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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 3화 (111/513)

6권 - 3화

제2장. 약속해 줄 수 있어요?

6시 30분이 넘었을 때, 거칠게 코를 골던 최치곤이 제풀에 놀란 것처럼 눈을 떴다.

“어? 언제 일어났냐?”

고개만 들어 질문했던 최치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물 줘?”

“화장실 먼저.”

그래도 푹 잔 덕분인지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냉장고에서 새로운 물병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은 강성태는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올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최치곤은 하품을 크게 하며 싱크대 앞으로 다가왔다.

“몸은 좀 어때?”

“신기할 정도로 좋아졌다.”

“거봐. 몸이 아플 때는 억지로라도 먹어줘야 한다니까. 몸살이 올 거 같잖아? 물 말아서라도 악착같이 밥 먹고 나면 하루 이틀 안에 거뜬해져. 알지?”

헛소리를 늘어놓은 최치곤이 커피포트를 확인하고는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내가 탈 테니까 앉아 있어. 너는 두 개 반이지?”

본인의 몫으로 믹스 커피를 꺼낸 최치곤은 준비해 놓은 거름망 위로 원두커피를 담았다.

“밥 먹고 뭐 할 거냐?”

“카페에 나가보려고.”

믹스 커피의 끝을 따냈던 최치곤이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호수가 잔잔해야 물결이 멀리 나가지.”

“아,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라.”

물을 따르며 최치곤이 털어놓은 불평이었다.

달달한 믹스 커피와 묵직한 원두 커피 냄새가 모처럼 얻은 여유의 등에 매달려 식탁 주변을 맴돌았다.

“자! 마셔.”

“고맙다.”

둘이서 각자 좋아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늘 마시는 커피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 한 모금과 향은 강성태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지용호는 절대 조태완의 칼에 그냥 죽을 놈이 아니었거든.”

잔을 내려놓은 강성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독기가 굉장한 데다 살겠다는 본능이 강한 놈이어서 어제 일을 알고 나면 알아서 움직일 거다.”

“만약 죽었으면?”

“첫 번째 책임은 조태완이 져야 하니까 태안 일을 핑계로 죽였다고 변명하겠지. 그 말을 들은 광룡은 너랑 나, 병렬이를 노릴 거고.”

“에이! 커피가 갑자기 더럽게 쓰네.”

최치곤의 대꾸에 강성태는 픽 웃었다.

“만약 살아서 도망간 거면 어떻게 되냐?”

“거래가 이틀 뒤다. 그 안에 조태완이 날 찾을 거다.”

잔을 거꾸로 들어 커피를 모두 마신 최치곤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내가 조태완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어떻게 할 거 같다. 막말로 영상 터지는 게 광룡이랑 붙는 거보다 낫잖아. 클럽 일처럼 적당히 누르면 끝날 텐데.”

일부러 비장한 표정을 만든 최치곤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시간이 노리기에도 좋지 않겠냐? 복도에 칼잽이들을 잔뜩 깔아놓고 벨을 누르는 거지.”

괴기스러운 음성으로 최치곤이 말을 뱉어내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누군가 벨을 눌러서 단순한 리듬이 거실을 메웠다.

뭐지?

놀라 돌아보는 최치곤의 앞에서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저예요!”

예상대로 안다미였다.

문을 열자 한 손에 가방, 다른 손에 봉지를 여러 개 든 안다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강성태를 본 안다미의 눈가에 반가운 미소가 달려 있었다.

“이리 주세요.”

“무거운 거 들면 안 돼요.”

강성태가 손을 내밀었는데 팔을 돌린 안다미는 그대로 거실로 들어서서 식탁에 봉지를 올려놓았다.

“치곤 씨. 샌드위치 사 왔어요.”

“예?”

“새벽 출근하는 스태프에게 부탁해서 사 온 거예요. 샌드위치로 유명한 가게요.”

“아니 뭐 이런 걸 다?”

부담스럽다는 말과 달리 최치곤은 봉지를 열고 있었다.

“주스도 있네?”

“생과일인데 괜찮아요?”

“이런 건 무조건 감사, 압도적 감사지!”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안다미는 밉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런 뒤에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아요.”

직접 치료했던 당사자라 그런지 강성태의 말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안다미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강성태를 들여다보았다.

“앉으세요. 아침은요?”

“함께 먹으려고요. 성태 씨는요?”

“커피만 마시고 있었어요.”

강성태의 움직임을 살핀 안다미가 식탁에 앉았다.

“커피 드려요?”

“주스 마실게요.”

이미 최치곤이 샌드위치와 주스를 식탁에 깔아놓았다. 중간에 강성태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김밥도 있어서 기대하지 못했던 푸짐한 아침을 마주한 모양새였다.

“성태야. 나는 샌드위치만 먹고 집에 좀 가 있을게.”

“집이 어디예요?”

포장 케이스에서 샌드위치를 꺼내던 최치곤이 왜 그러냐는 투로 고개를 들었다.

“상처만 보고 가봐야 하거든요.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요.”

“차 가져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압시다.”

안다미와 최치곤은 샌드위치를 들었고, 강성태는 김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한 입을 크게 베어 문 최치곤은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요? 맛이 없어요?”

“아니 그냥 뭐. 너무 건강한 맛이구나 싶어서.”

딱딱한 호밀빵 안에 신선한 채소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를 최치곤이 최대한 유연하게 평가했다.

“치곤 씨, 고지혈증 있는 거 알죠? 치료가 필요한 수준이에요.”

“그거 우리 집 유전이라 초등학생 때부터 고지혈증이란 말을 들었거든요. 약을 두 달인가 먹고 정상 수치가 나왔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몸 전체에 기운이 쭉 빠져서 기력이 하나도 없더라고.”

샌드위치가 입에 들어서 대꾸하지 못하는 안다미를 향해 최치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안 선생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지요? 대신 존댓말은 좀 이해해줍시다. 입에 안 붙어서 쉽게 안 나와서 그래. 천천히 노력할게요.”

책을 읽는 듯한 최치곤의 말투에 눈으로 웃었다. 곤란한 얼굴로 내놓는 최치곤의 모습이 밉지 않은 눈치였다.

“병원에 와서 고지혈증 치료받아요. 약 먹고 혈액 검사에서 정상 수치 나오면 반말도 이해할게요.”

“아이, 놔둬! 내가 존댓말 쓰고 말지, 진짜.”

“말 놓지 말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에요?”

“힘들지요. 지금 보세요. 이렇게 존댓말을 하니까 얼마나 어색하고 멀게 느껴져요?”

최치곤의 넉살이 통했는지 웃음을 터트린 안다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유쾌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은 뒤에 식탁을 치우고 강성태의 상처를 살폈다.

웃옷을 벗고, 붕대를 벗길 때 안다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지켜보던 최치곤마저 놀란 얼굴로 강성태를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나은 수준 아니오?”

“그러게요. 이럴 수가 있나?”

최치곤의 놀랐다는 반응에 안다미가 동조했다.

“다른 치료 받은 거 있어요? 민간요법이나?”

“아뇨. 어느 정도인데 그래요?”

“새살이 올라왔어요. 실밥이 밀려날 정도니까 최소 일주일 이상 지나야 나오는 반응이거든요.”

놀람과 별개로 안다미는 가방에서 꺼낸 소독약과 솜, 핀셋을 이용해 상처를 소독했다.

“나는 그럼 먼저 갈게.”

“같이 나가자니까요.”

“아니 그게 둘이 시간도 좀 보내야 하고, 벽에도 좀…….”

“벽이요? 무슨 벽이요?”

“크흠.”

어쩌면 좋겠냐는 투로 시선을 드는 최치곤을 향해 강성태는 웃는 얼굴로 답을 대신했다.

“벽이 무슨 의미예요, 성태 씨?”

“둘이 찍은 사진을 붙여놓아야 하지 않겠냐,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뭔가 수상한데?

강성태와 최치곤을 번갈아 돌아본 안다미가 치료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최치곤이 고맙다는 의미의 시선을 던졌다.

**

조태완은 습관대로 동이 터올 때 잠이 들었다.

어지간해서는 깨우는 일이 없고, 안에서 잠근 침실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찌르릉. 찌르릉.

그래도 비상용으로 벨을 하나 달아두었는데 그 소리가 늦게 잠든 조태완의 신경을 긁었다.

가뜩이나 악몽에 시달리던 조태완이었다.

칼을 들고 달려든 지용호가 조태완의 얼굴을 벽에 밀어붙인 직후였다. 조태완은 회칼이 들린 지용호의 오른팔을 붙들고 비틀었다.

찌르릉. 찌르릉.

팔을 비트는데 왜 이런 소리가 들릴까.

“죽어!”

지용호가 배를 향해 회칼을 깊게 찌르는 순간에 조태완은 벌떡 침대에서 상체를 세웠다.

놀란 눈으로 침대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찌르릉. 찌르릉.

비상벨이 또다시 울리며 조태완을 찾았다.

천하의 조태완이 지용호 같은 놈의 칼에 맞는 꿈을 꾸다니.

거칠게 침대에서 내려온 조태완은 문으로 움직였다.

“뭐야?”

“김동팔입니다, 형님. 지용호가 튀었습니다, 형님.”

빠르게 안쪽 고리를 푼 조태완이 문을 열기 무섭게 김동팔이 깊게 상체를 숙였다.

“김동팔 너, 이 새끼!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지용호가 튀어? 서른 명이나 있다더니 그 새끼들은 뭐 한 거야?”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은 집어치우고,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강성태가 갈지 모르니까 두 명만 붙이고 나머지는 로비에서 대기하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형님. 엘리베이터에서 애들 둘에게 칼을 먹이고 뒷문으로 튀는 바람에 어어, 하다가 놓쳤답니다, 형님.”

“후-!”

눈알까지 화가 치솟은 조태완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후문 쪽에서 기다리던 승용차를 타고 갔답니다, 형님.”

“칼 먹은 애들은?”

“한 놈은 옆구리, 다른 놈은 엉덩이를 찔렸는데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 이런 병신 새끼들.”

“죄송합니다, 형님.”

다시 자기는 틀린 일이어서 조태완은 잠옷 차림으로 소파를 향해 움직였다.

늦게 일어나는 조태완을 위해 암막처럼 두꺼운 커튼이 빛을 가렸고, 대신 조명이 화려하게 들어와 있었다.

“전화는 해봤어?”

“안 받습니다, 형님.”

“하긴. 칼까지 먹이고 튄 놈이 전화를 받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소파에 앉은 조태완은 턱 아래의 상처가 느닷없이 욱신거려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지?

지용호가 느닷없이 애들 칼 먹이고 튀었다고 광룡에 항의해 봐야, 이틀 뒤에 강성태가 태안의 마약 반입 현장에 나타나 깽판 치면 바로 들통날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태안 마약 건을 털어놨다고 말할 수도 없고.

“씨발! 뭐가 이렇게 더럽게 꼬여! 어떻게 하라고!”

버럭 고함을 지른 조태완이 씩씩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부러 치워놓은 모양인지 집어 던질 만한 물건이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 테이블이나 소파는 혼자 들기도 버거워서 던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강성태! 이 개새끼가 사람을 끝내 독하게 만드네! 이 씨발 새끼가! 사람을 아주 병신을 만들어!”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는 조태완의 앞에서 김동팔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임이 없었다.

**

치료를 마친 안다미는 꼭 가봐야 할 일이 있다며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 나는 좀 더 있다 갈게.”

어색하게 인사한 최치곤을 두고 안다미가 문으로 움직였다.

“그냥 있어요.”

“주차장까지만요. 몸이 나아진 것도 확인했잖아요.”

함께 나서는 강성태를 안다미는 어젯밤처럼 말리지 않았다.

“치곤아. 다미 씨 출발하는 것만 보고 올게.”

“그래.”

강성태는 안다미와 함께 문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가능하면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우리 아빠 보셨죠?”

강성태가 건넨 권유에 안다미는 엉뚱한 질문을 내놓았다.

“병원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성태 씨와 만나게 되면 바로 아시게 될 거예요. 아침에 아빠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성태 씨 사귄다고 말씀드리려고요.”

빌라의 현관을 나선 안다미가 하얀색 벤츠 앞에서 몸을 돌렸다.

“카페 매니저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싸움은 치곤 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거니까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할 거고요.”

너무 이른 거 아닐까?

굳이 지금 말해서 힘들 필요도 없을 테고.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안다미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그렸다.

“당당하게 시작하려고 그래요. 누군가 물어보면 성태 씨를 만난다고 말할 거니까요. 아빠하고는 비밀 없이 지냈어요. 그래서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은 안 무서워요. 대신 성태 씨가 내가 알고 있는 깡패가 될까 봐 그건 무서워요. 부모님 일 해결하고도 그 세계에 계속 있을까 봐서요. 그러지는 않을 거죠?”

“예.”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약속합니다.”

“앞으로 나만 사랑할 수 있죠? 지금처럼 평생 바라볼 자신도 있고요?”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상태에서 강성태는 고개를 분명하게 끄덕여 답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안다미를 안았다.

확신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슴에 고개를 묻은 안다미가 애처로운 몸짓으로 강성태의 품을 파고들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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