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7화>
467화. 변화(1)
* * *
무림맹에서 나온 악불군이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다시 무림을 강타했다.
그동안의 움직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다음 목적지에 대한 소문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악불군의 천호방은 동무림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관계로 서무림인들에게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악불군은 서무림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전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최고수로 변해 있었다.
당연히 서무림의 무림인들의 촉각은 악불군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천의 정파인들은 악불군이 서쪽으로 온다는 말에 어디로 갈지 기대를 많이 했다. 그가 방문하는 것 자체로 문파의 위상이 오를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외유 때면 기습에 대비해 언제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담수련은 이번 외유에서는 종종 백설을 몰고 악불군의 옆에서 나란히 움직이곤 했다.
“힘들기는?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오히려 힘이 펄펄 나는걸!”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니까 저도 좋습니다.”
“난 소군이 정말 너무 자랑스러워. 내가 세운 계획이지만 정말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모두 아가씨와 가주님 덕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잠룡세가 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난 소군이 이룬 것은 모두 소군의 능력이라고 생각해. 아마 소군은 어떤 분야의 일을 하든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
담수련의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악불군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그녀였다. 분명 악불군은 천재였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진짜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전쟁은 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랬잖아? 이번 일은 무림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이야. 태양천이 원나라까지 등에 업고도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 이유가 뭘 것 같아?”
“혈해사계는 태양천에 협조를 했고 구천마성은 지하로 숨었지 않습니까?”
“대공 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했어. 난 그가 구천마성을 찾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봐. 혈해사계도 협조했다고는 하지만 부역자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협조만 했고 뒤로는 영웅회를 도왔다고 해. 그럼에도 대공이 두 세력을 결국 모른 척 방관한 것은 피해가 너무 막심하다고 판단해서일 거야.”
“구천마성이 숨었다고는 하지만 광동은 여전히 구천마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사파와 마도는 건드리기가 어려운 존재라는 말이 되겠지. 정파 역시 무림맹이라는 거대 세력을 만들었으면서도 부역자만 추적할 뿐, 그들은 건드리지 못했어. 아니 그냥 모른 척 눈감고 있었던 거야.”
“역시 그들을 건드렸을 때 입을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겠지요?”
“응. 그런데 그들에게는 약한 사람에게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 약하다는, 우리에게 아주 유리한 특징이 있어. 소군이 만약 전쟁을 일으켜 그들이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면 전쟁 없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야.”
처음 악불군이 마도와 사파의 힘을 줄여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 역시 매우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공하고 실패하고는 다음 일이었다.
그녀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악불군이 또다시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러나 무림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악불군의 말에 결국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은 그때 둘이 심층 있게 대화하면서 나왔던 말들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같은 내용으로 대화하는 것은 악불군도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어 진짜 정사대전이 벌어지게 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맹주 어르신께서는 구천마황을 심히 걱정하는 것 같더군요?”
“성정이 불같다고 했어. 그런 사람은 우리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가 매우 어려워. 하지만 소군이 그를 압도하는 무위를 보인다면 결국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를 죽였으니 무황들도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었다. 무황들은 생사경에 근접하는 무위를 지닌 초고수들이었고 모두 그들만의 특징을 지닌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악불군의 무공과 천적관계에 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악불군은 당연히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도 그들이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계획의 관건이었다.
담수련이 말한 압도하는 무위를 보이라는 의미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그가 꼬리를 말게 만들라는 뜻이었다.
[주군, 앞에 족히 삼십 명은 넘는 무림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흑석영의 전음을 들은 악불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서 온 자들인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복장에 천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하니 천중마도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배첩을 어제 보냈는데 벌써 나타나다니 나름 정성을 보이는 것 같군요. 우리도 최대한 예의 있게 행동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천중마도문에서 마중을 나온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다니 소군의 위상이 정말 대단하네!”
천호방의 행렬이 도착한 곳은 중경의 경계로 천중마도문까지는 아직도 반나절은 더 가야 했다. 그들이 이곳까지 정파인을 마중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은 천중마도문에서 악불군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사람을 지위로 보지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 주는 것이 전 더 좋습니다.”
처음 강호행을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너무 다르게 대우하고 있었다. 악불군은 그게 그리 편치는 않았다.
“황제가 돼서 그 자리에 맞는 예우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야.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 위해 평생을 절치부심하셨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하지만 이런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소군이 오히려 더 빨리 이런 지위를 가지게 된 것도 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
둘의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꽤 많은 무인들이 말에서 내려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중마도문의 장로인 유가위라고 합니다. 무림에서는 흑풍마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악 왕야께서 중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가위는 서무림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지닌 자였다. 문제는 그가 대단히 악랄한 자라는 것이었다.
“유 장로님이시군요. 전 천호방의 악불군입니다. 이번 방문은 무림인으로서 온 것이니 왕야란 칭호보다는 방주라는 칭호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무림의 일로 오셨다 해도 저희가 감히 그런 호칭을 어찌하겠습니까? 왕야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악불군은 더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좀 바쁩니다. 지름길이 있으면 그쪽으로 갔으면 싶습니다.”
중경으로 들어가는 관도는 산을 피해 굉장히 먼 길을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지름길이 있기는 하지만 마차가 지나기에는 길이 너무 험합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안내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을 따라오십시오.”
악불군은 산속을 질러 넘어가는 지름길이 대단히 험하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바쁘게 갈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름길을 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 * *
영웅대회를 끝내고 중경 총단으로 돌아온 천중신마는 실로 성대한 잔치를 며칠씩 벌였다.
중경의 모든 마도인와 사파인들이 모였고 잔치가 끝났을 때는 모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천중신마가 십왕이 되기 전에는 구천마성과 혈해사계의 눈치를 보느라 어중간한 자세를 취하던 행보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강력한 무력을 지녔을지라도 작은 문파에 불과했던 천중마도문은 며칠 만에 중경의 패자로 등극한 상태였다.
서무림을 대표하는 사파 세력이 흑혈사계이고 남무림을 통치하는 마도 세력이 구천마성이라면 중무림은 천중마도문이 대표하겠다는 큰 포부로 세력 확장을 계획하며 기세가 등등하다가 갑자기 날아온 한통의 서찰로 긴장에 쌓이게 된다.
무림맹을 나온 악불군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 하루도 안 되어 도착한 방문을 청하는 배첩이었다.
천중신마는 우선 군사인 냉혈마심의 권고에 따라 급히 장로인 흑풍마자에게 마중을 가게 한 후 회의를 소집했다.
“냉혈마심.”
“예, 왕야.”
천중신마는 왕야라는 칭호를 아주 좋아해서 더 이상 문주라 칭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천중마도문도 곧 천중왕부로 이름을 바꿀 계획이었다.
“계속 정파만 만나던 그가 왜 갑자기 본 문을 방문하려는 것인지 분석은 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분석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악불군이 구천마성이 혈해사계를 찾아간다면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 본 문을 찾을 이유는 전혀 유추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를 모르니까 지금 비상인 것 아니냐? 악불군이 설마 나와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 찾아오겠느냐?”
“십왕 연회 때 악불군이 왕야를 초대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바보도 아니고 호랑이 아가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거길 왜 가겠느냐? 그대로 거절하기도 뭐해서 못 들은 척 그냥 넘겼다.”
‘초대에 답을 안 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직접 온다?’
냉혈마심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천중신마가 십왕이 되면서 그의 위상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실지로 천중마도문을 백안시하던 중경의 정파인들까지 한 번 방문을 하겠다고 배첩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악불군은 같은 십왕이지만 천중신마와는 그 격이 달랐다.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를 죽이면서 그는 십왕 이상의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천중신마가 찾아간다면 모르지만 그가 직접 찾아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격에 맞지 않았다.
“왕야, 아무래도 좋은 이유는 아닐 것 같습니다.”
냉혈마심의 판단이 나오자 천중신마의 표정이 확 변했다.
세력은 작았지만 그는 구천마황이나 혈해사황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강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한 명 생겼다.
바로 악불군이었다.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와 싸우는 모습을 가장 근거리에서 본 열 명의 십왕들. 그들만큼 악불군이 진짜 강하다는 것을 절감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었다.
“안 좋은 이유라면 무엇이겠느냐?”
“한 달간 칩거하다가 갑자기 정파들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설마 우리와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전쟁을 벌일 생각이라면 배첩까지 보내고 방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이곳은 저희의 본거지가 아니겠습니까? 싸울 생각이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장소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 좋은 이유라고 하지 않았느냐?”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준비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준비를 하라는 것이냐?”
“우선 외유를 나간 수하들을 모두 귀환하라는 명을 내리십시오. 본 문의 전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알았다.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은 자이지만 본 왕이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천중신마는 심각한 위험 신호를 느낀 듯 자신의 도를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