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 - 4화 (174/513)

9권 - 4화

세상 전체와 맞설 만큼 강한 등과 어깨를 지녔던 아버지가 따귀와 심한 욕설, 이어 얼굴에 침까지 맞고도 어쩌지 못하는 장면은 열여섯 살 맹인선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숙소, 의상, 로드 매니저, 연습실 사용료! 이 씨발 죽어라 키워놨더니 갑자기 돈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거 같아? 그동안 먹고, 자고, 연습한 거 세 배로 물어내!”

토끼나 당나귀도 아니고, 먹은 건 고구마, 감자, 배추가 거의 전부였고, 의상비는 그 흔한 스포츠 브랜드도 아닌 시장통 트레이닝복이 전부였다.

숙소는 옥탑방, 다 썩어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승합차를 타고 시골 장터 축제, 고구마 축제, 감자 축제를 돌아다녔다.

출연료는 고사하고 무대 경험을 쌓는다는 명분에 기름값을 대주었고, 명절이면 따로 5만 원씩 모아서 로드 매니저에게 건네기도 했었다.

강원도 어딘가에서 열린 감자 축제에서 감자를 다섯 자루 얻었는데 그중 하나를 숙소로 가져온 게 그나마 출연하고 받은 전부였다.

호남 어디 장터에서 엿 파는 아줌마가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럽다며 가는 길에 먹으라고 엿가락 준 것도 있기는 한데 그건 출연과 전혀 관계없는 수입이었다.

“배고파.”

옥탑방에 둘러앉은 다섯 명은 번갈아가며 먹고 싶은 걸 말했다.

유리창 아래 놓은 건조대에는 속옷이 줄줄이 널렸고, 한쪽 구석에는 이불과 요가 높다랗게 올라가 있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에 밥 말아서 먹고 싶어. 두부 올리고, 콩장, 양념깻잎….”

맹인선과 나이가 같은 서설희가 말을 하다 말고 군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고생하다가 성공한 케이스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전 세계를 비행기로 돌며 공연하고, 인터넷 조회수는 수백만 조회수를 찍으며, 그 대가로 수십억, 수백억을 버는 상상으로 견뎠다.

그러나 고생한 뒤에 성공이 아니라 어쩌면 빠져나가기 힘든 늪에 빠진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다섯 멤버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맹인선의 일은 그만큼 멤버들에게도 충격이었다.

“가고 싶으면 가! 대신 민사, 형사로 똘똘 말아서 아예 집안을 주저앉혀 줄 테니까 그건 알고 가! 이래서 씨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는 건데, 잘해주면 꼭 이 지랄들을 해!”

아이커 대표 최근식이 데려온 전무와 이름도 모르는 깡패가 버럭버럭 고함을 지를 때 맹인선은 아예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녁으로 고구마 먹을까?”

서설희가 저녁을 챙길 때였다.

옥탑방으로 올라오는 철계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언니? 우리 또 노래방 가나 봐.”

서설희가 몸서리를 치며 문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삐걱대며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인선아! 맹인선!”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맹인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벌떡 일어서기는 했는데 코를 틀어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고, 심장이 터질 듯 뛰어서 어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옷 갈아입어. 얼른!”

최근식은 전에 없이 다급한 모습이었다.

“너 혹시 강성…. 아니다. 일단 옷 갈아입고 나와. 왜 그러고 섰어? 어디 아픈 데 있어?”

“저만 가요?”

“너 뭔가 오해하나 본데 그런 게 아니라 아버님 일로 만나자는 분이 계셔서 그분 뵈러 갈 거야.”

“사장님! 저 집에 안 가기로 했잖아요! 잘못했어요!”

혹시 또 아버지에게 패악을 부릴까 봐 겁이 덜컥만 맹인선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비는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아버님이 연락한 분이 있어서 만나러 가는 거니까…. 이럴 시간 없다. 그냥 좀 가자.”

이전 같으면 벌써 고함을 지르고 남았을 최근식이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끙끙대며 맹인선을 얼렀다.

“궁금하면 아버님께 전화해 봐. 얼른. 누구 만나기로 했는지 알아보고 출발하면 더 좋잖아? 응?”

오히려 최근식이 통화를 원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아는 분인지 알고 가면 너도 마음 편하겠다!”

최근식이 대놓고 권하는 바람에 맹인선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고서 픽 웃었다.

김민재가 긴장한 얼굴에 간절함을 더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 최근식이 말이야. 말했던 꼬마애 데리고 당장 서라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진용이 또래라 소개받은 적이 있거든. 그 정도로 양아치 새끼인 줄은 몰랐지. 혹시 몰라서 옛날 동재 숙소 애들 병원으로 먼저 보냈으니까 그렇게 알아.

“뭘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

- 여보세요? 보스님? 싫든 좋든 신강남파 보스쯤 되면 뽀대 좀 챙겨주라. 그래야 나나 진용이, 달수, 치곤이, 정훈이가 다른 데 가서 힘을 써.

“일 만들어서 미안하다.”

- 지랄! 정 미안하면 내일 와서 육개장이나 같이 먹어.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한 가지만 들어줘. 생활했거나 하는 놈들 상대할 때는 겸손한 거 버려. 보스가 고개 숙이면 진용이나 달수, 치곤이는 엎드려야 하는 게 이 바닥이다.

“알았어. 내일 봐.”

- 들어가십시오, 보스!

이병렬의 장난기 가득한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괜히 너 곤란하게 만든 거야?”

통화 중간에 강성태가 했던 미안하다는 말을 오해했는지 김민재가 풀죽은 음성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다른 말 하다가 나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 맹인선이라는 막냇동생을 최근식이라는 대표가 직접 데리고 이리 온단다.”

“뭐? 이리? 직접?”

연달아 나오는 질문과 김민재의 표정이 웃겼다.

“진짜 오는 거야? 혹시 막내 애한테 해코지하는 건 아니겠지?”

“보면 알지.”

강성태가 일회용 컵을 들어 반쯤 식은 커피를 마셨을 때였다.

누바누바 예! 누바누바 누바예!

익숙한 멜로디가 김민재의 스마트폰에서 울렸다.

“어? 요선 씨다. 잠깐만. 여보세요?”

강성태를 돌아본 김민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강성태. 그렇게 알려주면 돼요. 여기 신월동에서 인공폭포 넘어가는 데 있는 서라대학병원이거든요. 이쪽으로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예? 잠시만요.”

스마트폰을 내린 김민재가 손으로 소리를 가렸다.

“여기 와도 되냐고 묻는데? 어떻게 하지?”

“민재야.”

“부담스럽지? 미안해.”

“그게 아니라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대신 병원에 모이는 건 그러니까 건너편에 고수부지 내려가는 도로 있거든. 그리 오라고 해.”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김민재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오세요. 예. 서라대학병원 맞은편에 보면 고수부지 내려가는 길이 있거든요. 그리 내려와서 전화하세요. 그 앞쪽 벤치에 있을게요. 예.”

통화를 마친 김민재가 흥분과 기대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번에는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형님? 광준이 형님 아래 유섭우입니다,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언젠가 커피알리고에 와서 눈치 없이 인사했던 유섭우였다.

“무슨 일이야?”

- 신월동 넘어왔다가 형님. 숙소에 일 생겼다는 말 듣고 전화 드렸습니다, 형님. 광준이 형님 지시로 강서구 숙소 동생들 전부 나섰고, 형님. 대림동 종환이가 애들 데리고 건너오고 있습니다, 형님.

뭐야? 왜 일이 이렇게 커져?

별것도 아닌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에 강성태는 신음처럼 숨을 뱉었다.

- 급하게 출발한 동생들이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는데 어디로 가라고 하면 됩니까, 형님?

“그러지 말고 병원 맞은편에 고수부지 내려가는 길 있거든. 일단 그리로 와. 절대 병원으로 가지 말고.”

- 예, 형님. 저는 5분이면 도착합니다, 형님. 그때 뵙겠습니다, 형님.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이종환입니다,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너는 어디야?”

- 대림동이라 길이 막혀서 조금 늦습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형님.

상황이 느닷없이 달려나가는 게 갑갑해서 던진 질문인데 이종환은 그걸 늦었다는 질책으로 잘못 해석한 느낌이었다.

- 일단 제가 스물다섯 명 데리고 가고, 형님, 지금 서른다섯 명 정도가 대림동에서 막 출발했습니다, 형님.

김민재가 신월동 숙소, 강서구 숙소, 대림동 덩치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거기에 처음 만나는 맹요선의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떠올리자 강성태는 한숨이 푹 나왔다.

어쩐지 이병렬이 말끝을 길게 늘이더니 이 정도는 그냥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

맹인선이 언니와 통화한 다음이었다.

“강성태란 분께 부탁했대요. 잘못한 거예요? 죄송해요.”

“아냐, 아냐! 아니야! 저얼-대 잘못한 거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옷 갈아입어.”

놀라는 맹인선을 최근식이 달랠 때였다.

쉣킷. 쉣킷. 투나잇 쉣킷.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최근식입니다, 형님.”

- 너 이 개새끼!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이 씨발 놈아!

“예? 형님?”

- 무슨 짓을 했길래 강서구, 대림동, 신월동 숙소 애들이 너 잡는다고 전부 날뛰냐고? 너, 이 씨발 새끼! 신강남파 강성태 건드렸어? 죽고 싶었어? 그럼 그냥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왜 씨발 놈아, 강성태 라인을 건드려?

“그게 아니고, 형님!”

- 대전 조덕진이 어떻게 됐는지 말 못 들었어? 아래쪽 선배들이 전부 고개 숙였다고, 이 씨발 놈아! 너 지금 어디야?

“성태 형님 뵙기로 해서 신월동으로 가려는 길입니다, 형님.”

최근식의 대꾸가 있기 무섭게 저쪽에서 뜨끈하게 느껴지는 숨소리가 팍 건너왔다.

- 신강남파가 말이다. 클럽부터 나이트, 룸살롱, 하다못해 단란주점까지 꽉 쥐었다. 거기에 카지노도 관리해. 거기 보스가 강성태…, 형님이고. 알지?

“예, 형님.”

- 거기에 찍히면 너랑 내가 어떻게 되겠냐?

“죄송합니다, 형님.”

- 그냥 씨발 우리는 뒈진 거야! 캑! 이해돼? 캑!

“지금 뵈러 가니까 가서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형님.”

- 후!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냐? 아무래도 내가 가는 게 맞지 싶다.

“서라대학병원입니다, 형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린 최근식은 이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인선아? 왜 아직 옷을 안 갈아입었어?”

“사장님이 계신데 어떻게 갈아입어요?”

“어? 말을 하지, 그럼!”

최근식은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나가다가 문지방에 발을 찧었다. 외발로 껑충거리면서도 그는 흔한 욕 한마디를 내뱉지 않았다.

**

커피를 다 마신 강성태는 김민재와 함께 병원을 향해 걸었고, 신호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내가 치곤이한테 좀 요란하게 해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러니까 덩치들이 많이 모여 있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하지 마.”

“많이 불렀어? 얼마나? 열 명? 스무 명?”

강성태에게 질문을 건네며 걷던 김민재는 고수부지 아래쪽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시커먼 승용차와 승합차가 라이트를 켜고 그득하게 서 있는데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그 좌우로 빽빽하게 서 있었다.

많이도 왔다, 진짜.

입맛을 다신 강성태가 고수부지 아래를 향해 내려설 때 김민재는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이종환을 시작으로 유섭우, 이어서 몰려든 덩치들이 서열대로 파도를 타듯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저쪽에 자리 만들어뒀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이종환의 안내를 받으며 벤치로 향했다.

“이건 좀 심하지 않냐?”

“만나실 분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형님.”

“병렬이가 그랬지?”

“예, 형님.”

벤치 앞으로 캠핑용 나무 탁자에 거창한 의자까지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기라도 구워 먹으려고 모였나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도 속속 승용차와 승합차가 들어섰고, 차에서 내린 덩치들이 멀찍이서 강성태를 향해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백 명을 넘어선 느낌이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형님?”

“좀 전에 마셨어.”

“예, 형님.”

이종환과 유섭우는 아예 강성태의 좌우 뒤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쥐고 서 있었다.

김민재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필 때였다.

연식이 좀 돼 보이는 회색 승용차가 아래로 내려왔다가 펼쳐진 광경에 놀란 듯 멈췄다.

누바누바 예! 누바누바 누바예!

경쾌한 노래를 터트리는 스마트폰을 급하게 꺼낸 김민재가 목을 움츠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예! 맞아요! 회색 차죠? 예. 그쪽으로 그냥 세우세요.”

김민재의 통화를 들은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가서 인사드리고 모셔오는 게 맞지.”

왼팔을 목에 건 강성태가 먼저 걸었고, 김민재와 이종환, 유섭우가 함께 움직였다.

풀숲에 고개를 처박은 꿩처럼 구석에 선 회색 차에서 중년 부부와 딸로 보이는 회사원, 여대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가 내렸다.

김민재를 본 회사원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는데 중년 부부와 여학생의 반응도 비슷했다.

“안녕하세요?”

김민재가 공손하게 인사를 먼저 건넸다.

“민재 씨. 우리 부모님이세요. 아빠, 엄마. 말씀드렸던 김민재 씨예요. 진선아. 인사드려. 민재 씨.”

“안녕하세요? 언니 동생 진선이에요.”

“처음 보는데 이렇게 신세 지게 돼서 미안합니다. 부모가 되니까 이렇게라도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요선 씨가 워낙 걱정하길래 도움 줄 수 있을까 해서 나섰을 뿐입니다. 인사하세요. 사촌인 강성태라고 합니다. 이모 아들입니다.”

강성태는 맹진섭과 부인, 그의 딸 맹요선, 맹진선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이쪽으로 온다고 했거든요. 저쪽에서 잠시 기다리시죠.”

“예.”

뒤를 버티고 선 이종환과 유섭우, 주변을 둘러싼 덩치들에게 기죽은 맹가네 식구들이 조심스럽게 강성태를 따랐다.

일행이 벤치 앞에 설치한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였다.

검은 승용차가 고수부지로 내려와서는 바로 뒷문이 열렸다.

“어?”

맹진섭과 부인 가족들이 줄줄이 고개를 돌리는 저 너머에서 맹인선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내렸다.

“인선아!”

함께 내린 덩치의 눈치를 살피던 맹인선이 허락을 받았는지 빠르게 달려왔다.

“아빠! 엄마!”

맹인선이 맹진섭과 부인의 품에 안긴 뒤였다.

고개를 떨군 채 다가온 덩치가 강성태를 향해 깊게 상체를 숙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최근식입니다, 형님.”

맹인선의 부친 맹진섭과 가족들이 당황하고 두려운 얼굴로 그와 강성태를 번갈아 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