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4화
모처럼 여유롭게 준비한 강성태는 10시 30분쯤 집을 나서 최치곤과 함께 카페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카페 안에서는 이은주가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냐?”
“조태완은 절대 기습 못 해. 그건 지용호도 마찬가지고. 조심할 필요는 있는데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약점을 보이는 꼴이 된다. 너도 오늘은 편안하게 있어.”
주차장에서 카페를 들여다본 최치곤이 입술을 내밀었다.
“불안하면 2층 사무실에서 있든가.”
“소파가 너무 작잖아. 알았다. 씻고 옷도 갈아입을 겸해서 집에 다녀올게. 점심 같이 먹을까?”
“편하게 하라니까.”
“그래.”
최치곤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가볍게 웃어준 뒤에 조수석에서 내렸다.
“가!”
승용차의 지붕을 두드린 다음이었다.
커피알리고를 향해 강성태가 걸음을 옮겼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최치곤이 승용차를 돌렸다.
딸랑.
반가운 벨소리였다.
안쪽 테이블과 의자를 닦던 이은주가 상체를 돌렸다가 놀라고 반가운 얼굴로 몸을 세웠다.
“매니저님! 나오셔도 돼요?”
“그럼요. 혼자 고생 많았죠?”
“성안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클럽에서의 사건을 짐작하는 이은주였다. 몸을 숨기는 강성태의 소식을 들었고, 기자들과 형사들을 상대한 만큼 마음고생도 컸을 게 분명했다.
물론 부상이 심하다는 상태도 알고 있을 테고.
그래서인지 강성태를 본 이은주는 울컥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안다미의 친구답게 이은주는 울컥한 감정을 꿋꿋한 미소 뒤로 삭였다.
“커피 한잔 드려요?”
“예열이 벌써 됐어요?”
“올 때 넣었거든요. 매니저님이 맛을 평가해 주시면 훨씬 마음 편할 거예요.”
옷을 갈아입을까 했던 강성태는 테이블에 기대 이은주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흐뭇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분쇄한 커피를 스쿠프에 담고, 압축한 다음, 에스프레소 추출구에 거는 이은주의 능숙한 모습을 보며 강성태는 어쩐지 불쑥 큰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김민정도 저랬다.
처음 지구대에 배치돼 경찰업무에 적응하고자 애쓰더니 어느새 당당한 경찰이 되었다.
커피 향을 맡으면서 강성태는 이렇게 믿고 맡길 이은주가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김선영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니지!
김선영을 떠올린 강성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생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한 화장과 화려한 복장의 김선영이 나타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에스프레소를 부은 이은주가 뜨거운 물을 부어넣은 잔을 강성태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요. 드셔 보세요.”
진한 향은 물론이고, 위에서 내려다본 머그잔 속의 크레마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머그잔을 든 강성태는 먼저 향을 맡았고, 이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굴렸다.
이은주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커피 맞아요. 이젠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은주의 커피를 칭찬한 강성태는 그렇게 주문대 앞에 서서 커피를 즐겼다.
볕이 들어오는 창은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정리된 테이블과 의자 역시 깔끔해서 강성태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매니저님. 여기 계실 거죠?”
“예.”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간단하게 답했다.
“2층 사무실에 다녀올게요.”
몸을 낮춘 이은주가 주방 아래쪽에서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꺼냈다. 전에는 못 봤던 청소용품들과 마른걸레가 담겨 있었다. 강성태가 없는 사이에 2층도 청소했던 모양이었다.
“놔두세요. 이따가 내가 올라가서 할게요.”
“이거 안 하면 찜찜해요.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만 닦고 오면 돼요.”
“은주 씨가 2층 청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강성태의 만류에 이은주는 보기 좋은 미소를 먼저 보여주었다.
“은혜 갚는 거예요.”
그리고는 더 뭐라 하지 못할 답을 하고는 주방을 나섰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강성태는 차마 더 말리지 못했다.
입구를 나서 2층을 향해 걷는 이은주를 보며 강성태는 사무실을 관리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두 모금쯤 마시고 났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바지 주머니 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카페에 나갔다며?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걸걸한 이병렬의 음성이 스마트폰 너머에서 건너왔다.
“치곤이와 통화했어?”
- 지금 옆에 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겠냐?
“아마 오늘 늦게나 내일 오전쯤에 조태완 아니면 지용호에게서 연락 올 거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볼지는 몰라도 당장 큰일은 없을 거 같다.”
- 그 뒤에는 일이 있다는 뜻이잖아?
이병렬다운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강성태가 픽 웃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비슷한 웃음이 넘어왔다.
- 그러지 말고 2층 사무실에 몇 명 두자. 네 실력이야 알지만, 머릿수가 밀릴 때는 도움될 수도 있어. 네가 애들을 상대하는 동안 연락할 놈은 있어야지.
강성태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이병렬의 제안이 옳다는 생각과 함께 카페에 드나들 덩치들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 아! 치곤이면 되겠다. 조금 있다가 보낼 테니까 사무실에 있으라고 해.
사무실의 소파가 좁다고 했던 놈을 거기에 있게 하라고?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제안이었다.
“점심 먹고 연락할 테니까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하지?”
- 너 같으면 언제 태완이파가 노릴지 모르는 상황에 혼자 있고 싶겠냐? 이놈도 혼자 있기보다는 너랑 있는 게 마음 편할 거다.
최치곤이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고?
누군가 움직이는 느낌에 강성태는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이은주가 앞쪽 창을 따라 걷고 있었다.
- 아니면 내가 진용이랑 가 있던가.
이병렬과 김진용이 사무실에 있으면 얼마나 많은 덩치들이 주차장과 사무실에 죽칠까.
“그럼 치곤이한테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오라고 해주라. 오늘만큼은 편하게 지내자.”
- 알았다. 나중에 또 연락할게.
이병렬의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강성태를 홀로 두고 갔던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집에 가겠다던 최치곤은 이병렬에게 달려가 의논한 눈치고.
그렇게 찜찜한 마음으로 쉬느니 강성태와 함께 카페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을 때, 이은주가 카페로 들어섰다.
“고생했어요.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정말 괜찮으세요?”
“그럼요. 아, 참! 조금 뒤에 치곤이 올지 몰라요.”
“네.”
이은주는 최치곤이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또 그나마 다행인데?
강성태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용도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파라 호텔에서 몸을 빼낸 지용호는 곧장 그의 근거지인 안중으로 향했다. 안중읍의 외곽에 있는 3층 건물에 들어선 지용호는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1층은 공장, 2층은 사무실, 3층은 살림집의 구조였다.
다른 조직이나 경찰의 급습을 막는 장치로 2층 계단의 끝에 유치장에서 사용하는 듯한 철문을 달았다.
누가 봐도 3층에서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놓고 정작 지용호는 주로 옥탑방에 머물렀다.
당장 3층에서 옥상으로 나가는데 두꺼운 철문을 달아서 이중으로 보호되는 데다, 여차하면 옆 건물의 옥상으로 튀어갈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옆 건물 역시 지용호가 관리해서 안전했고, 두 건물에 달아놓은 CCTV만 12개일 정도로 보안에 신경 썼다.
그렇게 옥탑방에 들어간 지용호는 가장 안쪽에 있는 책상에 앉았다. 그는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스마트폰을 꺼내서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린 뒤였다.
- 웨이?
중국말 대답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지용호입니다, 형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무슨 일인데?
지용호의 말을 들은 상대방이 이번에는 억양이 비틀린 한국말로 반문했다.
“조태완이 아무래도 의심스럽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태안의 일을 강성태란 놈에게 털어놨을지 모르니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자세하게 말해봐.
지용호는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 지금 말하는 강성태가 지난번에 안중에서 설쳤다던 그놈이냐?
“그렇습니다, 형님.”
- 그때의 일을 복수하기 위해 그러는 거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 괜히 멍청한 짓을 덮기 위해 함부로 지껄인 게 밝혀지면 뒤가 좋지 않아.
“각오하고 있습니다, 형님.”
지용호의 다부진 답이 건너가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일주일 뒤에 조태완이 관리하는 클럽에서 파티가 있다. 마카오와 말레이시아의 주요 인사가 모두 참석하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네 말대로 태안의 일이 망가지면 파티를 망치는 일이라 조직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
“태안을 내버려뒀다가 일이 망가지면 덩달아 파티 역시 위험한 자리가 됩니다.”
- 흐음.
“오늘 파라 호텔에서 태완이파 두 놈에게 칼을 먹였습니다. 클럽에서의 영상과 기사가 몇 개 올라왔었는데 모두 삭제되었고, 아우라 호텔의 일은 영화 촬영이라는 보도로 무마했습니다. 그 일들을 먼저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 조태완이 강성태와 손을 잡을 이유가 있나? 네 말대로라면 서울의 구석에 있는 조직인데?
상대의 질문을 받은 지용호는 느닷없이 올라오는 분노를 이기기 위해 입을 씰룩였다.
- 지용호?
“부끄럽지만 강성태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조태완도 비슷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리자 강성태에게 매달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한국은 우리와 달라. 호텔에서 조태완을 죽일 수도 없었을 텐데? 게다가 조태완이 지닌 인맥이나 영향력을 함부로 무시하기도 어려울 테고.
“강성태란 놈은 예상을 벗어납니다. 강남의 클럽에 혼자 뛰어들고, 아우라 호텔 로비에서 태완이파 애들을 두들길 정도로 미친놈입니다.”
- 미친놈 하나를 어떻게 못 했다는 말이지?
분한 심정을 억누르며 지용호가 생각을 전한 다음이었다. 지용호의 의견이 못마땅한 대꾸가 건너왔다.
- 지금은 어디냐? 송원은?
“안중에 와 있습니다. 송원은 파라 호텔에서부터 함께 와서 3층에 있습니다.”
- 의논한 뒤에 전화하마.
“알겠습니다.”
- 아! 한 가지만. 너한테 강성태를 죽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가 필요하지?
느닷없이 날아온 질문이었다.
시선을 떨궜던 지용호가 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삼룡이 모두 필요합니다.”
- 기가 막히는군. 알았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지용호는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냈다.
한국에 그냥 있으면 조태완을 피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강성태에게 달려들 방법도 없었다. 지용호가 기댈 곳은 어차피 광룡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광룡은 지금부터 지용호가 말했던 점들을 하나씩 짚어나갈 게 분명했다. 지용호의 의견을 인정해 세 마리 용이라는 삼룡을 보내준다면 뒈져서 길에 나뒹구는 강성태의 시체를 볼 수 있다.
“두고 보자, 이 개새끼.”
강성태를 떠올린 지용호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미 지용호는 목숨을 걸고 주사위를 던진 상황이어서 죽이느냐, 죽느냐의 결정만 남은 처지였다.
**
딸랑.
“어서 오세요, 커피알리고입니다.”
주문대에 선 강성태의 인사였다.
며칠 만에 들른 손님들은 강성태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몰라서 일상처럼 다가와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뜨거운 아메리카노 중 어떤 거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이스 하나, 뜨거운 거 하나요.”
“카드 받았습니다.”
강성태의 옆에서 이은주가 스쿠프를 집어 들었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성태는 잠시 밀쳐두었던 일상의 행복을 다시 찾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안다미였다.
카페를 마친 뒤에 하는 데이트도 좋고,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들어가기 전에 들러 강성태가 만들어준 커피로 위로받는 사소한 일상에도 행복해할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상처받지는 않을까?
“주문하신 커피 두 잔 나왔습니다.”
손님에게 쟁반을 건넨 강성태가 안다미를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검은색 대형 승용차 세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차가 들어오는 게 특별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주차 자리를 외면한 세 대의 승용차는 카페 앞까지 움직여 문 바로 앞에 멈췄다.
그 직후에 검은 선글라스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줄줄이 내렸다. 단단한 체형에 훈련받은 몸짓과 동작이었다.
이은주가 놀란 표정으로 강성태를 돌아볼 때,
딸랑.
먼저 내린 남자 두 명이 커피알리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