 대놓고 반발할 세력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악 방주께서 입맹을 하신다면 무림맹의 위상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높아질 것이니, 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맹에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제무황은 잠시 숙고에 들어갔다.

제갈우명의 말대로 분명 불만을 가질 문파는 존재할 것이었다.

하나, 십왕을 무려 세 명이나 보유한 세력이라면? 거기다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에서 뽑힌 또 다른 십왕들도 정파였다.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정파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드디어 천제무황의 입이 열렸다.

“좋다,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마. 또한 자네의 계획 역시 허락하겠다. 단, 전쟁이 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은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을 불사한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면 마도나 사파를 누를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그렇게 말씀드린 것일 뿐, 저도 전쟁은 절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우선 천호방의 입맹과 악 방주를 무림맹 중원 총감찰에 임명한다는 공표는 언제 했으면 좋겠나?”

“제가 중경에 도착할 즈음에 공표해 주십시오.”

악불군과 담수련의 마지막 계획이 드디어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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