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 - 8화 (198/513)

10권 - 8화

제4장. 카페에 가봐야겠다.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서라대학병원의 입원실로 향했다.

“이 친구는 키란. 키란, 아르윈이라고 필리핀 출신이다. 인사해.”

특별하게 통역해 줄 필요 없이 키란과 아르윈이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곧바로 키란이 동생, 아르윈이 형님이 되었다.

“네팔 구르카 출신이라고?”

“성태 형님과 함께 훈련했었습니다.”

아르윈은 키란을 통해 강성태의 출신을 알아채고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20분쯤 지난 뒤였다.

지루했던 키란과 영어가 능숙한 아르윈은 마치 20년 지기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한국어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그거 일도 아냐. 내가 내일부터 매일 올 테니까 시작하자. 읽고, 쓰는 건 일단 포기해. 말을 하게 되잖아? 한국어는 특히 읽는 게 확실히 영어보다 빠르다.”

“정말입니까?”

“내가 못 오는 날은 한국어 능숙한 동생을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키란과 강성태의 과거를 알아가는 게 흥미로운 아르윈의 욕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어야 할 때였다.

“저녁 먹으러 가자.”

“예, 형님.”

몸을 일으킨 아르윈은 두꺼운 목을 기울여 키란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성태 형님 덕분에 다시 태어난 거 같다. 우리 바닥은 늘 배신과 배반이 깔려있어서 순수하면 오래 못 살아. 그걸 깨부순 분이 형님이다. 우리 그렇게 가자.”

순박하게 웃는 키란의 볼을 툭 쳐 준 아르윈이 몸을 세웠다.

확실히 아르윈의 외모가 강렬하긴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목덜미에 새겨진 해적 문신의 인상이 워낙 사나운 것도 한몫했고.

내내 강성태를 편하게 대하던 간병인이 아르윈을 힐끔거리며 조심하는 눈치였다.

“순두부 괜찮냐?”

“잘 먹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순두부집으로 향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삼합회에서 넘어온다.”

가는 길에서 강성태는 화요일의 일정에 관해 설명했다.

**

이종환은 도우장을 앞에 두고 요우티아오를 찢어서 입에 넣었다.

“광룡 아이들이 이거 알면 나는 죽은 목숨인 거 알지요? 나는 그저 이 사장만 믿습니다.”

점포를 오래 운영한 장 사장이 식탁의 오른쪽에 앉아서 이종환에게 간곡한 심정을 전했다.

믿어달라, 맡겨달라는 흔한 말 한마디 없이 도우장을 마신 이종환이 장 사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장 사장.”

망설이는 장 사장의 말을 이종환이 잘랐다.

“나야 깡패로 들어선 사람이니까 광룡과 붙어도 돼. 하지만 장 사장은 다르잖아. 지나는 길에 그냥 출출해서 들른 거고, 간단하게 요기하고 일어선 게 전부야. 곤란하면 그냥 있어.”

“그게 아니고….”

“내가 모시는 형님 이야기는 들었지? 전에 가게 박살 난 거 때문에 소문이 요란했잖아.”

“그 이야기 모르는 사람 없지요.”

이종환의 말에 장 사장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 뒤로 나나 우리 식구들이 점포 괴롭힌 적 없지?”

“우리 이 사장이 그렇게 잘해주니까 다들 광룡이 올까 걱정하는 거지요! 암요! 나도 그래서 이렇게 이 사장 앞에 앉아 있는 거고.”

“내가 장 사장을 갈궈서 뭔가 얻어가면 형님이 나 가만 안 두실 거거든.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는데 마음 편하게 생각해. 됐지?”

나이야 이종환이 당연히 어렸다. 그러나 대림동 바닥의 룰과 이종환의 인간성을 익히 알아서 장 사장은 말투 따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남은 도우장을 다 마신 이종환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왜 이래요, 이 사장? 이거 다 합쳐서 2천5백 원입니다. 그걸 뭘 돈을 내요?”

“이런 거 얻어먹는 것도 우리 형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일이라서.”

정말 천 원짜리 두 장과 5백 원짜리 동전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이 사장. 잠깐만요.”

일어서는 이종환을 말린 장 사장은 점포 밖을 살핀 뒤에 주방으로 얼른 튀었다. 그런 뒤에 바닥의 밀가루 포대 안쪽에서 작은 병을 다섯 개 가져왔다. 시험관의 양쪽을 막은 형태로 한 뼘 길이였다.

“이게 뭡니까?”

“피곤할 때 먹으라고 광룡 애들이 이걸 풀고 있어요. 손님들한테도 권하라면서 혹시 사고 싶다고 하면 병당 5천 원에 넘겨줄 테니까 2만 원에 팔라고 합니다.”

이종환은 곧바로 점포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로 된 박스 안에 요우티아오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도우장이 담긴 스테인리스 그릇, 다시 비닐로 된 문 바깥까지, 특별히 걸리는 점은 없었다.

“이거 마약인 건 알지?”

“그놈들 시커먼 속을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여기 보시오. 표시를 해놔서 이 병이 광룡 놈들 눈에 띄면 내가 이 사장에게 넘긴 게 들통나요. 그래서 망설였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나만 줘요.”

“그래도 되겠슴까?”

상황이 급하자 장 사장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머지는 마셨다고 하고 버려. 병도 하나는 깨졌다고 하고. 됐지? 그리고 조금만 이상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무조건 전화해. 조금만 이상하면 그냥 해. 백 번을 왔다가 그냥 가더라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내가 살다가 깡패…. 아니 조직에게 기댈 줄은 몰랐슴다. 나는 이 사장만 믿겠슴다.”

이종환이 씨익 웃어주자 굳었던 장 사장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

강선영이 문을 거세게 열고 들어오자 계장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됐습니까?”

“되기는 뭐가 어떻게 돼요? 그냥 깨졌지. 아니, 대한민국 검사가 깡패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에이, 씨발.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결재판을 책상에 세게 내리쳤던 강선영이 인상을 사납게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계장이 달려가 모니터를 품에 안았다.

“뭐 하세요?”

“이거 또 던지면 이제 비품 신청 안 받아줍니다. 그러니까 검사님. 일단 식사부터 하시면서 감정을 푸십시오.”

“지금 밥이 넘어가요? 잣 같은 깡패 새끼 때문에 대한민국 검사인 내가 욕을 처먹었다고요! 그것도 이상해! 내가 검사인 걸 깡패 새끼가 어떻게 알았죠?”

“에이! 블라우스 주머니에 신분증 그렇게 떡하니 넣어두셨는데 그걸 못 보겠습니까?”

“뭐야? 그럼 그 새끼가 내 가슴을 봤다는 거예요?”

“제발 그 말투 좀.”

강선영이 독기 어린 눈으로 보자 계장은 모니터를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밥 먹고 우리 커피 마시러 가요.”

“예에? 설마 또 신월동에 가시는 건 아니시죠?”

“왜요? 이제는 커피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해요?”

“검사니-임.”

“시끄럽고, 얼른 밥 먹어요.”

계장의 간절한 표정을 외면한 강선영이 책상과 책상 사이에 가져다 놓은 둥그런 탁자로 움직였다.

“에이, 씨발. 볶음밥. 이제 지겹다.”

“이번 달에는 처음입니다.”

진실을 말했던 계장이 목을 움츠리며 짬뽕 국물을 강선영 앞에 놓아주었다.

**

나이트 사무실에 있던 이병렬은 저녁을 먹기 위해 서달수와 입구로 나왔다.

입구에 세워둔 차의 뒷자리로 움직이던 이병렬은 주차장을 향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검은색 중형 승용차였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놈의 인상이 어쩐지 생선을 삼켰다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럽게 눈에 담겼다.

두 놈만 탄 줄 알았다.

그런데 뒷자리에서 손이 나와 운전석에 있는 놈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다가온 덩치들이 이병렬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고, 운전석에 발을 넣었던 서달수가 몸을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도로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병렬의 옆을 지나쳐야 했다.

이병렬은 바로 앞을 스치는 승용차를 따라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운전석이 지났고, 뒷좌석이 흘렀으며 막 뒤쪽 유리창이 스칠 때였다.

조수석 뒤쪽에 앉았던 남자가 이병렬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놈이 비릿하게 웃는 걸 이병렬은 분명하게 보았다.

눈가를 좁히는 이병렬을 두고 뒷좌석에 탄 놈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으며, 이어 승용차가 시선에서 멀어졌다.

“뭡니까, 형님?”

“별 씨발. 아무래도 짜장들이 다시 설치는 거 같은데?”

지시를 기다리는 서달수를 보았던 이병렬은 뒷좌석에 몸을 집어넣었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둘러쌌던 덩치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일 때 승용차가 출발했다.

**

원자춘은 어둑한 방에 서너 개의 스탠드를 켜놓고 A4 용지 크기의 사진에 집중했다.

조태완을 만나고 나오는 강성태의 옆모습, 차에 오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 그 옆에서 걷던 이병렬이 운전석 뒷자리로 몸을 넣는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이병렬을 지켜보다가 시선이 마주쳤던 모양입니다.”

“조주방 해결사 놈들이 원체 거만한 구석이 있지. 아예 막가파식이니까. 광동에서 목을 잘라 걸던 놈들이니 오죽하겠나.”

화를 낼 줄 알았던 원자춘은 뜻밖에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어 사진을 뒤로 넘겼다.

“무식하게 생긴 이놈은 뭐냐?”

“서달수라고 이병렬의 심복입니다. 별거 없는데 충성심은 대단한 모양입니다.”

“이런 놈들이 무서워. 이병렬을 살리려고 목숨을 내놓을 수 있거든.”

세 장의 사진을 천천히 넘기던 원자춘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정훈입니다. 전에 태완이파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강성태의 왼팔로 활동 중입니다.”

또다시 사진을 넘기던 원자춘이 사진을 눈앞으로 들었다.

“잔인한 느낌인데? 이놈은 뭐야? 킬러인가?”

“최치곤이라고 강성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심복입니다.”

“흠.”

“실력이나 위치는 별거 없습니다.”

뒤쪽 사진은 신월동 나이트에서 나오는 이병렬, 인사하는 덩치들의 장면을 담고 있어서 특별할 게 없었다.

“강성태, 이병렬, 김정훈은 언제고 명령만 내리시면 제거하도록 준비를 마쳤습니다.”

원자춘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룡은?”

“대림동에 들어가 신경을 긁고 있습니다. 또, 말씀하신 대로 샘플을 무제한으로 풀고 있습니다.”

답을 들은 원자춘이 픽 웃었다.

“한번 맛보면 못 헤어난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해, 강성태도 마찬가지다. 처음 면담 이후에 이놈 저놈 죽어 나가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원자춘은 지금껏 보던 사진 외에 책상 왼편에 따로 빼놓았던 사진을 들었다.

“여기 여자 의사 선생은?”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아! 강성태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면 그날 일제히 시작한다. 나가 봐.”

고개를 깊게 숙인 수하가 방을 나서자 의자를 옆으로 돌린 원자춘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나요. 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원자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태란 놈이 특수부대 출신인 만큼 그 정도는 준비해두는 게 좋지요.”

통화를 마치려던 원자춘이 상대의 말에 집중했다.

잠시 뒤였다.

“한국 시장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1인당 소득으로 볼 때, 한국 시장을 열기만 한다면 앞으로 10년은 돈을 쓸어담는 일만 남습니다.”

원자춘은 제법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강성태가 우리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굳이 피 볼 일은 없습니다. 놈이 가져가는 상납금이라 해야 우리 수익의 5퍼센트 안쪽인데 그 정도야 기꺼이 줄 용의가 있습니다.”

몇 차례 비슷한 내용을 주고받은 원자춘이 통화를 마쳤다.

그는 팔을 뻗어 강성태의 사진을 가져가 얼굴 앞으로 들었다.

“감히 대국의 삼합회에게 고개를 쳐들다니. 이 원자춘이 고개 숙이게 한 대가를 분명하게 치르게 해주마.”

말을 마친 원자춘은 강성태의 사진을 붙잡아서 길게 찢었다.

**

아르윈과 헤어진 강성태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짙게 내려서 병원 아래 고수부지의 조명이 아름답게 빛났고, 건너편 아파트에 촘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르윈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나이트 앞 주차장에 있던 놈들인데 홍콩에서 온 해결사들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이병렬이 전화해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 당분간 혼자 다니지 마라.

“조심할 테니까 너도 좀 더 신경 써.”

통화를 마친 직후였다.

이번에는 이종환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 샘플을 아예 대놓고 풀었습니다, 형님.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일단 연락드렸습니다.

“광룡이 확실해?”

- 마작방 만든다는 명분으로 다세대 주택 하나 계약했는데 계약자는 대림동 사람을 앞세웠습니다. 그곳을 광룡 애들이 숙소와 창고로 사용하는 느낌입니다.

강성태는 잠시 창을 보며 대림동 상황을 정리했다.

“그 정도면 대놓고 움직인다는 건데?”

- 아무래도 우리 쪽이 달려들도록 긁어대는 느낌입니다. 여기에서 더 참으면 고개 숙이는 꼴이 돼서 상인들이 흔들립니다, 형님.

“일단 하루 이틀만 참고 있어.”

- 예, 형님.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다시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려서 키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여보세요?”

- 통화 되냐?

“키란하고 있어. 무슨 일인데?”

- 여자 검사 있잖냐? 지금 또 와서 죽친다. 아예 대놓고 나하고 은주를 살피는 거 보니까 작정한 모양이다. 혹시 여유가 생겨도 오늘은 진짜 오지 마. 내가 마감까지 잘 지킬 테니까.

“알았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창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뭐가 이렇게 한 번에 몰아치는 건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카페에 가봐야겠다.”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루할 텐데 미안하다.”

“아르윈 형님이 한국어 배우는 동영상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거 연습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가볍게 웃는 강성태를 향해 키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적을 상대하러 가십니까?”

“피곤한 상대라고 해두자. 몸조리하고 있어.”

키란의 어깨를 툭 쳐준 강성태는 병실을 나섰다.

삼합회도 버거운 판에 검찰이 가세하면 이쪽만 운신의 폭이 좁아 든다.

또, 저렇게 죽치면 언제고 마주치게 돼 있어서 삼합회를 만나기 전에 해결하는 게 좋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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