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 21화
최치곤은 눈치가 있었다.
얌전히 지켜보다가 강성태가 검지를 들어 입을 가리는 순간에 앞으로 나섰다.
그 뒤에 최치곤은 들고 있던 샌드위치와 주스 봉지를 간호사 스테이션에 올리며 자연스럽게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을 흐트러트렸다.
“고생하시는데 이거 간식으로 드시면서 하세요.”
봉지를 내려놓은 최치곤이 다섯 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이, 아저씨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고생하는 의사분과 간호사분들에게 막말해서야 되나?”
최치곤을 알아본 간호사들이 ‘저 인간이 어쩐 일로 점잖아?’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당한 만큼 최치곤이 거칠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간호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최치곤은 강성태에게 인사했던 덩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나 알지?”
“예, 형님.”
“응급실에서 설치면 안 되겠지?”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형님.”
변명을 늘어놓는 덩치를 향해 최치곤이 히죽 웃었다.
“말 길게 늘어놓기는. 의사 선생님이 누군지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우리 나가서 그 점에 관해 이야기 좀 할까?”
“예? 형님?”
“아니다. 사과가 먼저다. 얼른 사과드리고 나가자.”
최치곤이 안다미가 있는 뒤를 향해 고갯짓을 한 직후였다.
“사과 필요 없어요.”
차가운 한마디를 던진 안다미가 스테이션 너머에 있던 차트를 집어 들었다. 덩치들이 소란을 피운 사이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와 더는 응급실에서 소란 피우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의도가 동시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강성태는 짧은 눈짓으로 응급실 바깥을 가리켰다.
이제는 상황을 짐작한 다섯이 어수선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풀이 죽은 모습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강성태를 힐끔 본 최치곤이 한숨을 푹 쉰 뒤에 다섯의 뒤를 따라 함께 움직였다.
“어떡해. 멋있어.”
눈짓 하나로 덩치들을 내보내는 강성태를 보며 간호사들이 터트린 탄성이었다. 그러나 이 탄성이 안다미를 더욱 힘들게 할 것 같아서 강성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은 의도로 왔다.
지나는 길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강성태가 몸을 돌렸을 때, 안다미는 다분히 의도적인 모습으로 차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명품 양복을 입고, 샌드위치를 사와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깡패로 보일 수 있었다. 실망할 수 있겠다. 간호사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여서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르고.
“치료해 준 것이 고마워서 인사하러 잠깐 들렀습니다. 번거롭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옆모습만 보이는 안다미를 향해 짧은 인사를 전한 강성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안다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왔다가 머쓱하게 돌아서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냥 가는 거야?
나가는 강성태가 아쉬운 시선과 안다미의 반응이 궁금한 시선들이 응급실 여기저기에서 바삐 움직였다.
“잘 먹을게요.”
간호사 한 명이 용기 있게 말을 건넸다가 고개 돌린 강성태의 옅은 미소를 보고는 볼을 붉게 물들였다.
정말 근사하다, 저 남자.
안다미와는 어떤 사이인 거지?
간호사들의 시선은 대개 비슷했다.
간호사 앞의 스테이션을 지난 강성태가 응급실 문으로 향할 때였다.
“강성태 씨.”
안다미의 음성이 강성태를 붙들었다. 걸음을 멈춘 강성태는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몸을 돌린 안다미를 보았다.
“응급실은 원칙적으로 이런 간식을 못 받게 돼 있어요.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받아서 나누는 것으로 할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간식도요.”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짧게 느껴질 대화였다. 그러나 강성태와 안다미에게는 서로의 감정을 알아채기에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얼굴 본 거로 충분합니다.
당황했을 텐데 이렇게 말해줘서 고맙고요.
안다미만 알아볼 정도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그대로 응급실을 나섰다.
최치곤은 응급실 오른쪽 계단에 있었다.
“아, 짜증나네, 씨발. 혀를 확 뽑아버릴까?”
최치곤의 거친 인상 앞에서 다섯 놈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옆으로 길게 서 있었다.
“치곤아. 가자.”
강성태가 부르자 최치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얌전히 가는데 하여간 너 이 개새끼, 두고 보자.”
으르렁거린 최치곤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운전석에 앉았다.
“뒤로 타.”
“둘만 있는데 굳이 그럴 거 있냐? 누가 보기 전에 얼른 가자.”
강성태의 눈치를 살핀 최치곤이 차를 움직여 도로에 합류했다. 최치곤의 몫으로 조수석에 남겨두었던 샌드위치와 주스가 강성태의 다리 위에서 부스럭거렸다.
“과천 경마장에서 사설 경마하는 애더라고. 인사한 놈만 생활하고 다른 놈들은 꽁지 들고 따르는 반달새끼들이어서 족보도 없더라.”
너스레를 떤 최치곤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 새끼들 때문에 산통 깨졌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가벼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샌드위치 봉지나 뒤로 넘겨놔라. 그렇게 안고 있으니까 어째 내 마음이 아프다.”
“그게 더 귀찮아.”
최치곤은 코로 숨을 길게 뱉은 뒤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길이 막히지 않았고, 거리가 얼마 멀지 않아서 10분쯤 뒤에 승용차는 빌라의 주차장에 들어섰다.
감정이 어떻든 간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내가 먼저 내릴 테니까 잠깐 기다려.”
주변을 돌아본 강성태가 조수석에서 나와 입구까지를 확실하게 살폈고, 그 뒤에 승용차의 지붕을 툭 때렸다.
빌라에 들어설 때까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
“어후, 죽겠다.”
들어서기 무섭게 거실에 무너져내린 최치곤이 길게 누워서 만세를 부르는 듯한 모습으로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샌드위치 안 먹어?”
“잠깐 쉬고.”
“옷 갈아입고 나올게.”
“혼자 되겠냐?”
“걱정도 많다.”
모처럼 태평한 대화를 주고받은 강성태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크릉. 크허어억.
옷을 갈아입느라 고작 1분쯤 지났는데 거실에서 최치곤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유치장에서 나와 지금껏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피곤하기도 하겠다.
픽 웃은 강성태는 침대에 앉아 몸을 비틀며 천천히 누웠다.
씻기 전에 잠시만 쉴 생각이었는데 급류처럼 몰아친 잠이 강성태를 휘감았다.
**
조태완이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스위트룸에 들어간 고영주가 30분쯤 앉아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났을 때, 문이 열리더니 김동팔이 세 명의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들어오는 이들의 눈매와 포스가 워낙 대단해서 고영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소원하던 김종수 대표다. 인사해.”
김동팔이 세 명 중 가운데 있는 남자를 고개로 가리켰다.
고영주는 한 번도 김종수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연예계에 발 담근 사람치고 김종수를 모른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김동팔과 함께 들어온 남자는 방송이나 기사에서 본 김종수가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고영주예요.”
양손을 앞에 모은 고영주는 최선을 다한 표정과 음성으로 인사했다.
이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드라마 주연은 일도 아니었다.
드라마가 결정되면 신문과 연예 관련 프로그램에 뺑뺑이 돌릴 테고, CF와 영화 섭외까지 막대한 수입과 인기도 얻는다.
가슴 설레는 고영주와 달리 김종수는 사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눈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연기자는 에고를 버리고 배역에 완벽하게 몰입할 줄 알아야 성공해. 그 정도는 알지?”
툭 던진 한마디도 예사롭지 않았다.
“옷 벗어봐.”
“예?”
“옷 벗어보라고. 왜? 카메라가 없어서 못 하겠어?”
김종수의 요구에 고영주는 먼저 김동팔을 보았다.
“촬영장에는 카메라, 조명, 녹음, 그 외에 스태프만 서른 명이 넘어. 수영복이랑 속옷이 뭐가 달라? 그 정도도 못하는 수준으로 나를 불렀어?”
김동팔을 스태프로 생각해야 한다는 김종수의 주장이었다.
상대가 어중이떠중이라면 헛소리 말라고 욕을 퍼부었을 테지만, 상대가 김종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굳은 결심을 한 고영주는 팔을 돌려 지퍼를 내리고는 입고 있던 원피스를 아래로 내렸다.
“팔 내려.”
가슴과 아래를 가렸던 고영주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놀랍기도 했다. 김동팔의 더러운 시선과 달리 그녀의 몸을 살피는 김종수의 눈에는 터럭만큼의 탐욕이나 사심이 보이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네.”
김종수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위에 거 풀어봐.”
이건 시험이야.
김종수의 눈을 본 고영주는 입술에 힘을 주며 확신했다.
난 할 거야. 해낼 거야.
고영주는 등 뒤로 손을 돌려 위를 가리던 브래지어의 훅을 풀었다.
“됐어. 옷 입고 계약하자.”
고영주의 판단이 옳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른 채 고영주는 브래지어의 훅을 채운 뒤에 원피스를 걸쳤다.
“내가 하는 계약이 일방적인 건 알지?”
“듣기는 했어요.”
“계약금은 3억 원으로 하자. 내가 결정한 역할을 거부할 권리가 없어. 행사 정해지면 아프든, 생리든, 무조건 뛰어야 하고. 계약 위반 시에는 계약금에 매니저, 코디, 메이크업, 차량 지원비까지를 포함한 금액의 3배를 위약금으로 토해내야 해.”
“예.”
“민사가 그렇다는 거야. 개인적으로 내 화가 풀릴 때까지 힘들 테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연만 약속해 주세요.”
“계약서에 명기해 주지.”
“할게요.”
입술 끝으로 웃은 김종수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김종수 프로덕션 변호사입니다. 계약서 확인하고 사인하세요. 특약사항으로 주연을 보장한다고 적겠습니다. 사인하고 나면 한 시간 뒤에 계약금이 입금될 텐데 그때부터 계약이 완성됩니다. 배분은 5:5로 하겠습니다.”
변호사가 내민 서류를 보며 고영주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하마터면 깡패 와이프가 될 뻔했던 고영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펀드 매니저, 젊은 CEO들이 고영주를 만나기 위해 달려드는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깡패, 안녕.’
고영주는 계약서와 펜을 받아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
정말 깊게 잤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강성태는 처음으로 아저씨를 보았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돌아보는 강성태를 향해 아저씨는 피식 웃었다.
“의무복무기간 최소 기록에 빛나는 구르카 용병들의 영웅이라면 다부진 맛도 있어야지.”
“그렇게 행동하는 줄 알았습니다.”
“저놈들 보기에는 그렇겠지.”
아저씨는 턱으로 앞에 늘어져 쉬고 있는 용병들을 가리켰다.
“오늘 살았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왔으면 살았다는 기쁨을 즐기는 법도 익혀. 걱정은 닥쳤을 때 하고.”
강성태는 아프가니스탄의 잿빛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늘 매달려 있는 악몽을 설명한다고 이해할 것 같지 않아서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저씨가 사랑하는 여자?
최치곤이 순해 보일 정도로 무섭게 생긴 이 양반이?
강성태는 실없는 웃음을 흘려냈다.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지금 같은 순간에 가장 생각난다. 말 한마디 못 나눠도 좋으니까 바로 앞에서 한 번만 봤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짝사랑이었습니까?”
“아니. 집안에서 반대하기는 했는데 그 사람도 나 사랑했었어. 결혼할 생각이었고.”
뭐야?
강성태의 시선을 본 아저씨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는 투로 씁쓸하게 웃었다.
“훈련 뛰고 오니까 죽어서 화장까지 마친 뒤더라. 교통사고로. 납골당에서 사흘인가 있었다.”
너무 덤덤하고 태연하게 말해서 오히려 더 아프게 들렸다.
“제대 신청하고 한국 떴다. 안 그러면 교통사고 낸 인간 죽여버릴 것 같았거든. 개새끼. 소주를 다섯 병이나 처마시고 운전했다더라.”
말을 던진 아저씨가 먹먹한 눈빛으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하늘색 진짜 지랄 같다.”
강성태는 시선을 들어 같은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옥 구덩이에 스치는 신의 가호처럼 잿빛 하늘의 좁디좁은 틈 사이로 붉은 노을이 슬프게 떨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해달라는 거 다 해줘. 이런 사정, 저런 이유 붙이지 말고 그냥 해줘. 그 사람한테는 한 가지만 바라면 된다. 살아있는 거.”
“여자 안 좋아합니다.”
“좀 생겼다고 거만 떠는 거냐?”
둘이서 비슷한 표정으로 마주 보며 피식 웃을 때였다.
꿈 전체가 일그러지며 강성태는 얼핏 잠에서 깼다.
누군가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에 강성태는 설핏 눈을 떴다. 그리고는 멍한 상태에서 눈을 끔벅였다.
안다미가 왜?
침대 앞에 서서 강성태를 보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안다미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