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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 2화 (192/513)

10권 - 2화

어쩌면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광경이었다.

피부색을 제외하면 같은 마스크를 쓴 듯한 아들을 부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강성태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어릴 적 기억하는 아버지와 함께 밥 한 끼 먹으면서 잘 지내냐, 미안하다, 그 몇 마디를 듣고 싶었던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추해 보이는 봉투를 내밀었다.

“씨발….”

이병렬이 기가 찬 얼굴로 웃을 때였다.

“이승현 씨.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여기 아르윈이 아들이 아닙니까?”

강성태는 나직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승현은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아르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원망이었다.

무슨 이유로 아들에게 저런 눈빛을 할까?

침묵의 끝에서 이승현은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협박으로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참은 겁니다.”

외국계 회사의 임원이라 그런지, 이승현은 주눅 드는 상황에서도 당당했고, 불쾌함 또한 감추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일이었고요.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그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내가 낳아달라고 했습니까?”

내내 침묵하던 아르윈이 울분 가득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들었습니다. 의심하셨던 일,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압니다.”

“네가 뭘 알아?”

“필리핀 생활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많이 압니다.”

아르윈의 말대꾸가 마뜩찮은지 이승현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한국에서도 그러실 겁니까? 지금 만든 가정이 마음에 안 들면 또 부인과 딸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십니까?”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괘씸한 눈으로 노려보기는 했으나 이승현은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승현 씨.”

몸을 돌리려던 이승현을 강성태가 붙들었다.

“봉투 가져가세요.”

“아닙니다. 이걸 두고 갈 테니 다시는 이런 불쾌한 만남이 없었으면 합니다. 혹시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는 법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참 치졸하게 세상을 산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봉투는 가져가세요.”

“이건 그냥…….”

“아, 씨발! 가져가라면 그냥 가져가! 아니면 진짜 한번 해보든가. 신고? 신고해. 내가 이 봉투 들고 집에 가서 당신 마누라와 애 보는 앞에서 돌려줄 테니까. 한번 해보자. 누가 개망신당하는지.”

법이나 도덕이 먼 곳에 있을 때 먹히는 건 정말 주먹밖에 없을까?

이병렬이 거칠게 나서자 뻣뻣하던 이승현도 눈을 내리깔았다.

“가지고 가세요.”

강성태가 차갑게 권하자 그제야 이승현이 봉투를 들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닫은 뒤였다.

쓴 입맛을 다신 이병렬이 고개를 돌렸다.

“달수야! 육개장 네 개 시켜. 졸라 맵게 해달라고 그래.”

“예, 형님.”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정말 괜찮은 주문이지 싶었다.

“앉아.”

이병렬이 자리를 권하자 아르윈이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

“묻기 미안한데 어머니와 안 좋은 일은 뭐냐?”

“나중에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병렬의 질문에 아침 드라마 분위기가 가득한 아르윈의 답이 있었다.

“철들고서 들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관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추궁하자 어머니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출국했던 거 같습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뭐라 해도 당시와 지금의 이승현이 비겁한 모습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내일부터 그동안 뺏었던 돈 전부 돌려줘. 대신 그걸 네가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하게 해.”

“누구?”

강성태의 지시에 이병렬이 꼬리를 물었다.

“달수나 치곤이면 적당하지 않아?”

입술을 내민 이병렬이 그럴듯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그는 아르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병원비도 부담해. 부족한 돈이 있으면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 알았어?”

“예, 형님.”

“내일 동생들 중 윗대라기 몇 놈 데리고 와서 신월동하고 정훈이네 숙소 애들까지 전부 인사하고.”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숙인 아르윈이 뭔가 아쉬운 얼굴로 이병렬을 바라보았다.

“뭔데? 뭐가 있어?”

“죄송한데 형님. 제가 데리고 있는 밴드나 가수들 출연할 곳이 좀 없겠습니까? 업소 출연시키면 자꾸 성매매를 강요하는 데다, 업소 사장이나 관리하는 조직원들이 손대는 바람에 트러블이 많았습니다.”

“필리핀에서 온 애들?”

“그렇습니다, 형님.”

아르윈의 말을 들은 이병렬이 히죽 웃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아주 적당한 분을 알지.”

“예? 형님?”

“밥 먹어. 먹고 나서 나랑 신월동 거쳐 강서구로 넘어가자. 대신 오디션 봐서 수준 안 되면 그건 다른 말 하지 마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형님.”

가수들 레벨에 자신 있다는 투로 아르윈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주문한 육개장이 들어왔다.

**

스마트폰을 내린 원자춘은 만족한 얼굴로 앞쪽의 긴 탁자에 앉은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다음 주 화요일로 정했다. 하루 전에는 출발해야 하니까 다들 철저히 준비해.”

지시를 내린 원자춘은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홍콩의 조주방은?”

“다섯 명을 파견하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원자춘이 탁자에 양팔을 올리고는 깍지를 낀 채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다. 합의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조태완과 강성태, 이병렬을 제거할 수 있다.”

잠시 말을 끊은 원자춘은 독기 있는 눈으로 다시금 좌우를 돌아보았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 한동안 우리의 힘이 줄어들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는 대신 조주방이나 광룡이 활동할 힘을 얻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1, 2년 지나면 잠잠해질 테고, 그때 한국은 다시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다.”

좌우에 앉은 수하들이 독한 눈빛으로 원자춘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이다. 우리 바닥이 아니라 제약이 많다. 또한, 강성태란 인간이 만만치 않다. 반대로 강성태만 제거한다면 조태완이나 이병렬은 그다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1순위는 강성태, 2순위 이병렬, 3순위 조태완이다.”

내용을 모두 전한 원자춘이 숨을 내쉬며 상체를 들었다.

“땅은 좁지만, 한국은 우리에게 꽤 큰 시장이다.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어설픈 짓으로 이번 기회를 망치는 놈이 있다면…….”

말을 멈춘 원자춘이 잔인한 눈매로 수하를 돌아보았다.

**

이병렬, 서달수, 아르윈과 함께 신월동으로 넘어온 강성태는 세 사람과 헤어져 카페로 향했다.

저녁 8시쯤이어서 바쁜 시간의 끝물이었다.

카페로 들어선 강성태는 눈과 턱에 피곤함을 잔뜩 달고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최치곤을 가장 먼저 보았다.

“오셨어요?”

“많이 힘들었죠?”

“도와주셔서 진짜 쉽게 넘어갔어요.”

이은주와 인사를 마친 강성태는 낯익은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왔냐? 저녁은?”

“먹었어. 너는 어떻게 했냐?”

“김밥 먹었다.”

최치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강성태는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카페의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서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조태완의 이름이 올라온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여보세요?”

- 중국 삼합회와 다음 주 화요일로 시간을 일단 정했는데 확정 통보는 보스의 결정을 듣고 하기로 했다. 어떻게 할까?

“나쁘지 않습니다.”

- 그럼 다음 주 화요일로 확정하지. 내일이라도 만나서 의논해야 할 텐데 쉽게 보면 안 돼. 저 인간들은 뱃속이 시커먼 부류라 보스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해. 내일 시간 되나?

“오후에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 내일 보자고.

무거운 음성으로 내일을 기약한 조태완이 통화를 마쳤다.

강서구의 나이트를 들르고 나면 연락할 테니까 이병렬에게는 그때 이야기를 전하면 되겠다.

앞치마까지 두른 강성태는 다용도실을 나섰다.

이성안은 싱크대를 정리하느라 바빴고, 이은주는 계산대에서 주문을 받았으며, 최치곤은 아메리카노를 만드느라 집중하고 있었다.

저렇게 이은주가 좋을까?

한편으로는 카페 알리고 티에 앞치마 두르고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최치곤의 모습을 아버지 최재섭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치곤아. 내일도 나와?”

“나와야지.”

“나 마실 커피 하나만 만들어주라.”

“기대해.”

최치곤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다시 다용도실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최재섭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아버지. 저 성태예요. 저녁 드셨어요?”

- 속이 좋지 않아서 대강 때웠다. 무슨 일이냐? 이놈 새끼가 또 사고 쳤냐?

“그러게요. 아버지. 치곤이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 같아요.”

- 뭔데? 또 무슨 일이라니?

놀라는 최재섭에게 강성태는 커피알리고의 상황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 진짜, 진짜로 치곤이 그놈이 커피를 만들어? 종일? 내일도 일하고?

“예, 아버지.”

- 하이고. 이제 나는 더 바라는 거 없다. 나는 정말 바라는 거 없어. 고맙다, 성태야. 내가, 내가 너한테 큰절이라도 하마.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내일 오셔서 치곤이가 만드는 커피 한 잔 드세요.”

- 가야지! 내가 바로 가마. 점심나절에 가면 되겠냐?

“그러세요. 대신 치곤이한테는 말하지 않을게요.”

- 오냐. 내일 보자.

기분 좋은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흐뭇한 심정으로 다용도실을 나섰다.

“어쩌면 딱 맞춰 나오냐? 여기.”

커피 머신 앞에 있던 최치곤이 강성태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아메리카노는 정말이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만들면 그만큼 향과 풍미가 깊고, 크레마가 분명하게 떠오르는 점이 달랐다.

아쉽기는 하지만, 최치곤이 만든 아메리카노는 합격점이었다.

강성태는 머그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맛있다.”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치곤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웃었다.

“저 화장실 좀 둘러보고 올게요.”

강성태까지 오자 이은주가 청소 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너, 왼팔 다쳤지?”

“뭐?”

“왼팔 다쳤잖아.”

이 인간이 이제 이모 장숙경이나 김민정처럼 강성태를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겼나?

“너는 원래 커피 왼손으로 마셔. 그런데 오른손으로 마시면서 왼팔을 빼고 있잖아. 그거 보고 알았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설명을 들려주었다.

“무서운 놈.”

“무슨 일인지 끝나고 말해주라.”

남은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강성태까지 네 명이었다.

삽시간에 마감이 끝났는데 오히려 최치곤에게 일을 알려주느라 시간이 더 걸린 편이었다.

“고생 많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예. 저 내일 쉬어요. 아시죠?”

“그래. 푹 쉬고 모레 보자.”

이성안을 먼저 보낸 강성태는 카페의 문을 잠그고 주차장에서 돌아섰다.

“야식이라도 먹을까?”

안산과 아르윈의 이야기, 삼합회와의 약속까지 들려줄 이야기가 많아 강성태는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최치곤이 함께 가면 어떻겠냐는 투로 이은주를 돌아보았다.

눈치가 빨라 강성태의 상처도 알아챈 놈이 사랑에 빠지더니 어떤 대화를 할 건지에 대해 잊은 모양이었다.

“같이 가지?”

“저는 들어갈게요.”

최치곤이 권하고 이은주가 웃으며 거절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잠시만.”

늦은 시간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강성태는 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디야? 시간 되면 잠깐 신월동 나이트로 오면 어때?

이병렬이었다.

“무슨 일인데?”

- 와서 직접 봐. 얼마나 걸려?

급한 느낌인데 딱히 나쁜 일 같지도 않았다.

“지금 가면 대략 15분?”

- 그럼 잠시 뒤에 봐.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치곤아. 하필 나 잠깐 가볼 곳이 있어서 그런데 어떻게 할래?”

“그래? 그럼 난 은주랑 야식 먹고 있을게.”

사랑, 그놈 참 무섭다.

어디에 왜 가는지도 묻지 않은 최치곤의 답이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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