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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 20화 (107/513)

5권 - 20화

제9장. 이분이 바로…….

복도에서부터 로비까지 강성태 일행의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로비에서 태완이파 덩치들이 몇 보이기는 했는데 먼 산을 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호텔 직원들은 질린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거칠 것 없이 호텔을 나와 입구에 섰을 때였다.

“나이트 사무실로 갈 거지?”

발렛에 맡긴 차를 기다리는 틈에 이병렬이 나직하게 질문을 건넸다. 강성태가 픽 웃자 이병렬이 비슷한 느낌으로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그 직후에 두 대의 승용차가 연달아 와서 호텔 입구에 섰다. 발렛 직원 둘이 각각 운전석의 문을 붙들고 긴장한 얼굴로 차에 타기를 기다렸다.

“한 차로 가자. 최치곤 네가 운전해.”

“예? 예, 형님.”

최치곤이 앞차의 운전석으로 움직이는 동안 이병렬은 운전석 뒷좌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석을 강성태에게 양보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최치곤이 운전석 뒤편 문을 열었고, 눈치 빠른 김진용이 조수석 뒷문을 열었다.

“뒤에 있는 차는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앞에 그냥 세워둬.”

“예.”

이병렬이 던진 말에 발렛 직원이 상체를 깊게 숙이며 답했다.

저녁 약속을 위해 들어오는 승용차들과 택시들이 제법 있었고, 그만큼 일반 손님들이 많았다. 시간 끌 것 없었다. 강성태가 차에 타는 것과 동시에 이병렬이 옆에 앉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최치곤과 김진용이 각자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았다.

“나이트로 가.”

“예, 형님.”

한 차로 가자고 할 때 잠시 멈칫했던 최치곤은 군말 없이 차를 움직였다.

퇴근 시간의 강남이었다. 빈틈없이 도로를 메운 온갖 차량이 걷는 것만큼이나 느리게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김진용.”

“예, 형님.”

“왜 파라 호텔에 안 가는지 알겠냐?”

“죄송합니다, 형님.”

침묵을 깬 이병렬의 질문에 김진용은 고개를 숙일 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치곤이 너는?”

“죄송합니다, 형님.”

둘의 대답을 들은 이병렬이 재미있다는 투로 픽 웃었다.

“조태완 형님이 한마디로 잣 된 거지. 너희도 들었지? 성태 형님! 조태완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씨발.”

당시의 상황을 되새기던 이병렬이 마지막에 거친 욕을 달았다.

“생각해 봐라. 필로폰이 30킬로그램이다. 광룡이 목숨 걸다시피 들여오는 양일 텐데 사흘 뒤 일정을 털어놨으니까 날짜를 옮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냐? 광룡한테?”

그렇게 되나?

조수석에 앉은 김진용의 고개가 갸웃했다.

“지용호도 그래. 성태가 간다고 했으니까 둘 중 하나잖아. 지키던 애들 빼거나 아니면 숫자를 늘리거나. 그걸 지용호에게 뭐라고 말하겠냐고? 빼면 지용호가 수상하게 생각할 테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거래까지 털어놔야 할 거고.”

이병렬의 설명을 듣던 김진용이 더는 못 참겠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태완이 형님이 성태 형님을 노리면 어떻게 됩니까, 형님?”

“영상은 떡 사 먹었냐? 건드리면 영상 뿌린다고 해놔서 함부로 달려들지도 못해. 거기에 성태가 경고했잖냐? 절대로 못 덮을 거라고. 켕기지 않겠어?”

“그럼 태완이 형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중으로 연락 올 거다. 성태한테 붙든가, 아니면 가진 걸 모두 동원해서 잡아넣든가. 나는 아무래도 앞쪽일 거 같다. 영상이 또 터지면 저쪽에서 먼저 태완이 형님을 버릴 확률이 높거든.”

김진용에게 답해준 이병렬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거냐, 아니면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냐?”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조태완의 목을 뚫었을 거지?”

이병렬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분에 조태완이 꼼짝없이 묶였다고 생각하면 맞을 거다. 누구라도 내 지시에 멈칫했거나 조태완이 파고들 틈을 주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테고. 그나저나 달수랑 봉진이게게 연락 안 해도 되냐?”

“아, 이런! 진용아. 애들 오라고 해.”

“예, 형님.”

김진용이 서달수에게 전화를 걸면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이트로 오라고 했습니다, 형님.”

길은 여전히 막혔다. 그 바람에 최치곤이 최선을 다했지만,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야 나이트에 도착했다.

지겹도록 피곤한 하루였다.

마음 같으면 이대로 빌라에 가서 최치곤과 둘이 늘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병렬과 김진용을 생각해서라도 저녁은 함께 먹는 게 좋았다.

나이트에 도착한 강성태 일행을 향해 우르르 달려온 덩치들이 서열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다른 일은?”

“낮에 광준이 형님이 보내신 옷하고 벨트, 구두가 온 것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형님.”

무슨 소리냐는 투로 이병렬이 미간을 좁혔다.

“성태 형님하고 했던 약속을 지키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형님.”

일 마치면 제대로 옷 한 벌 해주겠다고 하더니 아마 그 약속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분위기 타는 거 하나는 진짜 대단하구나 싶어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힐끔 시선을 주었던 이병렬이 다른 말 하지 않고 강성태와 함께 걸었다. 복도는 어둑했고, 기본 조명만 켠 홀은 서늘했다. 그곳을 통해 사무실에 들어가자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강성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병렬과 김진용은 물론이고, 최치곤마저 진이 반쯤 빠진 얼굴이었다.

“진용아. 오늘은 간단하게 김밥으로 하자. 애들한테 준비시키고, 광준이 형님이 가져다 놓았다는 옷 좀 찾아봐.”

“놔둬. 어차피 집에 가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텐데.”

“갈 때 가더라도 여기서 간단하게 치료하고 가. 등에 상처가 심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리고 피 묻은 옷은 우리가 아는 세탁소에 맡기는 게 나아.”

듣고 보니 그렇다.

강성태가 받아들이자 김진용이 바쁘게 움직였다. 물과 수건, 붕대와 대형 밴드까지 한 번에 준비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하게 김밥도 들어왔다.

“먹고 하자. 얼른들 앉아. 넷밖에 없으니까 눈치 볼 것도 없어.”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한 사람당 대략 석 줄씩 먹었나 싶었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5분쯤이었다. 그리고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강성태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지켜보던 이병렬의 평가였다.

강성태가 보기에도 의아할 정도로 꿰맨 자리가 아물어 있었고, 실제로 벌어진 부위도 넓지 않았다. 대형 밴드를 도배하듯 붙인 강성태는 다시 붕대를 감고 최치곤이 들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병렬이 재차 권했고, 이광준과 이런 일로 불편하기 싫었으며, 계속 들고 있던 최치곤을 봐서 그냥 걸쳤다.

“죽이네. 명품이라서 그런 거냐, 아니면 워낙 인물이 좋아서 그런 거냐? 기죽어서 어디 함께 다니겠냐?”

이병렬의 감탄이 과장만은 아닌 느낌이었다. 김진용과 최치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피곤하니까 커피는 내일 마시기로 하고 들어가. 애들 안 붙여도 되겠냐?”

“너는?”

“나야 나이트에 있을 테니까 괜찮지. 퇴근할 때는 애들하고 움직일 거고.”

“그럼 됐어. 나는 치곤이랑 움직일게. 괜히 애들 몰려 있다가 사고 터지면 그게 더 힘들어.”

안중에서부터 오늘 호텔까지, 강성태의 실력을 짐작하는 이병렬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차는 오늘 타던 거 가져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지.”

“그건 그렇게 하자.”

“고생했다.”

마음 한쪽을 들여다본 것 같은 짧고 강한 이병렬의 인사였다. 눈으로 답한 강성태는 김진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갈 때 빼고는 계속 병렬이 옆에 있어.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예, 형님.”

김진용에게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 뒤에 문까지 걸어온 이병렬과 김진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끼리 인사한다고 번잡하게 굴지 말자. 오늘은 다른 일 없을 것 같지만, 방심하지 마. 너나 진용이한테 일 생기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짐작하지?”

픽 웃은 이병렬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옆에 있던 김진용이 깊숙하게 상체를 구부렸다.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복도를 거쳐 홀의 한쪽을 가로질렀다.

아직 조명을 켜지 않은 홀은 들어올 때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덩치들이 순서대로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뭐야, 이 정도로 인물이 좋았어?

놈들의 표정에 담긴 놀라움을 피하는 것처럼 강성태는 앞에 세워둔 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최치곤이 차를 움직이자 줄줄이 서 있던 덩치들이 상체를 숙였는데 정말이지 저 인사만큼은 어떡해서든 못 하게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후, 살겠네. 씨발.”

나이트를 빠져나와 도로에 들어가기 무섭게 상체를 뒤튼 최치곤이 긴장을 푸는 것처럼 거친 말을 쏟아냈다.

“아후! 코냑 병 들고 왔다 갔다 한 게 전부인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곰보 이모네 가서 한잔할까? 일대일루다가?”

“그럴래?”

힐끔 뒤를 돌아본 최치곤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에이, 씨! 됐다. 상처 나으면 하자. 대신 들어가는 길에 샌드위치나 좀 사 가자.”

“그게 생각나?”

“서운하게 왜 이래? 샌드위치는 내 영혼을 달래주는 소울 푸드야.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힘들고 지칠 때, 누가 내 속을 채워주지? 그건 바로 샌드위치! 몰라?”

“알았다, 알았어. 사자.”

“진즉 그러지.”

둘이 헛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독소처럼 몸에 쌓였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까 조태완이 100억 준다고 할 때. 나 있잖아. 그거로 샌드위치를 사면 몇 개지? 그런 생각 했었다?”

“미친 새끼!”

결국, 최치곤의 넉살에 둘이서 킬킬대며 웃고 말았다. 빌라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커피알리고를 지난 최치곤은 차를 왼편으로 돌려 샌드위치를 파는 제과점 앞에 세웠다.

저녁 시간이라 수량이 부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선 제과점에는 제법 많은 양의 샌드위치가 냉장 진열장 안에 있었다.

양복이어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들른 손님들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최치곤의 더러운 인상을 마주하고는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치곤아. 잠깐 병원에 들렀다 갈까?”

“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최치곤이 곧바로 눈을 갸름하게 뜨고는 음흉한 표정을 만들었다.

“서방님이 너무 그러시니까 소녀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가까이 있던 손님 한 명이 치를 떠는 몸짓으로 최치곤에게서 멀어졌는데 그건 강성태만 봤다.

“야식 가져다주는 핑계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라니. 입술이 자꾸 생각나?”

“그만하지?”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요. 사자, 샌드위치. 가자, 병원.”

너스레를 떤 최치곤이 팔을 쫙 펼쳐 냉장 진열대를 가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여기 들어 있는 거 전부 가져갈 거니까 와서 좀 담아줘.”

“네?”

“이걸 전부 진열대까지 가져가기 그러니까 봉투 가져와서 담아달라고. 계산만 가서 하면 되잖아?”

“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어허! 이런 건 나한테 맡겨. 함께 일하는 직원들한테 쫙 뿌려야 잠깐이라도 시간 빼지. 저기, 아가씨! 거기 주스 있지? 그것도 다 담아줘!”

요란하기 그지없는 최치곤의 주문 덕분에 대략 30분을 소비하고서야 제과점을 나섰다. 그 와중에 최치곤은 제 몫으로 샌드위치 세 개와 주스 두 개를 빼놓는 영악함도 잊지 않았다.

“흐뭇하구만.”

최치곤은 조수석을 가득 채운 봉지들을 두드리며 감탄을 내놓았다. 조수석만이 아니었다. 강성태의 옆자리까지 커다란 봉지가 여러 개 놓여서 영락없이 샌드위치와 주스를 배달하는 차량처럼 보였다.

“진료 끝난 시간이잖아. 잠깐 보자고 해서 외래 진료실로 쪽으로 가. 거기 복도에 사람이 없어.”

어둠이 내려 오가는 차량과 도로 주변의 가로등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마. 화난 사람처럼 눈만 들여다보는 거야. 눈썹을 좀 세우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알지? 그런 뒤에 벽에 밀어붙이고서는 뜨거운 키스를 기냥 퍼부어 주는 거지. 크흐!”

“후-.”

실없는 소리에 지친 강성태가 한숨을 내쉬는데도 엉뚱한 상상을 하는 모양으로 최치곤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막히지 않았다.

응급실 앞에 차를 세운 최치곤과 강성태는 양손에 봉지를 나눠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대기실과 접수창구가 있고, 정면에 응급실 출입을 통제하는 직원이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응급실 앞쪽의 직원이 자리에 없었다.

어쩌지?

강성태와 최치곤이 돌아볼 때였다.

문이 열리며 보호자인 듯한 중년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자.”

최치곤은 막힘이 없었다. 굳이 사양할 일이 아니어서 강성태는 최치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안다미가 어떻게 나올까?

“씨발 것들이! 죽고 싶어?”

그러나 응급실 안쪽의 상황은 강성태와 최치곤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달랐다.

간호사들이 차트를 정리하는 창구 앞에 몰려 있는 다섯 놈 중 한 명이 거친 말을 쏟아내며 위협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홀로 서 있는 의사는 안다미였다.

“치료한다잖아요!”

“내가 우리 형님 먼저 하랬지? 사람 말이 우스워? 사람 말이 우습냐고?”

“급한 환자를 먼저 본다니까요! 그리고 욕하지 말라고 했죠?”

“아니 그런데? 이 씨발…….”

덩치가 다시 손을 들며 욕을 뱉는 순간이었다.

강성태는 덩치들을 헤치고 안다미의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덩치들이 볼 수 없도록 안다미를 가렸다.

‘어떻게……?’

“저녁 시간이라 혹시 몰라서 샌드위치를 좀 사 왔어요.”

환자들, 간호사들, 의사들, 보호자들의 시선이 단박에 강성태와 안다미에게 쏠렸다.

강성태가 간호사들이 있는 스테이션에 샌드위치 봉지를 올려놓을 때였다.

“넌 또 뭐야? 이 씨발놈아?”

거친 욕이 등 뒤에서 터졌고, 안다미의 눈이 뾰족하게 올라섰다.

‘하지 마세요.’

안다미를 향해 눈짓을 한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 놈은 강성태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심지어 놀란 눈으로 급하게 고개까지 숙였다.

“왜? 뭔데?”

“야, 이 새끼야! 이분이 바로…….”

고개를 숙였던 놈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쏟아낼 때였다.

‘하지 마.’

강성태는 검지를 입 앞에 세웠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입 다물어.’

강성태의 눈을 본 덩치가 입을 다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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