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 12화
가식적으로 보이는 방문이고, 달리 보면 힘을 과시하는 모양새였다.
이런 유치한 행동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던 강성태는 자부심 넘치는 정소국의 표정과 뒤에 늘어선 덩치들의 감격한 표정을 보며 나오는 한숨을 지그시 삼켰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병렬과 김정훈은 별 네 개를 어깨에 달아준 것처럼 잔뜩 힘을 얻은 태도였다.
“술을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그건 다음에 하자. 옆방에 보도국장 와 있지? 아니꼽더라도 뒷일을 생각해서 챙기는 거니까 여기 정훈이 대하듯 고개 숙여. 이런 부탁하는 거 미안하다.”
이병렬이 절대 보이지 말라는 모습이었다.
거만하게 행동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그렇더라도 강성태는 솔직한 심정에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직후였다.
정소국은 심장에서 다이렉트로 올라온 감동이 눈에서 콸콸 쏟아지는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거렸다.
설마 우는 건 아니지?
“세종이 형님이 구두를 핥으라면 핥고, 바닥을 기라면 기겠습니다. 형님. 형님께서 절대 염려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실 테니 안심하십시오, 형님.”
구두를 핥을 필요까지는 없는데?
정소국이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트와일라잇 간부들이 또 줄줄이 몸을 숙였다.
“그럼 너 믿고 간다.”
“예, 형님.”
강성태가 움직이자 이병렬과 김정훈, 서달수가 뒤따랐다.
오냐.
이왕 어깨에 별 달아주는 거, 원하는 대로 시원하게 해주마.
“정훈이는 오늘 같이 움직이자?”
“모시겠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고개를 돌려 편안하게 대하자 볼을 씰룩인 김정훈이 이병렬의 뒤에서 움직였다.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독일제 차와 명품 옷으로 대신한다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깡패들은 이런 순간에 채우는 모양이었다.
강성태가 움직이자 이병렬과 김정훈, 서달수, 정소국 일행이 줄줄이 따랐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홀을 지키던 가드들과 웨이터들까지 달려와 입구에 줄줄이 늘어서서 손님들의 시선을 당겼다.
가드들과 웨이터가 보고 있으니까, 팬서비스 한 번 더.
강성태는 몸을 돌려 정소국을 불렀다.
그가 빠르게 앞으로 다가온 다음이었다.
“너는 오늘부터 진짜 내 새끼다. 여기 병렬이와 정훈이만 따라. 여기 두 사람 지시로 움직이다가 문제 생긴 거면 아무리 선배와 붙은 거라도 내가 뭐든 감당해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숙이고 난 정소국의 어깨를 두드려 준 강성태는 그 길로 트와일라잇을 나섰다.
바깥의 어둠과 찬 공기를 느끼자 온몸에 올라와 있던 닭살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정훈이는 차 있어?”
“뒤따르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서달수가 운전하는 차의 뒤에 올랐다.
서달수가 차를 출발하자 줄지어 있던 정소국과 간부들, 가드들이 순서에 맞춰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후-.”
차가 도로에 들어서자 강성태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 보스는 가만 보면 타고났어. 별거 아닌 말을 하는데도 카리스마가 그냥 철철 넘쳐.”
이병렬이 전에 없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이 짓을 두 번을 더 해야 한다는 거 아냐?”
“무슨 서운한 소리를 그렇게 해?”
“클럽이 세 개 아냐? 이제 두 개 남았잖아?”
“카지노가 두 개 있습니다, 보스. 거기에 강남만 돌고 가면 신월동하고 강서구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무슨 어린애들도 아니고 서운한 게 왜 이렇게 많아?”
강성태의 반문에 이병렬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웃었다.
“그러지 말고 정훈이 데리고 나선 김에 신월동하고 강서구까지 마저 돌자. 그래야 신강남파에서 정훈이 입지가 제대로 산다. 대신 대림동 종환이는 신월동 나이트로 부를 테니까 거기에서 해결해.”
이왕 시작한 일이었다.
하루에 끝내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트와일라잇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완벽하지!”
더없이 만족한 듯 이병렬이 손날로 허공을 가르며 답을 내놓았다.
와일드문과 파이어볼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특히, 파이어볼에서는 정영권이 튀어나왔는데 강성태는 김정훈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영권. 정훈이가 말하는 게 내가 지시하는 거다. 토 달지 말고 확실하게 따라.”
“알겠습니다, 형님.”
“너 믿어도 되지?”
“맡겨주십시오, 형님.”
입구에서 한 번 더 토닥여주자 정영권 역시 감동한 얼굴로 몸을 숙였다.
카지노는 클럽과 달랐다.
게임룸을 감시하는 관리실 안쪽 방에서 인사받은 강성태는 그곳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과거 문도진이 이끌던 신호남파 덩치들은 따로 손을 잡아주었고, 함께 가자는 말로 어깨도 다독였다.
카지노까지 모두 돌고 다시 차에 올랐을 때는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신월동으로 향하는 길에서 강성태는 좌석에 몸을 기댔다.
차라리 칼을 들고 싸우고 말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곤했다.
창을 보던 강성태는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처음과 달리 이병렬 역시 많이 힘겨운 눈빛과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보스가 이런 식으로 다져놓으면 모사치는 놈들이 줄고, 기웃대던 놈들도 고개를 떨궈. 다 돌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보스와 함께 돌아야지. 그게 진용이와 달수를 지키는 일이니까.”
“쉽지 않다.”
“어디나 대가리는 쉽지 않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병렬이 배의 상처가 울리는지 왼손을 가만히 얹었다.
“진짜 잘해주고 있어. 조금만 더 고생하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이병렬이 저렇게 나서는데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치곤이 이 새끼는 뭐 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이병렬이 고개만 돌려 강성태의 시선을 당겼다.
“그 새끼 혹시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이건 또 뭔 소리지?
이은주의 일이 걸려서 강성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원에 있을 때, 슬쩍 넘겨봤는데 데이트 코스나 VIP 영화관을 검색하고 자빠졌더라고. 눈 찢어진 곰 같이 생긴 새끼가 영화관에 들어가면 강도로 보이지 분위기가 살겠어?”
강성태는 흐느끼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치곤이는 어디에 가야 여자 마음을 잡냐?”
“그 새끼는 틀렸어. 여자가 잠시만 마음이 기운 것 같다 싶으면 바로 입술 들이댈 놈이 무슨?”
진짜 그 짓을 할까?
오후에는 절대 안 한다고 했었는데?
강성태의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벽에 붙이고 키스를 퍼붓네, 마네 하던데 요즘 세상에 그런 짓 했다가는 바로 유치장에 간다고 말해줬는데도 어쩐지 사고 칠 거 같더라. 에효, 애새끼. 괜히 면회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병렬의 경고를 들은 게 있어서 강성태에게는 속과 다른 말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창으로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불현듯 이은주가 염려됐다.
전화를 해볼까?
“그건 그렇고 아까 카지노에서 말이야. 애들 감동하는 얼굴 볼 만하더라.”
고민하는 강성태에게 이병렬의 감탄이 들렸다.
아무래도 이병렬과 서달수가 있어서 자칫 통화를 잘못하면 최치곤만 진짜 개새끼가 되기 좋았다.
믿는다, 최치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
최치곤은 청소가 끝난 카페의 주차장에서 택시 기사 박용진을 만났다.
“박용진입니다.”
주차장에 택시를 세운 박용진은 부동산 사장의 말대로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다.
“최치곤입니다.”
“예. 부동산 사장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최치곤은 간판과 실내조명을 반쯤 끈 커피알리고의 문 쪽 테이블로 박용진을 이끌었다.
이은주는 계산을 마감하느라 홀 안에서 현금을 맞추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다시 한 번 말해 보세요.”
“그게요. 일 마치고 새벽에 집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저는 심야에 일을 안 해서 새벽 1시나 2시쯤 들어가거든요. 집 앞에 도착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쇠파이프 짧은 거, 요만한 거요. 그걸 휘두르지 뭡니까?”
양손을 50센티미터쯤 벌려 보인 박용진이 고개를 돌려 뒤통수를 보여주었다.
“마침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도망갔는데 그 뒤로도 두 번인가 집 앞에 이상한 남자가 있어서 라이트 켜고 안식구랑 딸이 나와서 요란 떠니까 사라지곤 했습니다.”
고개를 삐딱하게 튼 최치곤은 60쯤 돼 보이는 박용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우리끼리는 솔직하게 말씀합시다. 돈 빌려 쓴 거 있으셔?”
“없습니다. 개인택시 하면서 풍족하게는 못 살아도 다른 사람 돈 빌리지는 않았습니다. 집도 예전에 대출 껴서 27평짜리 단독 사기는 했는데 그것도 다 갚았습니다.”
“후우-.”
최치곤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원하는 게 숨어서 지켜봐 달라, 그거죠?”
“부탁드립니다, 최 선생님.”
이은주를 슬쩍 바라본 최치곤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주소 알려주고 약도 좀 주세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몇 시에 끝나요?”
“새벽 1시에 들어갑니다.”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최치곤이 주문대를 향해 움직였다.
“은주. 메모지하고 볼펜 좀 주라.”
테이블로 돌아온 최치곤은 박용진에게서 주소와 약도를 받았다.
“혹시 모르니까 전화번호도 주셔. 내 것도 입력하시고. 12시 40분쯤 통화하시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번호를 입력한 박용진이 반쯤 안도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기, 혹시 강북 가는 손님 모시게 되면 이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늦을 수 있습니다.”
“알았으니까 전화하세요.”
최치곤에게 양해를 구한 박용진이 이은주에게도 고개를 숙인 뒤에 카페를 나섰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계산을 마친 이은주가 마지막으로 최치곤이 앉았던 테이블을 닦기 위해 행주를 들고 다가왔다.
“개인택시 기사인데 누가 덮쳐서 뒤통수를 갈겼다는 거야. 원한 살 일도 없는 데다 돈 빌린 것도 없다는데 뭔지 모르겠네.”
테이블을 닦는 이은주를 피해 최치곤이 몸을 일으킨 뒤였다.
“어머? 여기 우리 집 앞이네요?”
왼손으로 메모지를 들었던 이은주가 신기한 눈으로 주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맞아요. 빌라 옆으로 단독 주택 있는 곳이에요. 옛날 복개천 쪽이요.”
“잘됐다. 어차피 거기에서 12시 40분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같이 가자.”
“지금이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차에서 기다리지 뭐. 잠깐 기다려. 차 가져올게.”
이은주가 답을 하기도 전에 최치곤은 급하게 카페를 뛰쳐나갔다.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최치곤을 이은주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먼저 강서구의 나이트를 방문했던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신월동 나이트에 도착했다.
부킹에 성공한 손님들이 삼삼오오 나가고, 자정을 기준으로 손님들의 연령대가 바뀌는 터라 입구는 몹시 혼잡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강성태의 외모에 덩치들이 깊게 고개 숙이며 따르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달려왔다.
홀 안은 클럽과 다른 의미의 열기로 가득했다.
무대 위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가수가 열정적으로 몸을 흔드는 가운데 웨이터들은 여자 손님들의 손을 붙들고 움직이느라 바빴다.
사무실에 들어선 이병렬은 먼저 대림동 이종환과 나이트 간부들에게 김정훈을 소개했다.
“이제 한 식구다. 도움 청하면 고개 돌리는 일 없도록 해.”
20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정훈이하고 종환이는 먼저 일어나.”
이병렬이 두 사람에게 먼저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만족한 얼굴로 김정훈이 고개를 숙였고, 이렇게 불러주는 것이 기쁘다는 듯 이종환이 인사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진짜 길었던 하루가 끝난 느낌이었다.
“아, 씨발. 졸라 힘들었네.”
소파의 왼편에 앉았던 이병렬이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는 뒤로 넘겼다.
강성태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천장을 향해 숨을 길게 내쉰 이병렬이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야식 먹을래?”
“병원으로 가. 가서 상처 확인해.”
강성태의 권유에 이병렬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버티는 건 무리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오늘 진짜 고생 많았다. 보스가 하루 애써 준 덕분에 한시름 놨다.”
“얼른 좀 나아서 퇴원해. 이런 거 더는 못 하겠다.”
그렇게 일어난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나이트를 빠져나왔다.
걷고 싶었다.
“혼자 그렇게 다니면 위험하다고. 삼합회도 그렇고, 신강남파 보스라면 어떤 이유에서도 노리는 놈들이 있다니까.”
그러나 이병렬은 그런 강성태를 그냥 두지 않았다.
나이트의 입구에서 끝내 강성태를 차에 태운 이병렬은 결국 빌라로 향했다.
그렇게 강성태는 빌라에 도착했다.
“됐지? 병원으로 가.”
“내가 다른 데 갈 곳이 어디 있어?”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선 이병렬이 차에 탔고, 깊게 고개를 숙인 서달수가 운전석에 올랐다.
승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간 걸 확인한 강성태가 빌라로 향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강성태는 먼저 액정을 확인했다.
사고 쳤냐? 진짜?
최치곤의 이름을 확인한 강성태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