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19화
제8장. 사랑의 힘이라고 할까?
왼팔을 목 끈에 건 강성태는 상체를 숙여 인사하는 덩치들 너머로 시선을 들었다.
휠체어에 앉은 최치곤이 복잡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너에 대한 소문이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래놓고 병렬이 형님 조이고 들어오는데 환장하겠다.
병원으로 오는 동안 나눈 통화에서 최치곤은 분통을 터트렸다.
- 삼합회가 물밑에서 돈질한다는데 아래쪽이 들썩들썩 한가 보더라.
시선이 마주쳤던 최치곤이 목 끈에 걸어놓은 강성태의 왼팔을 보며 입 끝을 뒤틀었다.
‘병렬이부터 만나보고 나올게. 조금 뒤에 보자.’
최치곤을 향해 의미 있는 시선을 던진 강성태는 바로 앞에 있는 병실 문으로 몸을 돌렸다.
출국하기 전에 강성태가 지냈고, 지금은 이병렬이 서달수와 함께 사용한다고 들었다.
눈치 빠른 덩치 하나가 병실 문을 열어주어서 강성태는 곧장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왼편으로 강성태와 최치곤이 사용했던 침대가 나란히 있었고, 오른쪽에 둔 테이블에 이병렬과 처음 보는 남자 둘이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강성태를 본 서달수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깊게 숙였고,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이병렬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일어섰다.
이병렬의 맞은편에 있던 두 명이 ‘저놈은 뭐야?’ 하는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강성태가 테이블로 다가가는 동안, 병실 문이 닫혔다.
“너는 뭐야?”
이병렬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 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가 모시는 보스입니다, 형님.”
“강성태?”
“이쪽이 서성기 형님, 조덕진 형님.”
두 사람을 소개한 이병렬이 목 끈에 걸어둔 강성태의 왼팔과 몸을 살폈다.
서 있기조차 힘들어했던 상태를 기억하고 있어서 혹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강성태? 듣던 대로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네. 여자 꽤 자빠트렸겠어.”
강성태는 서성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생활한 적도 없다며? 족보도 없는 사람이 이런 바닥에서 놀면 되나?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
강성태는 서성기를 향해 옅게 웃었다.
“웃기는 씨발. 뭐 해? 나가!”
“형님. 말씀을 좀 조심하십시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병렬이 건넨 경고를 서성기가 덥석 물었다.
몸이 아직 낫지 않은 이병렬과 왼팔을 목에 건 강성태를 보자 여차하면 한판 하겠다는 각오가 선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이 새끼들이 정말 위아래가 없어! 야, 이 새끼들아!”
여차하면 주먹을 날릴 것처럼 서성기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서성기라고 했지? 지금 나가면 한 번은 봐준다. 그러니까 조용히 나가. 앞으로 내 앞에서 절대 욕하지 말고.”
강성태의 말에 서성기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그런데 이 새끼가?”
달려들 자세를 잡은 서성기가 작정한 듯 거친 욕을 뱉어낸 순간이었다.
쩌어어어억!
강성태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제대로 꽂아넣었다.
콰드등! 철퍼덕.
의자에 허리가 걸리면서 서성기는 예상보다 좀 더 비참하게 쓰러졌다.
“대화하자고 온 건데 대뜸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해?”
강성태가 다가가자 조덕진은 세상 억울한 태도로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들어와서 들은 건 욕밖에 없는데? 나랑 병렬이를 협박하러 온 거 아니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활하는 선배를 이렇게 대하면 되겠어?”
조금 전까지 생활한 적이 없느니, 족보가 어쩌니 했던 말을 잊은 듯한 조덕진의 항변이 있었다.
“조덕진.”
강성태가 나직하게 부르자 조덕진의 시선이 오른쪽 주먹으로 내려갔다. 혹시 주먹을 날리는 건 아닌가 염려하는 눈치였다.
“한 번만 더 조덕진이란 이름이 엉뚱한 곳에서 들리면 그때는 내려가서 싹 쓸어줄 테니까 알아서 해.”
답을 못 내놓는 조덕진의 뒤에서 이병렬이 픽 웃고 있었다. 그래놓고 세상 후련한 얼굴로 서달수를 돌아보는 여유마저 부렸다.
“나가.”
기가 완전히 부러진 조덕진이 쭈뼛대며 쓰러진 서성기를 내려다보았다.
“달수야. 저거 끌어내.”
“예,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서달수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서성기의 발목을 붙잡아서 개를 끌고 가듯 병실 문으로 향했다.
팔을 붙잡는 게 보기 좋았을 테지만, 일부러 볼썽사납게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나가라고 했지?”
강성태가 나직하게 경고하자 큼큼거린 조덕진이 빠르게 움직여 병실을 나섰다.
조덕진이 급하게 병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강성태가 시선을 주자 이병렬이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보기 좋은 웃음을 그려냈다.
“어떻게 된 거야?”
“병원으로 오는 길에 샌드위치나 사 갈까 해서 치곤이한테 먼저 전화했었거든. 그때 들었다.”
“팔은?”
“부러졌어.”
“씨발! 멕시코까지 가서 팔이나 부러져 오고!”
거친 말을 뱉은 이병렬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앉자.”
“침대에 누워야 하는 거 아냐?”
“일단 앉아.”
반가워하는 이병렬을 말리지 못해서 강성태는 탁자에 앉았다. 그 직후에 문이 열리고 서달수가 들어왔다.
“야, 재수 없는 커피 치우고 새로 하나 타주라.”
“예, 형님.”
이병렬의 지시를 받은 서달수가 반가운 얼굴로 구석으로 향했다.
“치곤이한테 대강 듣기는 했는데 삼합회가 돈을 걸었다는 말은 뭐야?”
서달수가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강성태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쭉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보스가 돌아왔으니까 다 해결됐지. 다른 건 몰라도 성기 형님이 제대로 부러졌으니까 소문 쫙 돌 테고. 걱정할 게 뭐 있어?”
“너무 태평한 거 아니냐?”
“이 바닥이 그래. 임자가 버티고 있으면 숟가락 올릴 생각을 못 하거든.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태완이 형님이나 한번 찾아가. 그럼 끝나.”
과장한 게 아니라 이병렬은 실제로도 근심을 완전히 덜어낸 얼굴이었다. 게다가 곁에서 지켜보는 서달수는 더할 수 없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거야? 움직이는 게 멀쩡해 보이는데? 멕시코에서 뭐 먹은 거 있어? 몸에 좋은 거면 나도 좀 주라.”
이런 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거 봐? 뭔데 말을 못 해?”
“굳이 말하자면 사랑의 힘이라고 할까?”
“염병!”
이병렬의 대꾸를 들은 서달수가 웃음을 참느라 볼을 부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옆방에 가 봐. 치곤이 놈이 너 무사하길 바라면서 샌드위치를 얼마나 처먹던지, 나는 미친 건 줄 알았다.”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점심 같이 먹을 거지?”
“그러자.”
이병렬에게 대꾸한 강성태는 병실 문을 나섰다.
바깥에 있던 덩치들이 고개를 숙였는데 최치곤은 여전히 김진용과 함께 쓰는 병실 앞에 있었다.
강성태는 최치곤에게 가서 휠체어를 붙들었다.
최치곤이 바퀴를 돌리고, 강성태가 밀어서 둘이 병실에 들어갔다.
부기가 많이 빠졌으나 김진용은 깊은 잠에 빠진 모양으로 움직임이 없었다.
문을 닫은 강성태는 테이블에 놓인 샌드위치 포장지를 보며 픽 웃었다.
“야, 이 도라이야. 저걸 먹는 거랑 내가 무사하게 돌아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내가 저걸 먹은 덕분에 결정적인 순간에도 힘이 났던 거야. 알아?”
“미친놈.”
“몸은 진짜 괜찮은 거냐?”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은?”
“부러졌다는데 일단 2주 정도 묶어두고 경과를 보잔다.”
“의사 선생은 구출했고?”
“병원에 출근했다.”
연락이 없었던 게 서운한 모양으로 최치곤이 입을 삐죽였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했으니까 그렇게 이해해주라. 괜히 말 돌아서 공항에 입국을 알아보는 인간들 나올까 봐 그랬다. 멕시코에서 부상이 심한 환자도 한 명 데려왔고.”
강성태는 키란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병렬이 말대로 조태완 만나보고 하나씩 정리해야지. 너랑 나는 이거 오래 할 생각 없었잖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모가 화가 잔뜩 나셨거든.”
화난 장숙경을 떠올렸는지 최치곤의 목이 쑥 들어갔다.
“절대 나 부르지 않게 말 잘해라.”
“좀 비겁하지 않냐?”
“굳이 함께 죽을 일이 뭐가 있어?”
고개를 가로젓던 최치곤이 강성태를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렇게 돌아왔으니까 됐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 최치곤의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강성태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
조태완은 문도진과 신호남파를 정리한 강성태에게 제대로 눌려서 어설프게 과거의 영광을 찾겠다며 설치다가는 진짜로 죽도 밥도 안 되는 비참한 꼴로 밀려나기 좋았다.
무엇보다 심복에게 칼질당한 게 아팠다.
혹시 다른 조직에 손을 뻗어서 강성태와 이병렬을 밀어낸다고 해도 결국은 밀려나서 수모나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았다.
진짜 답답한 건 김종수와 정영권이었다.
왼팔, 오른팔로 키워볼까 해서 직접 이병렬에게 데려갈 정도로 경고했건만, 주접을 떨다가 밀려나는 바람에 이제는 기댈 언덕이 강성태와 이병렬밖에 없었다.
“병신들!”
“예? 뭐 드려요?”
생각을 정리하던 조태완이 욕을 뱉자 오세아가 얼른 다가왔다.
“아니다.”
짧게 답한 조태완이 불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병실에 오세아가 오면서부터 편한 것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특히, 오세아가 알려지는 게 싫어서 요 며칠은 김정훈과 조철호 변호사를 제외하고는 아예 병실에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할 정도였다.
오세아가 바라는 대로 정말 아이를 가져?
조태완은 구석에 얌전히 앉아 책을 읽는 오세아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는 데도 오세아는 젊은 시절의 청순함을 잃지 않았다.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지금까지 그 흔한 명품 가방이나 시계 등을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런 오세아가 의식을 차린 조태완을 살피다가 처음으로 바라는 일을 말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니?
어쩌면 돈에 매달려 사는 건지도 모른다며 생각했던 조태완의 가슴이 흔들렸었다.
저게 그렇게 좋을까?
머리 쪽을 세운 침대에 기대앉은 조태완은 심오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는 오세아를 보았다.
저런 여자니까 애는 제대로 키우겠다.
조태완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밖에서 씩씩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찾아온다는 연락은 없었다.
안심하고 책을 읽고 있던 오세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문이 열렸고, 강성태가 들어섰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조태완마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잘생긴 외모에 눈빛이 더욱 깊어진 듯 보였다.
거기에 왼팔에 플라스틱 깁스를 해서 목 끝에 걸었는데 강성태의 강인함을 돋보이게 하는 느낌이었다. 조태완이 그랬으면 더할 수 없이 험상궂게 보일 모습이 말이다.
오세아를 본 강성태는 짧게 고개를 숙인 뒤에 바로 침대로 다가왔다.
강성태를 보며 당황하는 오세아를 보자 조태완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불이 확 올라왔다.
“나쁜 새끼.”
강성태가 이해하지 못할 욕을 뱉은 조태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사해. 안사람이다.”
“강성태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고문님과 잠시 의논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강성태의 요구를 받은 오세아가 고개를 숙인 뒤에 옆 방으로 움직였다.
시선을 돌린 강성태를 보며 조태완은 감정이 복잡했다.
오세아와 인사를 나눈 강성태의 눈에서 한 조각의 사심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세아가 뭐가 부족해서?
조태완은 엉뚱한 불만이 불쑥 솟았다.
그러는 사이, 강성태가 침대 발 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팔은 또 뭐고?”
“서성기라고 아십니까?”
“서성기? 아!”
잠시 갸웃했던 조태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지병원에서 잠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
오른손을 들어 보이는 강성태를 조태완은 기가 막힌 눈으로 보았다.
“아래쪽이 시끌시끌하겠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광룡을 아예 쓸어낼까 합니다.”
“젠장할. 적당히 좀 하면 안 되냐?”
“거기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뭔가 의미가 담긴 느낌이어서 조태완은 잠시 입을 다물고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과 다르게 조태완을 어른으로 대접해주고 있었다.
“앉아.”
조태완이 침대 옆 의자를 권했고, 강성태가 앉았다.
“조직이라는 게 옛날하고 달라. 업소 돌아다니며 삥 뜯는 건 양아치, 우리처럼 업장 가지고 일하면 조직이 된다. 문도진이 카지노를 손에 쥔 것도 그렇고. 막말로 신호남파가 없었으면 우리나라 카지노에 일본, 중국 조직원이 득시글댔을 거다.”
강성태는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
“광룡을 정리하고 병렬이한테 전부 맡길 생각입니다.”
다시 던진 조태완의 질문에 강성태가 답을 내놓았다.
“광룡을 제대로 밀어내서 다시는 병렬이에게 대들지 못하게 하겠다?”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습니까?”
“광룡의 뒤에 삼합회가 있는 건 알지? 그놈들이 쉽게 물러날까?”
조태완의 질문을 받은 강성태가 옅게 웃었다.
삼합회든 뭐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였는데 조태완은 그 순간에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엉뚱한 결심을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너 같은 아들 하나 있었으면 싶어서.”
강성태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싶었을까?
오세아의 미모에 조태완의 성격이라면 가능하겠다.
반대면 진짜 피곤한데?
조태완의 심오한 표정을 강성태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