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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472화 (472/472)

<천검지애 472화>

472화. 정리(2)

혼인 전야제.

총단 전체가 잔치로 흥겨운 시간.

악불군은 소걸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구천마성의 움직임이 평온하다?”

“응, 절대 전쟁 분위기는 아니야. 구천마황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진짜 겁을 먹고 네 요구를 받아들인 것 같다.”

소걸아의 말에 악불군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높은 산을 넘은 것이다.

“그럼, 이제 혼례에 전념해도 되겠군.”

“사람들은 왜 지금 혼례를 올리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아.”

“내가 혼례를 올리겠다는데 말이 많을 이유가 있나?”

“바로 혼례를 올리는 사람이 악불군이니까. 너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어. 이제부터는 말 한마디도 생각해 보고 해야 할 거다.”

소걸아의 걱정은 사실이었다. 지금 무림인들은 악불군의 모든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사람들 마음이고. 그런데 소걸아, 자네가 매향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던데 진짜야?”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사화가 그러던데?”

“악불군, 내가 매향 낭자를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무슨 생각을 했는데?”

“운명의 여자를 만났구나! 단번에 알아봤다. 요즘 난 매일 매향 낭자와 함께 땅을 침대 삼고 하늘의 구름을 이불 삼아 천하를 함께 주유하는 꿈을 꾼다.”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었지만 악불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거지 생활을 같이하는 꿈을 꿨다는 얘기가 아닌가…….

“사화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란 아이들이다. 땅을 침대 삼고 구름을 이불 삼는 생활은 내가 허락하기 힘들 것 같은데?”

“뭐! 친구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초 치는 소리를 할 거냐?”

“이건 우리가 친구인 것과 상관없는 내용이다.”

“알았어. 그럼 그건 취소하지. 그런데 넌 혼인식하고 첫날밤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아냐?”

“이미 다 계획을 짰다.”

“계획을 짜? 첫날밤이 다 똑같지, 계획 짤 게 있나? 아! 있긴 있구나. 아이들을 몇 명을 낳을지 계획을 짜긴 짜야지. 언제 낳을지도 생각해 봐야 할 거고.”

“……?”

순간 악불군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리고 소걸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표정은 뭐냐? 너 혹시 첫날밤에 뭐하는지 모르는 거 아니야?”

“왜 모르겠어? 진지하게 대화도 나누고 또…….”

“모르네. 쯧! 쯧! 네가 무공이 왜 그렇게 강한지 알겠다. 오로지 무공 수련만 했구먼.”

“안다니까.”

“그럼 애를 어떻게 만드는 건데?”

“그거야 손 잡고 자면…….”

“진짜 모르네, 허허허! 너 진짜 친구 하나 잘 뒀다고 생각해라. 안 그랬으면 첫날밤을 완전히 이상하게 보냈을 거다.”

악불군은 육관 수련 이후 대화를 나눈 사람이 담수련 주위 사람을 빼면 거의 없었다. 즉, 모두 여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음담패설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지식은 담수련을 통해 알았지만, 애초에 그녀 또한 그런 얘기를 할 리는 없었다.

“……으흠! 그럼 한번 얘기해 봐라.”

“여자는 남자하고는 신체 자체가 달라. 그러니까…….”

악불군이 처음으로 성교육을 받고 있던 그 시각.

* * *

“유모가 이걸 전해 주라고 했다고?”

“아가씨께서 이런 방면으로는 배운 것이 없다시피 하시니 꼭 한번 읽어 보시라고 하셨습니다.”

“책 같은데?”

담수련은 추국이 건네준 보따리를 펼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 안에 있는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녀경(素女經)’

제목을 본 사화들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즉시 담수련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황궁이나 고귀한 사대부 집안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귀하디귀한 책이었다.

“아가씨, 빨리 펼쳐 보세요.”

“너희는 저리 가.”

“이 책이 여인들에게 중요한 공부를 시켜 준다고 하던데, 저희도 함께 봐요.”

“이런 거는 어른만 보는 거야.”

“나이는 저희가 아가씨보다 많거든요!”

사화는 반드시 보겠다는 일념으로 안 하던 대꾸까지 하며 버텼다.

“너희 혼인했어? 혼인 안 하면 어른 아닌 거야. 내가 잘 간수하고 있다가 너희가 혼인하면 보여 줄게. 나가, 전부.”

담수련 역시 소녀경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책만은 담무룡에게 구해 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책이 남들과 같이 보기에는 낯 뜨거운 내용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사화를 모두 내보낸 담수련은 침을 꼴깍 삼키며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혼인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때.

구천마성의 군막에 한 인물이 은밀히 방문하고 있었다.

천중신마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십 년 만에 만나는 것 같구려. 앉으시지요.”

둘은 영웅대회에서 만난 것은 만난 것으로 치지 않았다.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

구천마황은 상당히 예의를 갖춰 그를 맞았다.

같은 마도 출신인 둘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혈해사황 같은 앙숙은 아니었다.

천중신마가 앉자 구천마황이 그의 잔에 직접 차를 따르며 물었다.

“그래, 은밀하게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구천마성에서 광동성만을 세력권으로 하겠다고 공표하셨더군요?”

“그거야 천중마도문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솔직히 전 분통이 터져 며칠 동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악불군, 이 어린놈이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희 마도는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고사할 수도 있습니다.”

천중신마의 말에 구천마황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천중신마.”

“예.”

“무림의 역사가 천 년이 넘지만 마도나 사파가 주도권을 쥔 적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무슨 의미로 물으시는지요?”

“정사대전 때의 얘기를 들으셨을 거요. 당시 정파는 대단히 약했고, 마도는 우내제일신마라는 고금오대마종 중 한 분이 나타나 최전성기였소. 그런데도 엄청난 희생자만 생겼을 뿐 결국 승자 없이 전쟁이 끝나고 말았소.”

“당시 황실에서 정파를 돕지 않았다면 마도 일통 천하를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 황실은 정파를 도울 것 같소, 아니면 우리를 도울 것 같소? 당연히 정파를 도울 게요. 더욱이 지금 정파는 악불군과 백천학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나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소?”

“그럼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그냥 참을 생각이십니까?”

“태양천의 압박을 못 이겨 삼십 년 가까이 지하로 숨어서 버틴 적도 있소. 지금은 확고한 우리 세력까지 가지고 있는데 굳이 치욕이라고 할 필요가 있겠소? 우선 소나기는 피하고 봅시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만남을 잊지는 마시오. 분명 기회가 있을 게요. 그땐 노부가 먼저 천중신마께 연락을 하겠소.”

가장 패도적이고 호전적이라는 구천마왕조차 꼬리를 마는 듯한 말을 하자 천중신마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역시 구천마황과 같은 분석이 나와서 손을 든 것이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실망한 천중신마가 일어서자 구천마황이 한마디 던졌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무재 있는 아이들을 찾아내 악불군 같은 고수로 키우는 것이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가 죽은 이후 마도는 진짜 몰락할 수도 있소.”

천중신마가 절치부심(切齒腐心)을 토로했다면 구천마황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은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며 경악하고 있었다.

* * *

“소걸아, 너는 담 군사님에 대해 몰라서 그런다. 그분은 그런 거 못 한다.”

“천하의 검신이 왜 땀을 그렇게 흘리냐?”

“네가 한 말들을 믿기 어려워서다.”

“믿기 어렵다고 땀을 흘리지는 않지. 첫날밤 담 군사와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온몸이 막 바들바들 떨리지?”

“이만 가라. 내일이 혼인식인데 더 이상 이상한 얘기 듣고 싶지 않다.”

“다 들어 놓고 뭘 더 듣고 싶지 않아? 분명 말하는데 첫날밤에 손만 잡고 자면 평생 욕먹는다.”

소걸아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어깨에 힘을 주며 밖으로 나갔다. 악불군보다 나은 것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 * *

담무룡은 자신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잠룡세가를 대단히 크게 지었다.

초청한 문파의 수가 무려 백여 곳에 달했고 각 파에서 최소 다섯 명 이상이 왔기 때문에 혼인식에 참석한 무림인은 거의 천여 명에 달했지만 모두 수용하고도 넉넉할 정도였다.

십왕은 물론 정파와 마도 그리고 사파까지 제법 이름 있는 고수들이 다 모인 데다 황실에서 유백온과 열 마차에 달하는 선물까지 보냈으니, 그렇지 않아도 혈해사계와 구천마성의 공표로 더욱 커진 악불군의 영향력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자 군웅들은 모두 일어났다.

아직 삼십이 채 안 된 악불군에게 대선배인 십왕들은 물론 각 파의 수장들까지 모두 일어나 축하를 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정파와 마도 그리고 사파까지 모두 모여 싸움 한 번 없이 평화롭게 성대한 연회를 무사히 마친 것 역시 무림 역사에 기록될 매우 드문 일이었다.

혼례식 자체는 반 시진 만에 끝났지만 이후 잔치는 무려 칠 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화려한 것을 기피하고 낭비를 싫어하는 악불군이 많은 돈을 들여가며 길게 잔치를 이어 간 것은 정사지간에 소통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경계를 접한 문파의 장들을 만나 서로 간의 양보를 끌어내어 분규의 씨앗을 없앴고, 사이가 나쁜 문파는 최대한 친분을 쌓도록 노력했다.

그런 악불군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아니면 악불군이 두려워 억지로 참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무림에는 평화가 찾아온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혼례식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후, 호사가들의 입에서는 일신(一神), 이성(二聖), 삼황(三皇), 사패(四覇)라는 칭호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일신으로 불리게 된 악불군의 얘기가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무림맹의 부역자 추적은 계속됐지만 누구도 잠룡세가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진실 여부를 떠나 악불군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언급하는 순간 악불군 얘기까지 나오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금기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군, 나 너무 행복해. 그리고 너무 사랑해.’

악불군의 품에서 깨어난 담수련은 몽롱한 시선으로 악불군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악불군이 눈을 뜨며 말하자 담수련은 놀란 듯 말했다.

“나 때문에 깬 거야? 미안해, 피곤할 텐데.”

악불군은 이미 두 시진 전에 깨어 있었다. 원래 잠이 없는 그가 아니던가…….

평소라면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며 상상 수련에 몰두했겠지만,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담수련이 깰까 봐 그대로 누워 있었던 것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아가씨야말로 혼례식 때문에 너무 힘드셨지요?”

“아니, 난 너무 좋았어. 아참! 이제 말투부터 고쳐야 하는데.”

“말투요?”

“예, 상공께서도 잘 주무셨어요?”

“하하…….”

악불군은 어색한 듯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말했다.

“솔직히 전 평소처럼 소군이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하늘 같은 부군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호칭을 하겠어요. 상공께서도 이제 아가씨란 호칭은 하지 마세요.”

악불군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전 아가씨가 좋은데?”

“부인이라고 하면 되잖아…… 요.”

“부인이요?”

악불군은 부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예. 그런데 상공, 이제 뭐할 생각이에요?”

이제 더 이상 오를 명성도 지위도 없었다. 무림에서의 그의 위치는 이제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전 그냥 부인만 옆에 있으면 됩니다.”

악불군의 입에서 부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담수련은 킥!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저도 상공만 옆에 있으면 돼요.”

“그래도 한 가지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요?”

“대설산에 갈 생각입니다.”

“대설산은 왜?”

“만년설삼을 찾아야지요. 먼 곳이긴 하지만 적설이 있으니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악불군이 대설산에 가겠다고 했다면 담수련은 반대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도 악불군과 오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터였다.

“저도 갈 거예요.”

“당연히 가야지요. 부인과는 한시도 떨어져 있지 못합니다.”

“그럼 대설산도 가고, 장보주가 가리키는 십만대산도 찾아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큰 보물이 있을 것 같거든요. 그거 찾으면 좋겠다.”

담수련은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부인이 가고 싶다는 곳은 어디든 데려갈 겁니다.”

행복한 미소를 지며 다시 악불군의 품으로 파고들던 담수련은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가기 전에 우리, 어제 한 거 한 번 더 해 볼래요?”

순간 악불군의 눈이 번쩍했다.

“그럴까요?”

악불군은 담수련을 꼭 껴안았다.

그가 무림을 위해 할 일은 거의 다 한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평생의 사랑을 위해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런 악불군과 담수련의 사랑을 호사가들은 하늘의 검이 이어 준 사랑, 천검지애(天劍之愛)라 이름 붙이고 길이길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천검지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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