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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 4화 (194/513)

10권 - 4화

강성태와 이병렬이 있어서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아르윈의 착잡한 심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쩌면 아버지란 사람이 끝까지 저런 모습인지.

착잡한 심정에서 아르윈은 나이트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조직원들이 부러지고 터지며 인생 끝나는구나 싶은 직후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신강남파의 일원이 되었다.

깡패의 삶이 어디라고 다르겠냐만, 아르윈이 알던 조직과 강성태의 신강남파는 뭔가 달랐다.

당장 이승현의 행태에 분노하는 이병렬이 그랬고, 조직원들을 닦달해 단물을 빨아먹는 보스에 익숙한 아르윈에게 강성태는 정말이지 생소했다.

“형님.”

밖으로 나온 서달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르윈의 곁을 지켰다.

조직 생활에서 잔뼈가 굵어 한국의 책임자가 된 아르윈에게 이런 모습이 낯설지는 않았다.

“왜 나왔어?”

“조금 뒤에 오는 분을 모시라며 병렬이 형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서달수를 보던 아르윈은 맥이 풀리는 것처럼 웃음을 토해냈다.

“안산이 이상한 거냐, 아니면 신강남파가 특별한 거냐? 난 진짜 모르겠다.”

“뭐가 말입니까, 형님?”

“오늘만 해도 그렇잖아. 여기랑 강서구 호텔에 우리 애들 다섯 팀이 출연하게 됐다. 그뿐이냐? 다음 주에 지방 뚫어주신다고 했는데 말대로 되면 필리핀에서 애들 더 보내도 되겠냐고 물을 거다.”

목덜미에 새겨진 굵직한 해적 문신이 아르윈의 움직임에 따라 인상을 찌푸리거나 기가 막힌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성태 형님 같은 분 처음 봤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독하게 구는 것도 아닌데 그냥 고개가 숙어지는 분이라는 거, 이해하냐?”

“다들 비슷합니다, 형님.”

다가오는 택시를 살폈던 서달수가 대림동, 광룡과의 일화를 짧게 들려주었다.

“그 뒤로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아르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저런 형님들 모시고, 출연자들 위해서 뛰어야 할 때 아버지 일로 이러고 있으니. 바람을 피워도 어떻게 회사 여직원을 건드리냐. 내가 사람 자식이 아니라 아예 개새끼였구나 싶다.”

“이번 기회에 털어내신다고 생각하십시오, 형님. 그렇지 않아도 성태 형님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성태 형님이? 왜?”

“병렬이 형님이 벌금이라도 맞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 같고, 또 동생들 보는 앞에서 형님이 아버지 일로 망신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셨습니다, 형님.”

“내가 어릴 적 기억하던 아버지는 지난번 찾아갔을 때 이미 돌아가셨다. 아까 병원에서도 봤겠지만, 지금은 그냥 덤덤해. 밥 한 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도 병원에서 다 털어버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너까지 왜 그래?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냥 앞으로 내가 혹시 실수하는 게 있으면 조용하게 귀띔이나 해주라.”

고개를 숙이는 서달수의 어깨를 아르윈이 가볍게 다독였을 때였다.

흰색 중형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상체를 기울인 아르윈이 목을 길게 빼며 살피자 목에 있던 해적 문신도 고개를 빼며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저기 왔다.”

“형님은 계십시오.”

고개를 숙인 서달수가 눈짓을 하자 드럼통 같은 몸뚱이를 가진 덩치들 셋이 빠르게 움직였다.

서달수와 세 명의 덩치가 둘러싸자 발렛 직원에게 차를 맡기려던 부인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전무님, 사모님 되십니까?”

“뭐예요? 왜 이래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상은 험악했으나 서달수는 공손했다.

급하게 입은 외출복에 가벼운 외투를 걸친 이승현의 부인이 망설일 때였다.

아르윈이 다가갔다.

이 사람이? 혹시 속은 건가?

그를 알아본 부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애 아빠가 아니라고 했었죠?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이러는 거예요?”

“저도 우연히 본 겁니다. 그냥 넘길까 했는데 또 가정을 등지는 일은 막고 싶어서 영상 드렸습니다.”

“이건 아니에요. 그냥 갈 테니까 비켜요.”

어쩌려고 그러냐는 서달수를 향해 아르윈이 비키라는 눈짓을 건넸다.

고개를 숙인 서달수가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알고 가십시오.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 놀러 온 여자와 눈이 맞아서 귀국한 거였습니다. 필리핀 일을 모르시는 거 보면 그 여자와 헤어지고 사모님을 만난 거고요.”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 함께 있는 여자가 회사 여직원입니다. 나중에라도 그것만은 확인해서 처리하십시오. 아니면 또 이혼하자고 하거나 계속 저렇게 주변 여자들에게 손을 댈 겁니다.”

운전석 문을 잡고 몸을 넣으려던 부인이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이런다고 그쪽에 좋을 거 아무것도 없어요.”

“따님만큼은 저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해서 연락드렸던 겁니다. 거절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문을 잡은 채 부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다른 거 원하는 거 없어요? 돈이라든가 그런 거요.”

“돈은 제가 사모님보다 많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이미 가슴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여학생이 눈에 치여서 연락드렸을 뿐입니다.”

“들어가면 있어요?”

“룸으로 모실 테니 조용히 들어가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입술을 뒤틀었던 부인이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여기 차 좀 주차해!”

눈치 빠른 서달수가 손을 들자 발렛 직원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키를 받았다.

아르윈이 앞에 서고 서달수와 덩치 셋이 부인을 지키듯 움직였다.

공연을 위한 밴드가 올라오는 중간이라 홀은 블루스 타임이었다.

아르윈과 서달수를 본 웨이터들이 공손한 태도로 부인을 중간 룸으로 안내했다.

“여기 창으로 보십시오. 저기, 가운데 보이십니까?”

이승현은 테이블에 있었다.

뭔가를 속삭이던 그가 때마침 여직원의 귀를 입술로 깨물었다.

어깨와 목을 움츠렸던 여직원이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는 순간, 아르윈은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 있던 부인은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더 볼 거 있어요?”

“10분만 기다리십시오.”

아르윈의 태도, 뒤를 지키듯 서 있는 서달수와 덩치 셋을 돌아본 부인이 파랗게 타오르는 눈빛을 홀을 향해 돌렸다.

끈적한 음악이 줄어들면서 화려한 조명이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무대가 돌아가면서 경쾌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손님이 물갈이되는 시간이었다.

뭔가 토라진 모양으로 여직원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를 감싼 이승현이 달랬고, 이어 둘이서 볼을 잡고 입을 맞췄다.

유리가 터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인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승현과 여직원은 연주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며 어깨, 가슴, 허벅지를 쓸어대고 있었다.

“정말 저이 아들이에요?”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는지 시선을 돌린 부인이 물었다.

“제가 아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맞아요? 아니에요?”

“한국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필리핀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고모하고 삼촌도 있었고요. 왼쪽 눈 아래에 흉터가 있었는데…….”

“세상에? 그럼 그분들도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휴가 때면 번갈아 왔었습니다.”

“기가 막혀! 그래놓고 나를 소개해 준 거였네요?”

누가 소개했는지 몰라서 아르윈은 덤덤한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닮았다 싶기는 했어요. 그나저나 찾아와서 어쩌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무슨 사고를 당한 줄 알았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렸었는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독한 마음으로 찾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과 여학생을 보고 나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르윈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매가 많이 누그러졌을 때였다.

음악이 끝났다.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러키 세븐의 연주는 대단해서 손님들 몇몇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러키 세븐입니다!”

어색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의 우리말 인사가 있자 홀에 있던 손님들이 박수와 환호로 답했다.

“오늘 처음 공연이에요. 그래서 손님 중 몇 분을 모셔서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음! 먼저 저기 두 분! 네! 일어나 주세요!”

이승현과 여직원이 일어나며 부인의 눈에서 다시 파란 불꽃이 튀었다.

“멋진 커플 1호! 키스하시면 굉장한 선물을 준비한 룸으로 모십니다! 여러분, 다 같이, 키스해! 키스해!”

어색한 우리말로 유도하자 손님들이 박수로 호응했다.

서로를 바라본 이승현과 여직원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쁜 인간.”

부인의 독기가 올라왔을 때였다.

“그건 뽀뽀. 키스를 해야 상품을 획득하시지요.”

부인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요구가 무대에서 나왔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무대와 손님들의 호응이 이어지자 이승현과 여직원은 서로를 꽉 안은 채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박수와 환호가 터지자 웨이터 셋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두 분은 룸으로 가세요! 오늘 행복하세요! 자, 다음 노래 들려드리고 또 행운을 나누겠습니다!”

쾅쾅대는 음악이 터질 때 이승현이 웨이터를 향해 손을 저었다. 싫다는 표정이었는데 웨이터가 여직원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뭔가 욕심나는 게 있다고 알려주는 눈치였다.

효과는 컸다.

여직원이 팔을 당기자 이승현이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움직였다.

“나가드릴까요? 아니면 여기 있을까요?”

“하아-.”

아르윈의 질문에 부인은 답을 하지 못했다.

“나가 있겠습니다.”

이승현과 여직원은 홀을 벗어나 룸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주변의 손님들이 두 사람을 향해 손뼉을 쳐주거나 혹은 엄지를 들어 주었다.

“여기 있어 줘요.”

“알겠습니다.”

아르윈이 답을 할 때 이승현과 여직원이 창을 지나쳤다.

문을 연 웨이터 셋이 두 사람을 안으로 쑥 밀었다.

놀란 이승현과 여직원이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을 때, 아르윈이 문을 닫으며 막아섰다.

“당신이 어떻게?”

“사모님?”

부인과 여직원은 서로 아는 눈치였다.

“너, 이 쌍년!”

왈칵 달려든 부인이 여직원의 머리칼을 양팔로 암팡지게 붙들고 흔들었다.

“이봐! 왜 이래? 그런 게 아냐!”

말리려는 이승현을 서달수가 벽으로 밀쳤다.

“선생님. 적당히 합시다.”

서달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드럼통 체형을 한 덩치 셋이 막아서자 이승현은 머리채를 휘어잡은 부인과 아르윈을 돌아볼 뿐, 당장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채를 잡힌 여직원의 울음 섞인 비명과 부인의 악다구니가 무대에서 나오는 음악에 묻혔는데 번쩍이는 조명과 쿵쿵대는 리듬이 부인의 팔 동작과 묘하게 맞아떨어져 오히려 서글퍼 보였다.

휙! 콰다당!

테이블에 여직원을 던지다시피 뿌리친 부인의 손에 머리칼이 한 움큼 잡혀 있었다.

“당신이 뭔가 오해한 거야! 일단 내가 이 사람들 전부 고소할 테니까 들어봐! 아니 당장 신고할 테니까 일단 나가서 말해! 이봐, 오해야! 오해!”

“오해? 그래 좋아. 오해라고 쳐! 그럼 내일 여기 이 사람하고 유전자 검사해. 그래서 아들이 아닌 거로 나오면 내가 이거 없던 일로 해줄게.”

“그걸 내가 왜 해?”

“그래도 할 말이 있냐, 이 개 같은 인간아!”

달려드는 부인을 아르윈이 막아서며 붙들었다.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에서 사모님이 폭력을 행사하면 집단 폭행이 됩니다. 여직원의 일은 제가 감당하겠지만, 저분이 고소하면 여기 동생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형님. 억울한 거 푸십시오, 형님.”

서달수가 진심에서 고개를 숙였다.

“달수야. 나는 이제 진짜 더 바라는 거 없다. 말대로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날 돌아가셔서 지금은 보는 것만도 구역질이 난다. 그러니 이제 밖으로 모셔. 대신 사모님 나가실 때까지 어디 못 가게 잡고 있어.”

“예, 형님.”

아르윈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 서달수가 덩치 셋과 함께 이승현을 둘러싸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갔다.

산발로 소파에서 앉아 얼굴을 감싼 여직원을 돌아본 아르윈이 시선을 들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다시는 나서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조심해서 가십시오.”

분한 감정, 배신감, 수치심, 거기에 너무 흥분한 상태여서 부인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상태에서도 그녀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여직원을 표독스럽게 돌아보았다.

“너는 이년아! 내가 내일 회사로 갈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명절이면 우리 집에 와서 밥 처먹고, 나한테 부탁해서 사람도 소개받았으면서……!”

생각하다 분통이 터졌는지 몸을 움직인 부인이 들고 있던 작은 지갑으로 여직원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쳤다.

정말이지 매섭게 팔을 휘둘렀던 부인이 거친 숨을 내쉬다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룸을 빠져나갔다.

아르윈은 여직원의 곁으로 움직여 냅킨을 꺼내 건네주었다.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도 냅킨을 받은 여직원이 눈과 코를 닦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왜 이렇게 망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정리해.”

코를 훌쩍인 여직원은 답이 없었다.

“백 맡긴 거 있어? 가져다줄게.”

냅킨을 움켜쥔 여직원이 그 와중에도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관함 키를 주었다.

에이, 불쌍한 여자야.

키를 받으며 아르윈은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지금껏 마음 한구석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후련하게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룸을 나선 아르윈이 입구로 걸을 때 서달수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냐?”

“말씀도 마십시오, 형님. 따귀를 얼마나 살벌하게 때리는지 보고 있던 제 뺨이 다 얼얼합니다. 어디 가십니까, 형님?”

“백 찾아주러.”

“주십시오, 형님.”

“이건 내가 하게 해주라. 그래야 미련을 탈탈 털어낼 거 같다.”

시원섭섭하게 웃는 아르윈을 본 서달수가 고개를 숙이며 뜻을 받았다.

“백 찾아주고 들어갈 테니까 형님들께 먼저 가서 말씀드려.”

“예, 형님.”

“참, 달수야.”

“예? 형님?”

“혹시 성태 형님이나 병렬이 형님을 모실 자리 말이야, 그럴 리는 없지만, 위험한 자리가 있으면 나 좀 꼭 불러주라. 대신 죽을 자리 같은 거.”

섬뜩한 당부를 참 편안하게 건넨 아르윈이 물품 보관소를 향해 몸을 돌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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