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4화
이두안이 커피잔을 들어 뻑뻑한 침묵을 감췄다.
출발 일자를 당긴 이유를 말해달라는 간단한 요구에 시간을 끌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순간이 죽기보다 싫은 느낌이었다.
“혹시 다미 씨와의 관계를 짐작해서 그러신 겁니까? 제가 깨어나기 전에 보내려고요?”
잔을 내려놓던 이두안이 눈을 치켜떠서 강성태를 보았다. 자존심이 상했을 때 보이는 특유의 날카로움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부인하지 못하지. 그 점은 미안하네.”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자네를 대신해 레드워터 출신의 버트 그레인을 책임자로 올려놨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는 두 달 안에 사망할 거라고 보네.”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상태에서 이두안이 말을 이었다.
“세타스 카르텔이 가페(GAFE)의 퇴역 요원들을 집중적으로 매수해서 조직원으로 들였다면 이해가 되겠나?”
광룡과 신호남파가 동시에 달려드는 것보다 지랄 같은 소식이었다. 날카롭게 바뀐 강성태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투로 이두안이 옅게 웃었다.
“현역들을 포섭해서 퇴역하게 한 거니 사실상 정예라고 봐야겠지.”
“정부에서 도움을 줬겠군요.”
“물론이지.”
이두안이 잔을 들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강성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날카롭게 변한 눈을 가라앉혔다.
“정부에서 정보를 받은 세타스 카르텔은 아보카도 농장에서 정유 사업으로 시선을 돌렸지. 이 사업을 블랙 머니라고 부른다더군.”
“회장님의 암살이 첫 번째 목표겠군요.”
“로라를 빼면 서운해하지 않겠나?”
이제야 이두안이 한국에 도착해서도 경호원에 둘러싸였던 이유와 멕시코 시티 공항에 카르텔 소유의 장갑차가 등장한 배경을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 강성태는 안다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점도 깨달았다.
“정부에서 등을 돌린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세타스 카르텔이 마약에서 손을 떼는 조건으로 정유 사업을 인정하라는 제안을 내놓았네. 당장 듣기에는 좋지. 미국 마약단속반은 가장 골치 아픈 마약 조직을 없애는 거고 현 대통령은 그걸 치적으로 내세우며 막대한 뒷돈을 받을 테니.”
이두안이 정부 인사에게 돈을 안 먹였을 리 없었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개발하면 카르텔이야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 브라이튼이 회장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혹시 미국의 압력 때문입니까? 세타스 카르텔이 마약에서 손을 뗀다는 조건 때문에?”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이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제가 조언해도 되겠습니까?”
“멈추라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사양하겠네. 여기에서 멈추면 나는 지금까지 일군 것들을 모두 뺏기게 돼. 그렇게 되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세타스 카르텔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나와 로라를 살해하겠지.”
“한국에는 부자가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망하는 순간 살해될 거라고. 그러니 남은 건 내가 죽느냐, 카르텔이 무너지느냐의 싸움이지.”
“흠.”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던 이두안이 어쩌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됐을까?
“내가 자네를 필요로 하는 이유지. 산악 지역에서 가페를 상대로 거점을 확보하고 질서를 유지할 사람, 카르텔이 인정할 인물, 내가 아는 한 자네밖에 없네.”
중요한 대화였다.
그런데 주사제의 영향인지 머리가 띵하게 울리면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이두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에 주사를 맞았는데 진정제 성분이 들었나 봅니다.”
“한숨 자게. 일어나서 식사하며 다시 이야기하지.”
“괜찮습니다.”
“자네뿐만 아니라 나 역시 잠이 부족해.”
강성태를 다독인 이두안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흐릿한 시선 앞에서 직원이 움직이자 곧바로 비행기 안이 어두워졌고, 누군가 담요를 덮어줬다.
“자네를 잠재울 정도의 진정제라면 나도 한번 맞아보고 싶군.”
몸을 일으킨 이두안이 강성태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주고는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세 명의 동남아 부자와 말레이시아, 싱가폴의 조직 보스가 참석한 자리였다.
“새로운 카지노를 위해 듭시다!”
잔을 높게 들어 건배를 제안한 원자춘은 유쾌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미녀들이 사이사이 앉았는데 감히 잔을 들지 못하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원자춘이 호탕하게 웃을 때였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온 조직원이 뒤편에서 상체를 기울였다.
“한국의 강성태가 조금 전에 멕시코로 출국했습니다.”
일행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낸 원자춘은 조직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벽에 장식한 네온사인에서 하얗고, 파랗고, 붉은 빛이 번갈아 피어나 원자춘의 낯빛을 바꾸고 있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멕시코 재벌의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했습니다.”
“멕시코? 거길 왜?”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에 알아내겠습니다.”
“그놈 과거는 어떻게 됐어?”
“전산 기록이 조작된 거 같다는 보고입니다.”
붉은색을 뒤집어썼던 원자춘의 눈이 곧바로 파란색을 덮어썼다.
“부상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
“최대한 서둘러서 알아보겠습니다. 삼룡이 출국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강성태가 없다면 굳이 출국할 필요 없다. 기다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과거 기록과 멕시코로 향한 목적 나오는 대로 알려주고.”
“예.”
고개를 숙인 조직원이 물러나자 원자춘은 별것 아니란 얼굴로 둘러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꼭 죽이고 싶은 놈이 있는데 냄새를 맡았는지 도주했다는 보고였습니다.”
“우리 원 선생이 이미 결정하셨는데 도주한다고 되겠소?”
“요즘 독한 벌레들은 살충제로도 잘 죽지 않아서요. 뛰기는 왜 그렇게 잘 뛰는지.”
“자! 원 선생의 바람이 원만하게 이루길 바라며 듭시다.”
“감사합니다.”
강성태의 원만한 죽음을 기원하는 건배와 함께 분위기는 다시 유쾌하게 이어졌다.
**
잠이 들었는데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비행기 안의 상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따금 다가온 직원이 강성태의 상태와 링거팩을 체크했다.
가페(GAFE)는 멕시코 특수부대였다. 그들이 참여했다면 그저 그런 퇴역 군인으로 이뤄진 카르텔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산악 지역에서 가페를 상대로 거점을 확보하고 질서를 유지할 사람, 카르텔이 인정할 인물.’
이두안이 강성태를 책임자로 삼으려는 이유였다.
생각이 달려가자 익숙한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들이 온다면 안다미를 구출하는 건 가능하겠다. 그러나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길에 초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둠에서 누군가 다가와 강성태가 덮고 있던 모포를 어깨까지 올려주었다.
강성태에게 포근함이란 비록 악몽이었을지라도 사고가 나기 직전 옆에 앉은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꼭 구해서 함께 돌아와.’
강성태는 꿈에서 들었던 음성을 떠올렸다.
안다미가 손을 잡아주었을 때, 꿈이 아닌 현실에서 처음으로 포근함이란 느낌을 실감했었다.
‘구해낼 겁니다. 지켜보세요.’
피식 웃은 강성태는 좀 더 깊게 눈을 감았다.
**
외벽이 이곳저곳 부서진 시멘트 건물이었다.
유리창의 절반 이상이 깨진 상태였는데 온전한 것들도 흙먼지를 뿌옇게 얹어서 청결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래쪽은 무질서하게 펼쳐진 밭이 차지했고, 구불구불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 좌우에는 한국의 깊은 산과 비슷한 풍광이 늘어서 있었다.
시날로 후아스는 다 피운 담배의 불똥을 책상 앞으로 튕겨내고 꽁초를 깡통에 넣었다.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옥상에는 헬리콥터를 떨어트릴 정도의 중기관총이 세 정 설치되었고, 중기관총을 걸어놓은 지프만 다섯 대가 주변을 지키는 요새였다.
무전 도청, 전화 감청, 보복, 살해, 경고, 협박, 납치,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세타스 카르텔의 행동 대장이 바로 시날로였다.
길게 찢어진 눈 끝에 묘한 흥분을 매단 그가 담배를 새로 입에 물었을 때였다.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찰칵.
“후우-.”
불을 붙인 시날로는 연기를 내뿜으며 들어선 대원을 보았다.
“강성태의 출국을 확인했습니다.”
쾅!
보고를 듣기 무섭게 시날로는 책상을 내리쳤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로군. 이두안이 한국으로 갔을 때부터 기대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올 줄은 몰랐어.”
“그렇습니다.”
“한국의 의사들은?”
“한 명이 열이 있다고 하는데 예상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멀리서 왔다지만, 음식이 너무 좋았던 거 아냐?”
“좀 더 거친 음식으로 바꾸겠습니다.”
만족한 웃음을 지은 시날로가 불똥을 튕기고는 깡통에 담배를 집어넣었다.
“강성태가 온다니까 우리도 대접을 준비해야지. 내일 아침에 우선 계집의 머리를 잘라내겠다.”
“촬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입술을 내밀고 창을 보았던 시날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의사들을 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지만, 경호원의 좌절을 맛보게 하는 게 효과적이겠다. 동영상으로 하자.”
“알겠습니다.”
“세타스 카르텔 역사에서 유일하게 오점을 남긴 놈이니까 대접에 소홀하지 않도록 입국과 동시에 철저하게 감시해.”
“예.”
나가보란 의미로 턱을 들었던 시날로는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히죽 웃었다.
**
첫날은 거짓말처럼 푹 잤으나 두 번째 밤은 세 사람 모두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세 사람의 힘겨움과 상관없이 태양이 솟았고, 새가 울었으며,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아침을 펼쳐놓았다.
오전 8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물병과 자루를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핼로우?”
나가려는 그를 남자 의사가 불렀다.
아스피린과 화장실, 그리고 담요를 요청할 의도였다.
고개를 돌렸던 그는 바로 불렀던 의사를 향해 걸었다.
휘익! 콰작!
그리고는 들고 있던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볼을 세차게 때렸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의사는 기절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
“뭐 하는 거예요!”
안다미는 우리말로 고함을 버럭 지르며 소총을 든 남자 앞을 막아섰다.
찌든 담배 냄새,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역겨운 비린내, 누런 이빨의 남자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안다미의 가슴과 허리 아래를 훑었다.
“아스피린이 필요해요! 아스피린!”
씨익, 웃은 남자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원 섹스, 원 아스피린, 오케이?”
“개새끼.”
한국말이었지만, 욕이란 걸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길게 뺀 혀로 입술을 핥은 뒤에 몸을 돌렸다.
“후.”
남자가 나간 뒤에 안다미는 얼른 쓰러진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박 선생, 괜찮아? 이나 뼈는 어때?”
“괜찮은 거 같아.”
입가가 터진 박재구가 손바닥으로 볼을 누르며 핏물을 뱉었다.
“안 선생도 조심해.”
“알았어.”
안다미가 답을 했을 때였다.
빵이 담긴 자루를 열었던 이승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곰팡이가 폈는데?”
실제로 그가 들어 보이는 빵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
잠이 깬 강성태는 좌석 옆에 놓인 물병을 집었다.
좌석 앞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다섯 시간을 잤다고 알려주었으니 아직 여덟 시간 정도를 더 날아가야 멕시코였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세운 강성태는 놀라는 눈으로 배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처 부위가 편했고, 움직임이 그만큼 부드러웠다.
잠을 잘수록 회복이 빠르다는 말을 떠올린 강성태는 다시 의자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바닥을 스치는 진동을 느끼며 강성태가 잠을 청할 때였다.
거대한 덩치가 걸어와 맞은편에 섰다.
이두안의 경호원 존 보스만이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걸 보면 다른 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스터 강.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버튼을 눌러 의자의 등받이를 세웠다.
“앉아.”
“고맙습니다.”
존 보스만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태도로 맞은편에 앉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