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 - 5화 (195/513)

10권 - 5화

제3장.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과 배신당한 한 여자, 오래전에 버려졌던 아들이 한자리에서 뒤엉켰다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르윈은 오래도록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후련하게 털어낸 얼굴이었다.

빌라에 돌아와 잠들었던 강성태는 모처럼 조용한 아침을 맞았다.

샤워하며 살펴본 왼팔과 뒤통수의 상처가 믿기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서 오히려 겁이 날 정도였다.

커피를 준비한 강성태는 식탁에 앉아 모처럼 여유롭게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 많았지만, 반대로 하나둘 해결한 일들도 많았다.

이제 의문에 싸인 부모님의 교통사고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확인하지 못한 일이 하나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곤을 믿는 심정으로 출근할 생각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 강성태가 머그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현관 밖 복도에서 들렸다.

쾅쾅쾅.

“성태 씨!”

안다미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벨을 두고도 현관문을 두드리는 음성이 무척이나 급했다.

설마 어젯밤에 최치곤이 그 빌어먹을 벽에 이은주를 밀어붙였나.

강성태는 빠르게 움직여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직후였다.

달려든 안다미가 강성태의 목을 안고서 매달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바람 빠지는 인형처럼 웃은 강성태는 안다미를 깊게 안았다.

“아후. 이제 살 거 같아요.”

“아침은요?”

강성태의 질문에 안다미가 목 뒤로 돌렸던 왼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샌드위치 안 물려요?”

“이게 종류가 다양한 거 있죠? 아직 우리가 안 먹어본 거 엄청 많아요.”

“업종을 샌드위치 전문점으로 바꿔볼까요?”

“진짜요? 나 정말 진지하게 그럴까 고민했었어요. 의사 그만두고 둘이서 샌드위치 전문점 해보면 어떨까 하고요.”

장난이야, 진심이야?

들여다보는 강성태를 향해 안다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후, 강성태와 안다미는 샌드위치로 아침을 함께했다.

“다음 주에 이모님과 식사할까 하는데 괜찮아요?”

“화요일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화요일에는 뭐가 있는데요?”

“중국에서 오는 분들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인사만 하자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요.”

고개를 비튼 안다미가 밉지 않은 표정으로 강성태를 살폈다.

“그냥 인사만 하는 겁니다.”

“진짜죠?”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쯤 함께 보낸 안다미는 욕실에 칫솔을 하나 둬야겠다는 말을 끝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

낮잠을 잠깐 자는 한이 있더라도 이종환은 되도록 아침에 일어났다.

어제만 해도 신월동에서 넘어온 시간이 새벽 2시였는데 이종환은 오전 7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깡패라는 게 제대로 하려니까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대신 달라진 모습도 많았다.

이종환이 생활 리듬을 바꾸면서 대림동 덩치들도 자연스레 따르기 시작했다. 반면에, 기존의 나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놈들이 떨어져 나가는 일도 있었다.

우스운 모습은 그 뒤에 있었다.

신강남파가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먼저 떨어져 나갔던 놈들이 다시 받아달라고 매달렸고, 최근에 돌아섰던 놈들은 나가봐야 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작은 가게를 말아먹고는 대림동을 기웃거렸다.

아침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늘 마시던 달달한 커피를 밀어낸 이종환은 강성태를 따르겠다는 의지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아무리 마시려 해도 아직 쓰기만 할 뿐, 맛은 정말 모르겠다.

이종환이 심오한 표정으로 아메리카노를 노려볼 때였다.

밖을 돌고 온 덩치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앞에 도우장과 요우티아우를 파는 장 사장 아시지 말입니다.”

“왜?”

“어제 광룡 조직원 셋을 봤답니다. 전에 얼굴을 알던 놈들인데 가게 뒤편 다세대에 마작방을 개설한다며 돌아다녔답니다.”

이종환은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사람 사는 동네를 돌아봤다는 이유로 두들기는 건 중절모 쓰던 야인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마작방이라고 해놓고 애들 숨겨뒀다가 밀고 올지 모르니까 잘 지켜봐. 마작방 영업 시작하면 그 건수로 우리가 밀어버리면 된다.”

이종환의 지시를 받은 덩치가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냄새가 이상한데?’

대림동에 오래 살았던 이종환은 육감이 주는 경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

최치곤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커피알리고로 출근하는 내내 어쩐지 조마조마한 느낌이었다.

10시 40분에 주차장에 들어선 강성태는 카페 안에서 테이블을 닦는 이은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최치곤. 장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강성태를 이은주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맞았다.

“오셨어요?”

“일찍 나왔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집에서 일어나면 자꾸 카페가 그리운 거 혹시 아세요?”

아직 커피 머신이 완전히 예열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용도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강성태는 이은주와 함께 주방과 홀을 정리했다.

전날 워낙 깔끔하게 마감해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은주가 유리창까지 세세하게 다시 살피는 통에 덩달아 바빴다.

강성태가 가장 안쪽의 테이블을 닦을 때였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었다.

최치곤이겠지 싶어 몸을 세웠던 강성태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자, 김선영을 보며 입구로 움직였다.

“어떻게 왔어?”

백발마녀처럼 머리칼을 하얗게 탈색한 김선영은 어젯밤 화장을 지우지 않은 듯 뭔가 뜬 듯한 인상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잠시만.”

강성태는 먼저 이은주에게 청소 도구를 건네주었다.

“커피 드려요?”

“여기 선영이 것도 주세요.”

오늘의 첫 커피를 부탁한 강성태는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김선영에게 다가갔다.

잠을 못 잔 모양인지 김선영의 눈가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뭐가?”

“정말 몰라서 이래요?”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지.”

강성태를 매섭게 노려보던 김선영이 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월동 나이트요. 어제부터 필리핀 가수들이 출연한다는데 대신 기존의 세 팀을 잘랐거든요. 우리 엄마도 다음 달부터 나오지 말래요. 이게 말이 돼요?”

그 일이 이렇게 얽히나?

실력은 나중 문제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직장을 잘린 모양새니까 화가 날 만도 하겠다.

“우리 엄마요. 다음 달에 음반 나와요. 지방 방송국 출연도 잡았고요. 후회할 텐데 괜찮겠어요?”

“선영아.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잖냐. 그리고 그렇게 좋은 계획이 있으면 출연 결정하는 사람에게 말해 봐.”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김선영이 앙칼지게 반문할 때 이은주가 슬며시 머그잔 두 개를 주문대 위에 놓아주었다.

“엄마가 출연하지 못하면 나 다시 여기에서 일할 거예요.”

“그건 어렵지 않겠냐? 이미 직원이 다 뽑혔고, 사장님도 싫어할 거 같은데?”

“매니저님이 사장님이잖아요!”

“아니.”

강성태는 뒤를 돌아보라며 고갯짓을 건넸다.

때마침 최치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인상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서 진짜 잔인한 사람처럼 보였다.

김선영의 위아래를 훑어본 최치곤은 강성태와 이은주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어쩐 일이야?”

“아저씨가 여기 사장 됐어요?”

“싸가지 하고는. 모가지에 심 박았어? 인사하는 법 몰라?”

아무리 당차게 군다고 해도 최치곤에게 김선영은 매 앞의 병아리 정도였다.

예전에야 카페 직원이라며 봐준 게 있고, 어쩌다가 들른 참이라 양보한 면도 있지만, 지금 최치곤에게 김선영은 정말 오다가다 보는 수준이었다.

“뭐냐고, 아침부터? 내가 사장이면? 왜? 카페 살래? 아니면 커피 한 이백 잔 주문하냐?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왜 영업 준비하는 업장에 와서 인상을 구겨?”

“그게 아니고요.”

“여기가 카페 안인 건 다 아니까, 왜 왔는지나 말해.”

강성태가 잠자코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최치곤이 대놓고 김선영을 몰아붙였다.

“아저씨. 다음 달부터 우리 엄마 나이트 잘리거든요. 그거 다시 출연하게 해줘요.”

“여기 커피 파는 곳이다. 주문할 거 아니면 헛소리하지 말고 가라.”

“아니면 여기 일할 거예요.”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밀려나면 실력을 돌아보는 게 우선이고, 정말 가수가 되고 싶다면 다른 일을 하면서라도 노력하는 게 우선 아닐까.

그런 뒤에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는 건 모르지만, 무턱대고 와서 저런 식으로 매달려 얻는 게 뭐가 있을까.

막말로 한두 달 노래하게 해준다고 해도, 또 다른 실력자가 나오면 어차피 밀려날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 정말 내가 형님들께 전화해줘?”

“진짜요?”

“그래. 전화해서 다른 곳에도 출연 못 하게 한번 힘써줄까? 사람 살리는 건 어렵지만, 하나쯤 죽이는 건 그렇게 힘든 거 아니거든.”

그러게 평소에 최치곤에게 좀 잘하지.

도저히 최치곤을 이기지 못할 걸 깨달은 김선영이 시선을 들어 강성태를 노려보았다.

“여기 내가 정말 부숴버릴 거야!”

어디에선가 들었던 듯한 악담을 뱉어낸 김선영이 몸을 돌려 커피알리고를 나섰다.

“피곤하다.”

“어제 늦게 들어갔어?”

강성태는 기회를 봐서 걱정하던 질문을 슬며시 내놓았다.

“아니. 국수 하나씩 먹고 은주 바래다줬거든. 그리고 집에 도착했는데 성만이 새끼가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거 아니냐. 에이, 개새끼 때문에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나 옷 먼저 갈아입을게.”

툴툴대며 최치곤이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어제 국수만 먹었어요?”

“예. 혹시 더 드실 거면 먼저 일어나겠다고 했더니 충분하다면서 함께 일어났어요.”

벽에 밀어붙일까 염려했더니 아예 철벽을 만난 꼴이었다.

어수선한 아침은 여기까지.

유니폼과 앞치마를 두른 최치곤이 홀로 나와 셋이서 커피를 마시자 분위기가 다시 돌아왔다.

어제 있었던 일들도 자세하게 들었다.

“그 새끼들 태권도 하는 놈들이더라고. 너 전에 골목에서 상대했던…….”

말을 하던 최치곤이 입을 다물고는 이은주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태권도 하던 선배 있는데 그쪽 후배들인 거 같기도 하고.”

기분이 풀린 최치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 때 이른 손님이 들어왔다.

강성태는 재료를 준비하겠다며 한 걸음 물러나 이은주와 최치곤에게 주문대를 맡겼다.

아메리카노를 어설프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의 반 정도 길이밖에 안 되는 짧은 손톱에 두꺼운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최치곤은 열심이었다.

태도나 눈빛만 봐서는 커피 장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잘한다, 최치곤.

계란으로 철벽 깨기는 실패할 것 같지만, 땀 흘리며 사는 삶만큼은 놓치지 마라.

최치곤이 신중하게 뜨거운 물을 부을 때였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최재섭이 보였다.

낡은 점퍼와 셔츠, 오래된 정장 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최재섭이 혹시 안이 보일까 하는 몸짓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가서 맞을까 했던 강성태는 모른 척 재료에 시선을 떨궜다.

어쩌면 태어난 순간을 제외하고 최치곤을 보며 가장 행복할지 모를 장면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딸랑.

“어서 오세요, 커피알리고…. 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선 최재섭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눈으로 주문대를 향해 다가왔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

“일은? 그냥 지나는 길에 들른 거지.”

유니폼, 앞치마, 최치곤이 들고 있는 스쿠프를 바라본 최재섭의 표정을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남겨 오래도록 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성태야.”

“은주 씨. 치곤이 아버님.”

“아, 예. 안녕하세요?”

적당하게 나선 강성태는 최재섭을 반갑게 맞았다.

“아버지. 커피 어떠세요?”

“커피? 난 속이 쓰려서 뭐 다른 거 없겠냐? 단거 있던데 그거로 주라.”

최치곤이 가장 자신 있는 메뉴를 거절한 최재섭이 라테를 선택했다.

“치곤아. 아버지 드릴 라테 하나 만들어줘.”

강성태는 최치곤에게 무리한 도전이 될 주문을 건네고는 최재섭을 자리로 안내했다.

“저놈 저거 진짜냐?”

“마음 잡아가는 과정이거니 하고 봐주세요.”

어설프게 라테를 만드는 최치곤을 최재섭이 영원히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집중해서 보았다.

“저놈 낳고 오늘이 가장 기쁘다.”

“앞으로 계속 이럴 거예요, 아버지.”

“이렇게만 살아준다면 더 뭘 바라겠냐. 내가 이제 갈 때가 됐나 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래오래 치곤이 변하는 거 보셔야죠.”

강성태가 보기에는 속 터지는 동작인데 최재섭에게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바리스타로 보이는 눈치였다.

강성태가 최재섭을 바라보며 흐뭇해할 때였다.

딸랑.

문이 열리며 어쩐지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커피알리고입니다.”

여자 손님은 카페 안과 최치곤, 이은주를 빠르게 살폈고, 이어서 강성태를 슬며시 확인했다.

단발머리, 당차고 날카로운 눈매, 약간 나온 광대, 재킷, 정장 바지, 블라우스 차림의 여자 손님은 분명 커피알리고와 강성태, 최치곤에 대해 알고 온 느낌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주문은 이은주가 받았다.

“카드와 영수증 여기 있습니다. 준비되면 불러드릴게요.”

카드와 영수증을 받은 여자 손님이 몸을 돌리는 척하며 또다시 강성태를 살폈다.

아닌 척하지만, 강성태의 감각 앞에서는 어설픈 짓거리였다.

정체가 뭐지?

훈련이나 운동한 느낌은 아닌데?

혹시 홍콩 조주방에서 보낸 해결사인가 싶어서 보았으나 그런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강성태는 자리로 향하는 여자 손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는 손님인가?

최재섭이 돌아보았을 때였다.

자리에 앉은 여자 손님이 또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다가 강성태와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 뭐야?’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여자 손님이 움찔했다.

서른셋, 넷으로 보이는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검어지는 듯하면서 강성태의 눈에 여자 손님만 담겼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분명 적대감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