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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70화 (470/472)

<천검지애 470화>

470화. 결착(2)

“사실은…….”

악불군이 또 말을 멈추자, 담수련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재촉했다.

“소군답지 않게 왜 자꾸 뜸을 들여? 난 어떤 말을 들어도 다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니까?”

그녀는 도대체 어떤 말을 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악불군은 일다경 가까이 고심하더니 작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좀 더 있다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솔직히 제가 너무 떨려서…….”

순간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천하의 악불군이 떨릴 정도라니, 어떤 말이기에?

“나한테 말하고 나면 안 떨릴 거야. 말해 봐.”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걱정에 밀리던 기대가 다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지금 악불군은 혈우대마종과 싸울 때 이상으로 힘든 얼굴이었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심지어 손까지 약간 떨고 있었다.

악불군의 그런 모습은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던 담수련조차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총단으로 돌아가면 그때 말씀드리지요.”

담수련은 악불군이 결국 뒤로 빠지자 화가 난 듯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그리고 사화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화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가장 가까이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둘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책임감이 너무 강한 악불군이기에, 절대로 자기 입으로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는 담수련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담수련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하며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니 사화 말대로 자신이 물꼬를 터 주기 전에는 이런 상황이 평생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담수련은 고개를 돌렸다. 악불군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자 불안한 것인지 아니면 미안한 것인지 눈을 감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담수련은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악불군은 그녀가 옆에 앉자 눈을 뜨며 무심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담수련은 그의 목을 꼭 껴안으며 그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갖다 댔다.

‘읍!’

악불군은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삼류급의 무공을 지닌 담수련의 움직임을 절대 고수인 그가 왜 피하지 못했는지는 심히 의아한 일이었지만, 악불군은 너무 간단하게 그녀의 공격에 당해 버렸다.

그리고 곧 눈을 감은 그는 담수련을 으스러지게 꼭 껴안았다.

지금 천하의 판도가 뒤바뀔 정도로 엄청난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억지로 참아 왔던 마음들이 한순간 통하면서 모든 사안들은 그들의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혈해사계의 간부 회의실.

그들은 가운데에 놓인 서찰을 보며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불군은 공동파를 방문한 자리에서,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공동파와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적의 공격을 받을 시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는 공동 발표문을 공표했다.

정치를 싫어하는 그였지만, 무림에서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 그의 행동은 모두가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동 발표문이 공표되는 그 시각, 혈해사계에는 악불군의 배첩이 도착했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 같이 일이 진행된 것이다.

배첩은 아주 정중했다. 하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악불군 이놈이 공동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본 계에게 대놓고 경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공동파를 공격할 세력이란 본 계밖에 없지 않습니까?”

장로인 도룡마수가 분노를 표출하자 모두의 얼굴에서도 분노한 표정이 나타났다.

“거기다 배첩에 쓰인 내용을 보십시오. 감히 무림평화를 위해 왕야와 함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건 천중신마에게 했던 방식을 우리에게도 사용하겠다는 의미로밖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귀혼잔마 역시 매우 불쾌한 어투로 의견을 표출했다.

‘그놈이 내게 꽤 뼈있는 말을 했단 말이야…….’

둘의 말을 들으며 혈해사황은 십왕연회 때를 생각했다.

악불군은 대놓고 그의 다음 행동으로 인해 감사한 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했었다.

“온다는 날짜가 언제냐?”

“오늘입니다.”

“이미 본 계에 들를 생각을 하고 공동파에 왔구나.”

“공동파에서 여기까지는 반나절 거리입니다. 오늘 아침 출발했다면 이미 총단에 거의 다 왔을 것입니다.”

뇌혼광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관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악불군이 총단 세력권 내로 들어섰다는 보고입니다!”

총관의 보고에 혈해사황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시빗거리를 줄이고 싶었다.

하나, 그 모습에 악불군이 자신이 겁을 먹은 것으로 오해해 더 강하게 나올 것이 걱정됐다.

그렇다고 너무 허술하게 대접한다면 그 자체로 적의를 보이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뇌혼광뇌.”

“예, 왕야.”

“악불군이 총단에 들어서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준비는 했겠지?”

“예, 천 명의 고수가 들어와도 살아나가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함정을 파 놓았습니다. 왕야께서 명만 내리시면 즉시 악불군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좋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우선은 두고 보자. 악불군이 오면 빈청으로 안내해라.”

“예!”

* * *

악불군은 천중신마에게 세력 확대를 하지 않겠다는 공표를 좀 미뤄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그는 악불군이 천중마도문을 떠나자마자 그대로 공표를 했다.

누구라도 악불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천중신마는 혈해사계와 구천마성에 지금 악불군이 어떤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를 공표를 통해 넌지시 알린 것이다.

그 바람에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는 좀 천천히 공략하려던 악불군의 계획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해졌다.

“천중마도문 때문에 혈해사계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소군도 이번은 조심해야 해.”

마차 안에 탄 악불군의 품에 폭 안기다시피 한 담수련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 악불군은 계속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사화를 비롯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이미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동안 더 강해졌습니다.”

악불군은 품에 안긴 담수련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호칭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상공?”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갑자기 온몸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말이 듣기 좋았다.

“천천히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결정이 뭔지 말해 주실래요?”

“아가씨께서 자꾸 존대를 하니까 듣기가 좀 어색하네요.”

“딴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사실은, 잠룡세가를 떠날 때 가주님께서 제게 명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아가씨를 천하제일의 영웅과 혼인을 시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그녀에게 한 번 했던 얘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악불군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짜게 만든 동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천하제일의 영웅이 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소군이었구나?”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며 반문했다.

“그래서 아가씨께 저랑 혼인하실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자고 결정했는데, 막상 물어보기가 쉽지 않더군요.”

“내가 안 그랬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말 안 하려고 했지?”

“설마 그러기야 했겠습니까? 다만 제 신분도 그렇고…….”

“신분 얘기를 하면 내가 지금 훨씬 꿇리는 거 알지? 소군은 왕야고 난 부역자의 딸이야. 소군의 신분이 문제가 아니고 내 신분이 더 문제거든.”

“제게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입니다. 전 평생 아가씨만 보고 살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유모 말이 맞았어. 사랑을 하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더니,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이대로 죽어도 난 행복할 거야.’

그런 그녀를 악불군은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쌓아 온 둘의 사랑이 점점 결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악불군이 총단 앞에 도착했다는 말에 혈해사계는 또다시 긴장에 빠졌다. 모든 수하들은 물론 담수련까지 혈해사계 총단에서 일 마장 이상 떨어진 곳에 머물게 하고는 그 혼자서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혈해사황을 비롯한 간부들은 악불군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싸울 생각을 하고 나타난 것이 분명합니다.”

뇌혼광뇌의 말에 혈해사황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악불군과 혈우대마종이 싸우던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십왕 연회에서 돌아온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 본질적으로 혈우대마종과 비슷한 부류의 마공을 익힌 그로서는 악불군을 공략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혈해사계를 방문했는데 우리가 떼거리로 공격했다는 말이 퍼진다면 사파들조차 우리를 비난할 것이 분명해. 그렇다고 내가 잡지 못하면 악불군 그놈은 어떻게든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야.’

혈해사황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만약 죽인다 해도 상당한 후폭풍을 감수해야 할 판에, 살아서 도망을 친다면 이후 벌어질 일은 자명했다.

악불군은 분명 혈해사계의 비겁함을 명분으로 삼아 정파를 몰고 대규모 공격에 나설 것이었다.

“너희들, 악불군을 죽이지 못하면 혈해사계도 끝난다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는 거냐?”

혈해사황의 반문에 모두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이곳에 있는 간부들은 모두 영웅대회에 참관했던 자들이었다.

바로 악불군과 혈우대마종 그리고 측천무후와의 생사결을 모두 본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무공 수위를 정확히 아는 나백귀왕이 고작 일 초 만에 죽는 것을 보며 소름이 돋는 경험까지 했었다.

“그자의 무공으로 미루어 보면 상처는 입힐 수 있어도 죽이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뇌혼광뇌.”

“예, 왕야.”

“혈해사계에게 가장 좋은 대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태양천이 다스리던 일 갑자 동안 본 계는 온갖 치욕도 다 견뎌 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전 이번에도 우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내하다 보면 분명 기회는 또다시 올 것입니다.”

뇌혼광뇌의 의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치욕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자고 할 경우, 극렬하게 반대하는 자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두 고개만 숙일 뿐 뇌혼광뇌에게 반발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혈해사황은 간부들의 반응을 보자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악불군이 태양천주를 제거할 때, 무리하면서까지 악불군을 제거하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예상보다 빨리 사파가 몰락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총관.”

“예!”

“악 왕야에게 조금의 흠도 잡히지 않도록, 최대한 공손히 예의를 갖춰 맞도록 해라.”

혈해사황은 이제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음 대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 * *

천중마도문에 이어 혈해사계까지 세력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공표를 하자 천하는 악불군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혈해사계는 이미 장악한 감숙의 동쪽 지방까지 공동파에게 양보하고 물러나기로 하면서, 악불군의 명성은 무황의 명성을 완전히 대체하기 시작했다.

후일, 검신서벌(劍神西伐)이라 불리며 정파의 최고 전성기를 여는 시발점이 된 악불군의 외유는 우선 거기서 멈췄다.

이제 남은 곳은 가장 강력한 구천마성이었지만, 악불군은 항주로 돌아온 후 한 달이 넘도록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하나, 무림인들은 침묵한 채, 천호방과 구천마성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모두는 지금을 폭풍전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매듭짓기 위해 은밀하게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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