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 9화
액정을 확인한 김종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진이 형님입니다, 형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도진이 수상하게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우선 내가 4시에 클럽을 방문하기로 한 거다. 나머지는 적당하게 둘러대.”
지시를 마친 강성태는 갑갑한 표정으로 꿇어앉은 김정훈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통화 중에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럴 때 강성태의 뜻을 알아채는 건 늘 이병렬이었다.
“진용아, 칼 줘.”
김진용이 서둘러 꺼낸 회칼을 낚아채다시피 받은 이병렬이 김정훈의 턱 아래에 날을 바싹 붙였다.
“여보세요?”
그 직후에 김종수가 전화를 받았다.
“자리를 옮기느라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형님. 아닙니다, 형님. 그보다는 서로 안다고 해도 동생들 보는 앞에서 받기가 좀 그랬습니다, 형님.”
멋지게 둘러대던 김종수가 느닷없이 눈가를 좁혔다.
“예? 형님?”
문도진이 뭔가 뜻밖의 요구를 한 눈치였다. 강성태에게 시선을 돌린 김종수가 스마트폰에서 건너오는 말에 집중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형님. 여기 동생들은 각자 클럽을 운영하는 조건이라 다들 만족하는 눈치입니다, 형님. 예, 형님. 형님은 4시 30분에 들어오시면 적당합니다, 형님.”
연기에 몰입한 김종수는 고개까지 숙이며 스마트폰 너머로 공손한 음성을 전했다.
“아, 형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
얼른 끊었으면 싶은데 김종수가 마지막에 시간을 끌었다.
눈치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이병렬이 보란 듯이 김정훈의 턱 아래에 건 회칼을 바싹 조였다.
“잠깐 트러블이 있어서 형님. 애들이랑 좀 다퉜습니다. 영권이랑 정훈이가 제 편을 들어서 적당하게 가라앉았는데 저도 그렇고, 얼굴을 좀 다쳤습니다, 형님.”
적당히 하지?
강성태의 눈치를 살핀 김종수가 맡겨달란 투로 고개를 짧게 숙였다.
“그게 아니고, 형님. 수익을 매일 제게 올리라는 말에 웅진이하고 은우가 반발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 체면 한번 세워주십시오, 형님.”
문도진의 대꾸가 짧았는지 김종수는 바로 말을 이었다.
“혹시 이쪽에 연락하실 거면 저나 정훈이, 영권이한테만 전화 주십시오, 형님. 그래야 웅진이나 은우도 더는 다른 말을 안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형님.”
지금 상태로 변웅진과 조은우가 전화를 제대로 받기는 어렵다. 그걸 김종수가 즉흥적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감탄하는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김종수가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일단 4시 30분에 뵙는 거로 하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형님. 예? 형님? 알겠습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한 김종수가 마침내 종료버튼을 눌렀다.
“후우.”
고개를 든 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옆에서 봐도 충분히 긴장할 만한 통화였다.
“정훈이한테 전화하라고 전하랍니다, 형님. 그리고 클럽에 데려오는 동생들 숫자가 많을 테니까 그렇게 알랍니다, 형님.”
김종수가 공연히 일을 만든 것 같은데 변웅진이나 조은우와의 통화를 막은 것만은 칭찬받을 만한 대응이었다.
김정훈이 문도진에게 전화해서 헛소리를 하거나 언질을 주면 일 다 깨진다.
당장, 김정훈이 문도진에게 전화하는 게 급했는데 어쩐지 강성태는 문도진의 언질이 더 껄끄럽게 심장에 걸렸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25분이었다.
신호남파 인원을 데려오는 거로 굳이 김종수에게 언질을 줄 문도진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세력이 있다는 의미였고, 그렇다면 문도진이 손을 잡은 송원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길었던 싸움이 잘하면 오늘 마무리될 수 있겠다.
“치곤아.”
“예, 형님.”
“빌라에 다녀와 주라.”
강남의 밤을 배경 삼은 유리창이 강성태를 무겁게 비춰주고 있었다.
“옷장 안쪽에 상자가 있거든. 거기에 쿠크리라고 칼집에 들어있는 칼이 있다. 그것 좀 가져다줘.”
“예, 형님.”
“밖에서 지켜보는 놈들 있을지 모르니까 나가고 들어올 때 재킷 벗고 티 나지 않게 움직여.”
흠칫했던 최치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인사할 것 없다. 어서 가.’
이병렬의 눈짓을 받은 최치곤이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움직였다.
쿠크리를 굳이 가져오란 이유가 궁금한 이병렬, 의미를 알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김종수, 최치곤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피어난 적막이 단박에 강성태의 주위를 휩쓰는 느낌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강성태는 책상 앞에 꿇어앉은 김정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회칼을 목에 들이대도 문도진만 알아들은 한마디를 지껄이면 일 틀어지는 상황이었다.
이걸 그냥 기절시키고 김종수더러 다시 알아서 하라고 해?
참 어렵다.
강성태가 고민할 때였다.
“저, 형님. 정훈이에게도 한 번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김종수가 강성태의 시선을 당겼고,
“태완이 형님 작업한 게 김동팔하고 문도진이야! 이 새끼는 뒷빡 칠 생각으로 그런 인간하고 통화한 놈이고! 그런 놈한테 무슨 기회를 주자는 거야, 이 씨….”
조심스럽게 내민 김종수의 제안을 이병렬이 대뜸 걷어찼다.
“그럼 전화하라는 건 어떻게 할 거야?”
“안 하면 되지! 막말로 문도진이 안 나타난다고 우리가 손해 볼 거 있냐? 아니잖아! 변웅진, 조은우, 김정훈, 셋 잡았으니까 새벽에 다 불러 모아. 거기서 깔끔하게 태완이 파 정리하게. 그것만 해도 일단 한시름 더는 거 아냐!”
“야, 이병렬? 아 씨발 진짜. 그러지 말고 정훈이한테 기회 한 번만 주자!”
“너 지금 씨발이라고 그랬어? 이 새끼가 그런데, 귀신이 씌웠나? 누구한테 씨발이래?”
지켜보는 건 여기까지.
강성태는 손을 들어서 김종수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는 이병렬을 막았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눈빛으로 의견을 건네면 건넸지, 이병렬은 이런 식으로 흥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김종수가 통화 중에 임기응변을 발휘했던 것처럼 이병렬 나름으로 통화를 원하는 대로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어떻게 해? 기회를 줄까, 아니면 무시하고 넘어갈까?”
질문을 던진 강성태는 이병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정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이병렬은 닭살 돋을 존댓말을 막힘없이 쏟아냈다. 병원에서 그토록 어색하게 꺼내던 존댓말을 말이다.
‘얼른 끝내. 이런 거 적성에 안 맞는다.’
강성태는 이병렬의 존댓말보다 그의 빛나는 눈빛을 믿었다.
“김종수가 원하는 대로 한 번은 기회를 줄 테니까 다른 소리 말고 받아들여.”
“알겠습니다.”
이병렬은 또 한 번 막힘없는 답을 내놓았다.
어쩐지 바지사장이 된 듯한 느낌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김진용 앞에서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병렬의 기분이 더 언짢을 수도 있겠다.
이병렬은 눈치를 살피고 있던 김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김정훈은 고개만 들었다.
“우리 보스께서 기회를 주신단다. 어떻게 할래?”
이병렬이 쇳소리 묻혀 던진 질문에 답을 내지 않은 김정훈이 답을 구하듯 김종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뭘 고민해, 인마! 웅진이랑 은우 박살났어. 나랑 영권이가 새벽에 성태 형님 모시고 한 바퀴 돌면 조직 정리 끝난다고.”
짧은 순간에 말을 풀어내는 걸 보면 김종수는 확실히 여우였다.
“너 모르나 본데 성태 형님은 태완이 형님이 조직 맡긴 분이야. 태완이 형님 깨어나시면 버틴 놈 다 끝나는 거라고.”
쇠말뚝처럼 현실을 김정훈에게 박아넣은 김종수가 강성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형님. 제가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정훈이 이놈, 괜찮은 놈입니다, 형님. 형님께서 인사 받으시고 클럽까지만 맡겨주십시오, 형님.”
그런 뒤에 강성태를 향해 깊게 상체를 숙였다.
참 유치해 보이는 행동이었는데 이게 또 김정훈한테는 먹힌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뒤뚱거리는 자세로 김정훈이 몸을 일으켰다.
회칼을 든 이병렬이 곧바로 다가가 묶어두었던 타이를 풀어주자 김정훈은 강성태를 향해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다.
“김정훈입니다, 형님.”
이런 거 강성태는 아직 어색했다. 대신 이런 순간을 잘 처리하는 이병렬이 옆에 있었다.
“이제 병렬이한테 인사해. 병렬이 너도 이제는 분명하게 받아주고.”
“김정훈입니다, 형님.”
“이병렬이다. 보스 말씀이라면 나는 독이라도 처먹어. 하여간 지금까지 있었던 일 깨끗하게 잊을 테니까 너도 서운한 게 있으면 털어.”
“예, 형님.”
“여기도 인사해. 김진용이. 너보다 한 살 위다.”
다시 김진용과 김정훈의 인사가 끝나며 번거로운 절차가 마무리됐다.
“진용아. 의자 좀 가져오고 장수랑 대기실에서 커피 좀 타와라. 물도 좀 가져오고.”
“예, 형님.”
이병렬이 지시하자 김진용과 박장수가 책상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는 대기실로 움직였다.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형님. 정훈이가 도진이 형님한테 전화해야 합니다.”
김종수가 기다렸다는 듯 통화를 재촉했다.
“커피나 마시고 하지?”
“괜찮으시면 지금 하겠습니다, 형님.”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이병렬의 권유에도 김정훈은 통화를 하겠다며 나섰다.
강성태의 눈짓을 받은 김종수가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스피커폰으로 하자.”
그리고는 혹시 있을지 모를 꼼수를 차단했다.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 김정훈이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스피커 통화버튼을 눌렀다.
두르륵. 두르르륵. 두르르륵.
- 여보세요?
“김정훈입니다, 형님.”
종이컵에 물 받던 소리가 문도진의 음성에 맞춰 뚝 잘렸다.
- 전화하라는데 왜 이렇게 늦어?
“일이 있었습니다, 형님. 종수 형님이 눈을 좀 맞으셨습니다, 형님.”
- 큰일 놔두고 염병들 한다.
빈정대는 문도진의 대꾸를 들으며 김정훈은 혀로 입술을 적셨다.
“다 해결됐습니다, 형님.”
- 결론은? 몇 시에 가면 돼?
김종수가 왼손 손가락 네 개, 오른손으로 세 개를 세웠다.
“4시 30분에 오시면 됩니다, 형님.”
- 진짜 문제없지?
“종수 형님께서 큰소리를 치셨는데, 형님. 형님께서 종수 형님 믿고 움직이신다고, 형님. 웅진이랑 은우가 아무리 전화해도 형님이 안 받으실 거라고 해서 둘이 좀 불편해하는 거 말고는 없습니다, 형님.”
- 그거야, 그렇지.
김종수가 만족한 듯 상체까지 크게 숙일 때, 김정훈은 다시 혀로 입술을 닦았다.
“종수 형님하고 저는 형님만 믿습니다, 형님.”
- 강성태가 오는 건 확실해?
“종수 형님이 애 많이 쓰셨습니다, 형님.”
- 알았다. 아까 웅진이한테 말해두긴 했는데 4시 30분에 입구 비워놔. 알았어?
“예, 형님.”
김정훈이 습관처럼 고개까지 숙이며 답하고 나서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듣고 있던 김종수와 이병렬이 동시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
통화를 마친 문도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번호야 다 있으니까 변웅진과 조은우,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거는 건 문제가 없었다.
‘뭔가 찜찜한데?’
김동팔을 제외하면 태완이파에서 가장 대가 센 놈 둘이 변웅진과 조은우였다.
왜 하필 그 둘과 통화를 못 하게 할까? 김정훈과 정영권은 절대 둘을 꺾지 못할 텐데?
입을 뒤튼 문도진은 눈을 얻어맞았다는 김종수를 떠올렸다.
듣고 보면 그건 또 수긍이 간다.
아무리 김정훈과 정영권이 대들어도 변웅진과 조은우라면 김종수의 눈을 갈기고 남는다.
스마트폰을 매만지던 문도진은 통화목록을 뒤졌다.
누가 뭐래도 변웅진과 한 번은 통화해야…….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러나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송원’이란 이름을 띄운 스마트폰이 그의 손안에서 몸을 떨었다.
눈가를 찌푸린 문도진은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지금 출발합니다.
“벌써?”
- 지금 출발해야 4시 전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그렇게 걸리나?”
대꾸하기 싫다는 듯 건너온 웃음에 문도진은 빠직 이마에 힘줄이 쏟았다.
“출발은 그렇고. 애들은?”
- 독한 애들로 50명 추렸습니다. 입국 기록 없는 애들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참. 형님이 안 계시면 저희는 작업 안 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 못 할 말로 목숨 걸고 가는 건데 형님도 함께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우리는 대길이가 간다니까!”
- 형님?
삐딱한 음성으로 문도진을 부른 송원이 반 박자 뜸을 들였다.
- 강성태는 우리가 상대하지만, 태완이파는 형님이 상대하셔야 안 되겠습니까, 형님?
“태완이파 애들은 내가 이미 다 조갈이 했어! 그건 걱정도 하지 마.”
- 덩저 티앤샹 띠아오 씨앤삥(等着天上掉馅饼)?
느닷없이 달려온 중국말에 문도진은 멍한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그리고 보니 송원은 중국놈이었다.
“알아듣게 말해!”
- 하늘에서 빵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겠다면 저도 이번은 빠지겠습니다.
“후우-.”
- 괜히 형님 앞마이나 서다 일 망가지면 저도 지용호 형님처럼 됩니다. 그러니까 결정하십시오. 출발합니까? 아니면 오늘은 접을까요?
“간다. 내가 갈 테니까 출발해.”
문도진이 씹듯이 뱉어낸 말이 건너갔고,
- 클럽 앞에서 뵙겠습니다, 형님.
다짐과 같은 송원의 말이 건너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