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71화>
471화. 정리(1)
“오신다고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맛있는 음식이라도 준비해 두었을 텐데?”
종리화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앞에 놓인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요즘은 어디 움직이기가 어려워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방주 호법 네 명뿐이에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며 말했다.
“요즘, 악 방주의 명성이 천하를 흔들더군요. 당연히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요. 그런데 저를 보시려고 여기에 오신 건가요?”
“유모께 드릴 말씀도 있고, 아버지도 만나려고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곳을 감시하고 계셨습니까?”
“제가 어찌 유모를 감시하겠어요?”
“그럼 가주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지금 믿을 수 있는 분이 유모밖에 없잖아요. 측천무후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측천무후궁은 여전히 암약하고 있고, 아버지의 얼굴을 아는 무림인들도 많으니 결국 가실 데라고는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가주님의 심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두 분께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으니 말씀드려 주세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종리화가 나가자 악불군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가 매우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분명 문으로 나갔는데 뜬금없이 벽이 열리며 종리화와 담무룡이 같이 나타났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급히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직은 너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종리화가 간곡히 사정해서 나왔으니 간단히 용건만 말하거라.”
담무룡은 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자리에 앉으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모도 앉으세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제게 화 많이 나셨지요?”
“그렇게 사랑하며 키운 딸이 아비를 배신했는데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 오늘은 왜 온 거냐? 악불군 너의 천하가 된 것 같으니까 걸림돌이 될 나를 제거하러 온 거냐?”
“어찌 제가 그런 황망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악불군이 다급히 변명을 했다. 그러자 담수련이 약간 뾰족한 음성으로 부언을 했다.
“소군은 잠룡세가의 식솔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제가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세요? 매일매일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어요. 그런 아버지께서 살아오셨어요. 전 또다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에요.”
“악불군과 네가 나를 돕는다면 난 죽지 않고 오히려 천하의 패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소군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천하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어요. 거기다 이미 세상이 변했어요. 예전의 잠룡세가는 사라지고 지금은 부역자 집단일 뿐이라고요.”
정곡을 찌르는 담수련의 말에 담무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제 마음을 비우시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시면 되잖아요? 유모는 무슨 잘못으로 계속 이렇게 사셔야 하는 건데요?”
종리화까지 언급하자 일그러졌던 담무룡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그가 가장 심리적으로 가장 미안해하는 사람이 바로 종리화였기 때문이었다.
“……종리화.”
“예, 가주님.”
“너도 수련이와 같은 생각이냐?”
“가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도 죽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가주님과 아가씨의 안전 때문에 당장 죽지는 못하겠더군요. 하지만 이젠 저도 편한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무림에 출두하여 짧은 시간 만에 혈의나찰이라고 불리며 가장 강한 여인 중 한 명으로 불리던 그녀는, 담무룡과의 대결에서 패한 후 그의 수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담무룡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담무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종리화가 따라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 다시 말하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어요. 아버지를 따를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유모와 함께 편하게 사세요.”
담무룡도 이미 자신이 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의 인생이 너무 허무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이냐?”
힘겹게 반문하는 담무룡을 보자 담수련은 마음이 아픈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군이 아버지께 저를 천하제일 영웅과 혼인을 시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랬지. 그래야 너는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천하제일 영웅하고 혼인할 생각이에요.”
“네가 말이냐?”
악불군에게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담수련이 혼인을 진짜 할 수 있을지는 그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녀의 오음절맥 때문이었다.
“예.”
“천하제일 영웅이 누구냐?”
“아버지 생각에 지금 무림에서 천하제일 영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담수련의 반문에 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담무룡의 시선이 악불군에게 옮겨 갔다.
“악불군, 너냐?”
그의 부름에 악불군은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가씨와 강호를 종횡하면서 제가 얼마나 아가씨를 사랑하는지 알았습니다. 가주님께서 미천한 저를 받아주신다면 평생 아가씨를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수련이가 오음절맥이라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지금 악불군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태양천주를 죽이고 혈우대마종과 측천무후까지 제거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악불군이 자신의 수하였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지금의 악불군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하지만 담수련과 혼인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아가씨의 병은 제가 책임지고 고쳐드릴 것입니다.”
“정말 고칠 수 있겠느냐?”
“제 목숨을 걸고 반드시 고칠 것입니다.”
“수련이, 너는 정말 악불군을 좋아하느냐?”
“마차 안에서 소군을 처음 본 날부터 좋아했어요. 소군은 제게 오라버니이자 친구이자 보호자예요. 그리고 지금은 제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고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 이미 이렇게 될 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담무룡은 종리화를 보며 말했다.
“내가 뒷방 늙은이가 되어 태산의 구석에서 살아도 나를 따르겠느냐?”
“전 가주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갈 것입니다.”
담무룡은 대답하는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보더니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내 세상이 끝났음을 확실하게 알겠다. 좋다. 허락하마. 단, 수련이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감사합니다.”
“너희들 혼인은 내가 못 볼 것 같다. 대신 태산의 종가로 한번 들르거라. 종리화와 난 태산종가로 돌아가겠다.”
드디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말하는 담무룡의 얼굴은 단번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 * *
천중마도문과 혈해사계의 공표 이후 한 달이 넘는 동안 무림은 실로 조용했다.
물론 혈교와 측천무후궁의 추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더 이상 그들은 무림의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바로 악불군이라는 새로운 무신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제 모든 무림인들의 촉각은 구천마성에 쏠려 있었다. 구천마성의 힘은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맹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다.
무림맹이 연합체인 점을 감안한다면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아할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무림인들은 악불군이 언제 구천마성에 찾아갈지를 놓고 설왕설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 못한 발표가 천호방에서 터져 나왔다.
악불군과 담수련의 혼인 소식이었다.
천호방은 거의 모든 문파에 초청장을 보냈다. 영웅대회와 맞먹는 무림인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백 년에 걸쳐 혼돈의 시기와 치욕의 시기 그리고 혼란의 시기를 거쳐 온 무림에 최대의 경사가 난 것이다.
초청을 거절한 문파는 없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시기에 혼인을 발표했는지를 두고 모든 문파는 분석에 들어갔다.
너무 오랜 시간 서로를 사랑하면서 애만 태우던 두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자 기다리지 못하고 혼인을 결정한 것이었지만, 무림인들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무림이 축하하는 그 일에, 한 문파만은 악불군의 초청장을 두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구천마성이었다.
다른 문파와 달리 구천마성에게만은 특별한 조건이 담긴 초청장이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법 뇌중범은 분노한 목소리로 커다랗게 말했다.
“성주님, 악불군 이놈도 결국은 위선적인 정파일 뿐이었습니다.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다니, 이건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응징이라? 뇌 호법.”
“예! 성주님.”
“응징할 자신은 있느냐?”
구천마황의 반문에 뇌중범은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그. 그게 무슨…….”
“악불군이 무림맹에 가입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제 악불군과 싸우면 천호방만이 아니라 무림맹, 거기에 더해 정파 모두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응징이니 뭐니 하니까 딱해서 하는 말이다.”
“하, 하지만 그놈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혈해마계와 천중마도문이 세력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공표를 한 후, 구천마황은 만통광심과 악불군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거의 매일 분석하고 대비책을 세워 왔다.
그러나 악불군이 무림맹까지 등에 업자, 더 이상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림 세력 간의 전쟁은 전체적인 전력이 어느 쪽이 강하냐도 중요했지만, 고수의 수가 더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악불군 쪽에는 십왕이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다.
전체적인 전력도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수들의 수까지 현저히 적은 지금 전쟁은 무조건 필패였다.
만통광심은 어느 정도 비등한 전쟁을 하기 위해선, 천중신마와 혈해사황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천중신마는 그렇다 쳐도 혈해사황은 구천마황이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는 사이였다. 거기다 이미 둘 다 꼬리를 만 상황이었고, 연합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문제는 악불군의 요구가 그들이 받아들이기 너무 치욕적이라는 것이었다.
악불군은 초청장에 구천마성의 세력을 광동으로 한정한다는 공표를 자신의 혼인 선물로 달라고 요구했다.
간부 회의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실질적인 방도가 없는 지금, 모든 의견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 * *
악불군의 혼인식 준비는 실로 거창했다.
무림맹주는 물론 각 파의 장문인들이 직접 참석했고, 따라온 간부와 제자들까지 하면 항주 전체의 객잔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해 외곽에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군막이 수십 개나 만들어졌다.
한 문파의 수장의 혼인식으로는 무림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인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도와 사파에서도 참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혼인식 전날, 드디어 구천마성에서 세력을 광동으로 한정하고 다른 성에 있는 수하들은 모두 철수시킨다는 발표를 했다.
구천마성의 후퇴는 곧 무림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구천마성이 광동으로 물러난 것이 악불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악불군에게 천호검신이라는 명호 뒤에 무신이라는 또 다른 별호가 붙었다.
전 무림인들이 환호를 하고 있는 그때.
악불군과 담수련은 또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