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6화
제3장. 키란 동생. 함께.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공항 건물은 타원형의 조형물을 연달아 머리에 올려놓은 채 기본 조명만 켜놓아서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잠시 후, 활주로에 내려앉은 비행기가 바닥에 이어진 선을 따라 움직였다.
돌아올 거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멕시코.
삶의 중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죽음과 맞서야 했던 가혹한 땅에 결국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가 크게 방향을 트는 순간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쿠크리를 허리 뒤에 꽂은 강성태는 배낭을 등에 짊어졌다.
움찔했던 비행기가 멈춰 선 다음이었다.
이두안과 존 보스만이 각각 다른 표정으로 앞쪽에서 강성태를 향해 다가왔다.
“인사는 해야겠지?”
처음이었다.
이두안이 개인적인 감정을 눈에 담은 것은.
그만큼 어색했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표정과 눈빛보다 진솔한 느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미리 연락 주게. 다른 건 몰라도 비행기는 준비해 주겠네.”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강성태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직후였다.
가까이 다가온 이두안이 팔을 벌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사라 좀 더 인간적인 용기를 냈는지 모른다.
“고맙습니다.”
강성태의 인사에 이두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바트가 나와 있을 걸세.”
대답 대신 눈짓을 건넨 강성태는 시선을 돌려 존 보스만을 보았다.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성태와 존 보스만은 동시에 턱을 짧게 드는 동작으로 인사했다.
레드워터가 전투 중에 동료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이별은 이 정도가 좋았다.
그리고 강성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문이 열리며 멕시코 특유의 냄새가 비행기 안으로 달려들었다.
‘돌아가.’
멕시코가 강성태에게 경고하는 느낌이었다.
‘걸음을 내디디면 죽어.’
픽 웃은 강성태는 트랩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여기 오지 않았겠지.
안다미를 외면하면 단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한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그렇지, 운명아?
트랩을 내려선 강성태는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 버스를 빠르게 살폈다.
긴장을 푸는 순간 죽는다.
버스 기사가 느닷없이 몸을 돌려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상황이어서 강성태는 허리에 꽂았던 쿠크리를 꺼내 왼손에 들었다.
두 칸짜리 버스의 계단을 오른 순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야.”
앞좌석의 등받이에 상체를 걸친 바르지오 만시니가 강성태를 향해 손을 들었다.
“화이트 테일이 직접 나왔을 줄은 몰랐다.”
진심이었다.
화이트 테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바르지오 만시니가 버스에 있으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정이 그렇게 됐지. 인사부터 해. 이쪽이 버트 그레인, 시에라 마드레 산맥 개발 프로젝트 총 책임자.”
“멕시코에 돌아온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미스터 강. 버트 그레인입니다.”
“반갑습니다.”
버트 그레인과 악수를 나눌 때 버스가 움직였다.
“여기 가방 받으시고, 여권을 주십시오.”
버트는 미니 버스의 좌석 아래에서 검은 가방을 들어 강성태에게 건넸다.
꽤 무게가 나가는 가방을 받아 옆에 내려놓은 강성태는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버트에게 건넸다.
공항을 빙 돌아 달린 버스가 건물 뒷문에 멈췄을 때였다.
“입국 도장을 받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몸을 일으킨 버트가 버스를 내려서 곧장 건물로 들어갔다.
구불거리는 금발, 좁은 눈, 뾰족하고 길게 빠진 코, 고집스러운 입술, 단어의 끝을 세우는 억양까지, 버트 그레인은 누가 봐도 영국인이었다.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무기를 확인하지?”
강성태의 뒤편에 앉은 바르지오 만시니가 턱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여기는 왜 왔어?”
“내가 버트와 함께 생활했었다는 말을 안 했었나?”
“정보를 주기로 하고 연락을 끊은 건 분명하게 기억한다.”
이탈리아 남자 특유의 뻔뻔한 표정을 지은 바르지오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렇게 만나서 정보를 주는 게 더 좋다고 여겼지.”
“화이트 테일은 전화로 상대하는 게 좋아.”
“오랜만에 보는 건데 뻑뻑하게 굴지 말자고.”
통화할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바르지오는 마주 앉은 사람의 속을 긁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특히, 자유자재로 바뀌는 표정과 뻔뻔한 눈빛을 말투에 더할 때면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도 종종 분통을 터트리곤 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시였다.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옆자리에 두었던 가방을 열었다.
MP5 소총 두 정, 글록 19 권총 네 정, 수류탄, 연막탄, 그 외에 대검과 가죽 케이스, 이어서 탄창과 손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탄창 박스가 가방 안에 가득했다.
소총의 숫자를 확인한 강성태는 바르지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영국과 레드워터에서 사용하던 소총으로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나?”
“왜 두 정인지 답하는 게 먼저 아닐까?”
“키란이 공항 바깥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맨손으로 돌아다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
바르지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면 이쪽만 속이 터진다.
실제로 영국과 레드워터에서 사용하던 소총이라 MP5를 준비한 것에 불만은 없었다.
강성태는 먼저 권총 탄창을 두 개 집어 총알을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 가죽 케이스를 꺼내 허리와 발목에 걸었고, 마지막으로 오른쪽 허리와 왼쪽 발목에 권총을, 오른쪽 발목에 대검을 찔러넣었다.
강성태가 소총의 탄창에 총알을 찔러 넣을 때였다.
건물에서 나온 버트가 버스에 올랐다.
탄알을 채워 넣는 강성태를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그가 여권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무기는 마음에 듭니까?”
레드워터 시절처럼 강성태가 턱을 짧게 치켜들자 버트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버스가 출발했다.
철컥!
노리쇠를 당긴 소총을 가방에 넣은 강성태는 새로운 탄창을 집어 총알을 꽂아 넣었다.
“미스터 강. 사이트로는 언제 출발할 생각입니까?”
“바로 가겠습니다.”
강성태의 대꾸를 들은 버트가 ‘역시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바르지오를 돌아보았다.
“아직 한국의 의사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화이트 테일이 여기에 온 걸 보면 대강의 위치는 안다는 뜻이겠죠. 나머지는 현장에 도착해서 파악하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철컥!
소총의 노리쇠를 당긴 강성태는 안전장치를 확인한 뒤에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닫고 났을 때 버스는 활주로를 벗어나 공항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바르지오. 한국 의사들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는 지역을 알려줘.”
강성태는 고개를 돌리고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배에서 피가 나는데?”
바르지오가 시선으로 강성태의 배 부분을 가리켰다.
한국에서 강성태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고 있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바르지오. 한국 의사들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는 지역.”
“키란과 둘이서 감당하기 어렵다.”
바르지오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는 소모적인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특별한 검문도 없이 게이트를 통과한 버스는 오른편으로 돌았다. 운전석의 창으로 입국과 출국을 안내하는 표지판과 더불어 ‘AERO MEXICO’ 광고판이 두 갈래 길의 중앙에서 시선을 당겼다.
어둠에 싸인 공항도로로 나선 버스는 입국이라는 간판을 따라 왼편으로 돌았다.
멀리 입국장의 게이트가 나직한 조명을 품고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미스터 강. 인질을 안전하게 구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해.”
“시에라 마드레 산맥은 일정 숫자 이상 들어가는 게 오히려 눈에 띄어.”
강성태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르지오가 A4 크기의 지도를 건넸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의 비탈을 타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지는 사진이었다. 결국, 바르지오도 강성태가 바로 인질을 구하러 갈 거란 사실을 짐작했다는 증거였다.
사진을 살피던 강성태는 “후-.” 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구불구불한 길에서 멀찍하게 떨어진 아래에 드문드문 놓인 건물을 보아서였다.
어느 건물에 안다미와 동료들이 있는지 모른다.
하나씩 뒤지는 사이 주변에 몸을 감춘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길 테고, 남는 건 머리나 심장이 터진 강성태의 죽음이었다.
‘올 테면 와봐. 이번엔 반드시 머리에 구멍을 내주마.’
가페 출신의 시날로 후아스가 보낸 초대장을 받은 느낌에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누가 죽는지 볼래?’
독한 눈빛을 한 강성태를 버트와 바르지오가 살필 때였다.
길게 늘어선 입국장 게이트를 지나치던 버스가 끝에서 멈췄다.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기둥 뒤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키란을 발견하고는 몸을 세웠다.
버스 안에서 일어선 강성태와 기둥 옆에 서 있던 키란의 눈이 마주쳤다.
키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팔 사람들은 묘하게 감정을 울컥하게 만드는 순박한 눈빛과 표정을 지녔다.
강성태는 열린 버스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키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키란이 양손바닥을 붙여 얼굴 앞에 세우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신께 감사드린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였던 키란은 강성태를 향해 붉어진 눈시울을 들었다.
“잘 지냈어?”
“예.”
강성태가 미소 짓자 키란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강성태 형님. 키란 동생.”
로라가 그러더니 키란도 어디에서 익혔는지 모를 우리말을 불쑥 토해냈다.
“키란 동생. 함께.”
이어진 우리말의 끝에서 키란은 허리 뒤에 꽂아두었던 쿠크리를 꺼내 왼손으로 세웠다. 전투에 나설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키란. 집에 어머니가 계신다. 네 어머니가 내 어머니도 돼.”
“키란 동생. 함께.”
영어로 말했고, 반복되는 우리말 답이 넘어왔다.
강성태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키란이 씨익 웃었다.
“키란 동생. 강성태 형님. 함께.”
“한국말은 어디에서 배웠어?”
“스마트폰에서요.”
영어로 나온 답에 강성태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도와줄래?”
“그러려고 왔습니다.”
“가페 출신이고, 산악인 데다 적의 숫자가 아주 많아.”
기껏 힘든 상황을 설명했는데 키란은 만족한 듯 웃었다.
“타자.”
키란이 기둥 뒤에 서 있는 이유를 짐작하는 강성태는 주변을 살핀 뒤에 바로 버스에 올랐다.
뒤이어 올라온 키란은 버트와 바르지오를 빠르게 살폈다.
“키란. 멕시코 책임자 버트, 이쪽은 바르지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을 향해 합장한 키란이 마주 잡은 손에 고개를 숙였다.
통로 왼편에 키란, 강성태가 앉았고, 오른편에 버트와 바르지오가 순서대로 앉았다.
“무기부터 챙겨.”
강성태는 소총을 한 정 꺼낸 뒤에 검은 가방을 앞으로 넘겨주었다.
순박한 것과 능력이 있는 건 전혀 다른 의미였다.
무기를 살핀 키란은 능숙하게 권총과 대검을 허리와 발목에 걸었다.
“이 버스로 어디까지 태워다줄 수 있지?”
“중간에 주유소에 잠시 멈추면 뒤편에 세워놓은 승합차로 갈아타. 그 승합차가 레게로 주까지 데려다줄 거다.”
위성사진을 준비한 것처럼 역시 바르지오는 시에라 마드레 산맥으로 갈 방법까지 준비해두었다.
“클레이모어는?”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대략 10개가 필요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바르지오에게 강성태가 요구사항을 분명하게 전한 다음이었다.
“미스터 강. 퇴로를 염려하는 거라면 레드워터의 명예를 걸고 조건 없이 돕겠습니다.”
지켜보던 버트가 의견을 내놓았다.
“클레이모어 10개를 터트리면 나중에라도 세타스 카르텔에서 보복하려 들 겁니다.”
“어차피 세타스 카르텔을 상대하는 총 책임자로 왔습니다. 내가 인질을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돌면 용병을 구하기도 쉽습니다. 이해하시죠?”
가로등이 버트의 얼굴을 일정하게 비춰주는 가운데 그가 턱을 짧게 치켜들었다.
구출에 성공한다면 그 공로를 가져가고 싶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강성태가 실패하면 버트는 조용하게 빠지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퇴로를 부탁합니다.”
“무전기를 드리겠습니다.”
안쪽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낸 버트가 강성태를 향해 내밀었다.
“채널은 3번을 사용하면 됩니다.”
강성태에게 무전기를 건넨 버트가 만족한다는 투로 바르지오를 돌아보았다.
버스는 5분쯤 더 달렸다.
“저 앞에 보이는 주유소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승합차 기사는 믿을 만합니까?”
“내가 직접 고용한 대원입니다.”
차선을 내려선 버스가 속도를 줄이는 동안, 강성태는 상체를 기울여 주유소 안을 살폈다.
늘어선 세 개의 주유구 안쪽 중앙에 선 승합차가 기름을 넣고 있었다.
버스가 멈춰 선 다음이었다.
주유기를 잡고 있던 남자가 고개로 승합차를 가리켰다.
“행운을 빕니다.”
버트의 말과 동시에 버스의 문이 열렸다.
눈인사를 전한 강성태는 상체를 숙인 자세로 버스에서 내려 승합차로 옮겨 탔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옆구리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