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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 11화 (201/513)

10권 - 11화

누구라도 여동생에게 약을 먹이고, 몹쓸 짓을 했다면 이성의 끈을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이 법을 집행하는 검사란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했다.

“나야 깡패니까 달려가서 일단 두들기면 그만인데 너는 검사 아냐? 법으로 해결해.”

“야! 내가 검사고, 내 여동생이 당한 사건인데도 빌어먹을 상부에서 이번 일로 나를 감찰한다니까! 내가 이번에 처절하게 알았다. 부의장 아들하고, 방송국 회장 아들 정도 되면 나 같은 검사는 어떻게 못 하는 존재더라.”

숨을 푹 내쉰 강선영이 갑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는. 깡패 새끼도 못 잡아넣는 게 무슨 검사라고. 에이, 씨발. 더러운 세상, 술이나 실컷 마셨으면 좋겠네.”

한탄을 뱉어낸 강선영이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는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이봐, 깡패. 사실은 그 두 인간 잡을 방법 있는 거지? 그래서 영상을 지니고 있었던 거지? 아냐?”

강성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거냐? 졸라리 패냐? 뒈질 때까지?”

그녀가 용가리처럼 담배 연기를 풀풀 풍기며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 I need a hero. I’m holding out for a hero ‘til the end of the night.

나는 영웅이 필요해요.

이 밤이 끝날 때까지 영웅을 바라죠.

‘I need a hero’라는 노래가 허스키한 음색으로 울려 나왔다.

“여보세요?”

강성태를 힐끔 본 강선영이 담배를 떨어트린 뒤에 발로 밟았다.

“잠깐 나왔어요. 왜요? 아, 진짜! 지랄들 하네.”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강선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았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가봐야겠다.”

몸을 일으키는 강선영의 표정이 동생의 사건을 말할 때보다 더 힘겨워 보였다.

“일어나. 태워다 줄게.”

“먼저 가. 나는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알았다. 오늘 사표 던지게 되면 다시 올 테니까 술이나 한잔 사라.”

“참아. 참고 견뎌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다음에 해결해.”

“지랄! 뭘 안다고 참으래? 술자리에 불러서 은근슬쩍 몸 만지려는 부장 상대해 봤어? 상대해 봤냐고?”

강성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강선영을 보았다.

“내가 검사가 된 건, 우리 사회의 한 줌 소금이 되려던 건데 어떻게 된 게 안이 더 썩었다. 네 말대로 부장 손길 참으면 이번 일 무마되기는 하겠지. 나더러 그걸 참으라고?”

말하다가 지친다는 투로 강선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에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벤치에 올려놓았다.

“마음 바뀌면 연락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승용차에 올라탄 강선영이 고수부지의 출구를 올라가는 모습을 강성태는 묵묵하게 지켜보았다.

검사도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잠시 앉아 있던 강성태는 키란에게 들러볼 생각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지루할까 걱정했던 키란은 열띤 얼굴이었고, 침대 옆에서 아르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아르윈이 얼른 일어나 인사할 때 강성태는 침대 옆으로 움직였다.

우리말 교본과 스마트폰의 통역 앱이 침대 위에 있는 거로 봐서 둘이서 우리말을 익히던 중인 눈치였다.

“이쪽에 오는 길에 들렀다. 애써줘서 고맙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형님.”

진심이 담긴 얼굴로 아르윈이 답을 내놓았다.

“그럼 방해되지 않게 나는 바로 일어날게.”

“벌써 두 시간이나 있었습니다. 남은 건 반복 연습이라 제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형님. 그거 말고도 의논드릴 게 있어서 나가는 길에 전화 드릴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렇게 말하는 걸 굳이 나중으로 미룰 이유가 없어서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많이 해둬.”

“감사합니다, 형님.”

우리말로 답하는 키란을 향해 가볍게 웃어준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간 뒤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형님?”

“카페로 가려고. 왜?”

“차를 가져왔습니다. 입구에 계시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르윈이 로비에서 주차장과 연결된 통로를 향해 급하게 움직였다.

낮이라 오가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기다렸다가 타기도 뭐해서 강성태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주차장 출구로 걸어가서 아르윈의 차가 나오면 바로 타려는 생각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던 강성태는 안쪽에 있는 응급실 통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응급실이란 글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안다미가 떠올라서 그저 돌아본 참이었다.

시선을 돌렸던 강성태는 걸음을 멈추고 통로의 입구에 서 있는 남자 두 명을 눈에 담았다.

광룡의 지용호를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인상, 어색한 태도, 물에 뜬 기름처럼 주변에 섞이지 않는 복장, 그 밖에도 서 있는 자세와 표정, 눈빛마저 강성태의 눈에 거슬렸다.

만약 강성태가 경찰이었다면, 무조건 붙잡고서 검문했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는데 무엇보다 무기를 감춘 듯한 허름한 정장 재킷이 신경을 긁었다.

걸음을 멈춘 강성태의 시선을 느꼈는지 시선을 돌렸던 두 남자가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응급실은 보호자용 증명이 있어야 들어간다.

응급실로 들어가면 인정, 아니면 의심스러운 게 맞는 거고.

어디로 갈래? 아니면 버텨볼 거냐?

강성태가 계속해서 바라보자 두 남자는 로비의 입구를 향해 움직여서 현관으로 나섰다.

강성태가 뒤따르자 급하게 움직인 두 사람이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형님.”

로비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차를 가져온 아르윈이 현관 앞에서 강성태를 불렀다.

차들이 연달아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아르윈의 뒤에 멈추었던 차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데다, 체형과 목덜미의 문신이 워낙 눈에 띄었다.

막말로 따라가서 붙잡아도 왜 피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강성태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르윈이 열어주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운전석으로 움직인 아르윈이 곧바로 차를 움직였다.

“카페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신월동 들렀을 때 알아뒀습니다.”

아르윈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두 놈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상황을 돌아보았다.

이병렬을 지켜보았다던 세 명, 대림동에서 약을 풀어가며 도발하는 광룡에 대한 보고를 듣더니 오늘은 병원에서 수상한 두 놈을 봤다.

조금 전에 봤던 두 놈이 삼합회가 보낸 조직원이라면 노릴 사람은 안다미와 키란이었는데, 응급실 앞에 있었다면 답은 하나였다.

신호를 받아 도로에 합류한 아르윈은 커피알리고를 향해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다.

강성태가 지하차도를 건너는 게 위태롭다는 사실을 모르는 터라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어차피 한 번 해볼까 하던 참이었다.

“아르윈. 혹시 내가 고통스러워하더라도 카페로 가. 가서 최치곤을 찾아.”

“예? 형님?”

“그냥 가면 돼.”

“예, 형님.”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던 아르윈이 궁금한 얼굴로 앞차를 따라 진행했다.

‘다른 건 몰라도 다미 씨가 위험한지, 그것만은 꼭 보여주라.’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당부를 떠올린 강성태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앞에 보이는 지하차도가 어둠을 품은 채 강성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성태는 이를 굳게 깨물었다.

훅 어둠이 달려들며 승용차가 지하차도에 들어섰다.

더컹. 더컹.

숨이 콱 막히는 고통 속에서 강성태는 이를 악물었다.

어릴 적의 교통사고가 악몽처럼 떠오르며 심장이 생으로 찢기는 고통과 폐와 목, 얼굴이 불타는 듯한 통증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끄응.”

강성태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형님! 형니-임!”

아르윈의 다급한 음성이 지하차도의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아스라이 멀어지며 어둠이 강성태를 휩쌌다.

“쌍년을 데리고 온다잖아. 거길 뭐하러 가자는 건데?”

뭐야? 누굴 말하는 거야?

어둠의 가운데가 벌어지며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지방에 보내기 전에 인사하면서 풀자는 거잖아. 그래야 앙심 안 품는다고 부장검사가 마련한 자리니까 우리도 조금은 양보해야지.”

“하여간 그 개새끼한테 당한 이후로 되는 일이 없어.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검사 동생이 걸리냐고.”

“그러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걸 준비했잖냐. 술이 적당할 때 이걸 타서 먹이려고.”

남자가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병을 들었다.

선명해진 시야 안에 있는 인간은 국회부의장의 아들 이진기였다.

“검사한테 약을 먹여서 어쩌려고?”

“이번 감찰 끝나면 지방으로 날릴 년이라 상관없어. 그년이 지랄해 봐야 어차피 검찰이 수사할 건데 뭐. 설마 부장검사가 있는 자리에서 약 먹였다고 잡아넣지는 않을 거 아냐? 보도는 너희 아버지에게 매달리면 끝나는 거고.”

“그런가?”

“진짜 했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니까 적당히, 알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동생이랑 언니를 차례로 하는 거 아니냐? 이상하게 흥분된다.”

이진기가 음흉하게 눈짓을 건네자 소영천이 기대하는 얼굴로 입을 헤벌쭉 벌렸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 속에서 강성태는 두 놈을 악착같이 눈에 담았다.

더는 통증을 견디기 어려워서 강성태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직후에 서서히 의식이 흐려졌다.

의식을 잃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강성태가 이로 볼 안쪽을 물었을 때였다.

다시 어둠이 밀려나며 처음 보는 남자 셋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 놈 중 한 놈이 스마트폰을 들고서 질문을 던졌다.

“이병렬이란 놈이 그렇더니 눈치들은 더럽게 빠르네. 그러게 집만 확인하라니까 왜 병원까지 가서 일을 만들어? 알았으니까 일단 대림동으로 가 있어.”

대림동에 가 있으라고?

“나도 몇 번이나 강성태를 맡겨달라고 말했는데 특수부대 출신에게 맡긴단다. 그러니까 그놈은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있어.”

혹시 이병렬을 살피던 놈들인가?

강성태가 세 놈의 인상을 눈에 담을 때였다.

절벽에서 떨어지듯 모든 게 아득하게 멀어졌다.

곧바로 눈앞이 어둑하게 변하면서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몸을 맡기면 고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유혹이 강성태를 강렬하게 꼬드겼다.

안다미, 이병렬, 그리고 덤으로 강선영이 당하는 건 어쩌고?

꿈결에서 느끼는 감촉만큼 덤덤한 상태에서 강성태는 이를 힘껏 깨물었다.

으드득.

볼 안쪽에서 피어난 끔찍한 고통이 대번에 온몸을 휘감으며 강성태를 깨웠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돌아왔다.

“성태야! 야!”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감쌌다.

“정신이 들어?”

“응.”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최치곤이 입은 앞치마에 물들고 있었다.

최치곤의 품에서 강성태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차장 안쪽 벽을 향해 승용차가 서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물 좀 가져다주라.”

“알았어. 진짜 괜찮은 거지?”

“앞치마에 피 묻었다. 그거 벗고 들어가.”

뒤로 물러난 최치곤이 다리부터 승용차 밖으로 나간 뒤에 앞치마를 벗어서 강성태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든 앞치마에 피를 뱉어낸 강성태는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아르윈은 믿을 만한 구석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트렁크 앞에 우직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생수병과 점퍼, 수건을 든 최치곤이 다시 승용차로 다가와 뒷자리로 들어왔다.

“입 헹구고 수건으로 대충 닦아. 이거 입고.”

최치곤이 입고 다니던 점퍼였다.

대강 피를 닦아낸 강성태는 최치곤의 점퍼를 걸치고 계단으로 향했다.

강성태가 소파에 앉자 최치곤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아르윈이란 사람이지?”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길을 좀 잘 알려주지 그랬냐?”

아르윈이 길을 잘못 들어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은주 씨는?”

“다른 손님들 모르게 하라니까 불안한 얼굴로도 진짜 태연한 척하더라. 진국이다, 진국.”

“이제 됐다. 내려가. 가서 은주 씨 달래주고, 아르윈더러 올라오라고 해주라.”

“피가 계속 나는데 병원에 안 가도 되겠냐?”

“조금 지나면 괜찮아.”

강성태를 살핀 최치곤이 마지못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개만도 못한 것들 둘이서 강선영을 노리고, 삼합회는 강성태부터 이병렬, 안다미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

강성태가 뜨거운 숨을 내쉴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아르윈이 들어섰다.

“앉아.”

영문을 모른 상태에서도 아르윈은 뭔가 잘못했나 하는 얼굴로 강성태의 앞에 앉았다.

“아까 그 친구가 최치곤인데 이런 경험이 있어서 잘 마무리했다. 놀랐겠지만, 이건 내가 의도한 거니까 다른 생각하지 마.”

물을 머금어서 피를 삼킨 강성태가 시선을 들었다.

말을 하는 사이에 셔츠의 앞과 바지에 피가 계속 튀어서 혈투를 끝내고 앉은 느낌이었다.

“하려던 말이 뭔데?”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아르윈이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주방에서 왔다는 조직원을 찾을 거 같은데 따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수건으로 입을 닦던 강성태는 먼저 시선만 들었다.

어둠에서 본 놈들이 만만치 않은 게 마음에 걸렸고, 다음으로 자칫 잘못 건드려서 놈들이 숨어버리면 안다미와 이병렬이 더욱 위험해진다.

“일단 움직이지 말고 있어. 놈들이 이상한 낌새를 차리면 오히려 수습하기 곤란해.”

“예, 형님.”

피 묻은 수건을 움켜쥔 강성태는 강선영을 떠올렸다.

부장검사가 몇 명 있을지 모를 자리에 나섰다가 뒷수습을 못 하면 조태완까지 모조리 끝장난다.

생각을 정리하던 강성태는 피 묻은 입술을 움직여 픽 웃었다.

검사도 두들기겠다고 해놓고 닥치니까 망설이다니.

웃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르윈 앞에서 강성태는 독기 오른 눈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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