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14화 (225/513)

11권 - 14화

남은 시간이 정직하게 흘렀다.

쿠크리와 권총을 지닌 상태로 새벽 1시를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전투를 앞두고 대기하는 느낌도 들었다.

혹시라도 움직임이 있으면 연락받기로 했다.

호텔에서 근무하는 필리핀 여직원이 중간에 강성태와 아르윈을 위해 아메리카노와 음료까지 따로 챙겨주었는데 아직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방에 처박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로라를 호텔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잔뜩 숨죽인 상태로 내일 합류할 다섯 명을 기다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따지면 뒤늦게 발견한 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일찍 알아냈다면, 그래서 놈들을 감시하거나 혹은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이 생겼다면, 여섯 시간 뒤에 들어올 놈들이 뭔가를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대로 러시아의 다섯 놈이 바싹 긴장한 상태라는 불리함이 있지만, 생각해보면 암살조는 원래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놈들이라 별반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랑을 마친 연인이 객실을 나서는지 밖에서 문을 열었다가 닫는 소리가 들렸다.

필리핀 여직원의 말대로 자정이 넘어가자 다들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이곳 직원들에 대한 보상은?”

“돈을 원하는 직원이 둘 있고, 아까 보신 직원은 필리핀에 있는 가족을 불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모두 만족하고 있습니다.”

강성태의 맞은편에서 아르윈은 칭찬할 정도로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수많은 경험 덕분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타고난 모습처럼 보였다.

아르윈이 말을 마쳤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탁자 주변으로 스멀스멀 몰려오는 긴장을 흩뿌리며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Hello?”

쇳소리 가득한 한국 조폭들과 달리 조직원을 상대하는 아르윈의 목소리는 어쩐지 이죽거리는 느낌이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아르윈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주차장에 승용차와 승합차를 대기했답니다. 필리핀에서 히트맨을 했던 놈들만 불렀으니까 염려하시는 일 없을 겁니다, 형님.”

통화 내용을 알려준 아르윈이 눈치를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전기를 내리고 나서 조직원 중 한 명을 앞세우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호텔에서 전기가 나가는 게 일반적인 일도 아니고, 일주일 가까이 투숙하는 동안 한 번도 못 봤던 인원이 들어가면 저놈들 손에 죽어. 히트맨 출신이라며?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긴장하면 반드시 움직임과 눈매에 표시가 나.”

“그런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까?”

강성태의 출신과 능력이 궁금한 눈으로 아르윈이 건넨 질문이었다.

이런 건 그냥 가볍게 웃어주는 게 좋았다.

강성태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 시선을 주었다.

연락이 올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

룸으로 들어간 김전동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도화지 한 놈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뭐여?”

“뭐긴 뭐야, 이 씨발놈들아! 생활하는 놈들도 아닌 것들이 어디에서 냄새를 피우고 지랄들이야!”

남은 도화지 네 놈이 인상을 구기며 달려들었으나 워낙 많이 마신 상태였고, 족보에서 밀렸으며, 양아치답게 끝까지 대들 깡은 없었다.

아가씨들을 내보낸 김전동은 글자 그대로 밟아 죽일 듯이 도화지 다섯을 두들겼고, 마지막에는 웃통을 모두 벗겨서 화장실 문 앞에 줄줄이 꿇렸다.

“이 그림들은 뭐냐, 이 새끼야? 동물이면 동물, 보살이면 보살, 일관성이 있어야지.”

그렇게 화장실 앞에 꿇려 놓고서 팔이 아프도록 뺨을 갈기자 도화지 다섯 모두 얼굴이 온통 피범벅으로 바뀌었다.

속을 시원하게 푼 김전동은 유섭우의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하여간, 강북 양아치 새끼들. 구멍가게나 하던 것들이 개발 사업은 니미. 야! 내일 가서 신강남파 김전동한테 졸라리 맞았다고 얘기해. 알았어? 한 새끼라도 내 앞에 나타날 거 같냐, 이 양아치 새끼들아.”

다시 30분에 걸쳐 악착스럽게 도화지 다섯을 갈군 김전동은 마침내 오늘의 업무를 끝내기로 했다.

“술값은 됐으니까 가다가 그 잘난 법인 카드로 파스나 사, 이 새끼들아. 그리고 경고하는데 우리 업장 근처에 얼씬거리다가 걸리면 그때는 미아리고 지랄이고 싹 엎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그렇게 룸을 나선 김전동은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특실로 움직였다.

안주도 없이 달랑 맥주 한 병을 따라 마시던 유섭우가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손부터 닦아.”

유섭우가 턱으로 가리키자 김전동은 공손한 태도로 물수건을 들어서 피 묻은 손을 닦았다.

“성경일이가 어깨 뽕 잔뜩 들어가서 물불을 못 가린단다. 업장 깨지는 건 상관없는데 괜히 애들 시켜서 너 달거나 작업할 수 있으니까 정신 바싹 차려.”

“경일이 형님이 오면 맞다이 쳐도 됩니까, 형님?”

“저 양아치 새끼들이 우리 보스도 몰라보고 사우나에서 주접떤 게 있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랬습니까, 형님? 그런 거면 가서 좀 더 밟아 줄까요, 형님?”

“오늘은 그 정도면 됐어. 혹시 몰라서 밖에 숙소 식구들 대기시켜 놨으니까 이따 인사해.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유섭우가 고개로 문을 가리키자 깊숙하게 상체를 숙인 김전동이 방을 나섰다.

**

우우우웅. 우우우웅.

액정에 올라온 이름을 확인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유섭우입니다, 형님. 시원하게 두들겼으니까 내일쯤 어떤 식으로든 말이 돌 겁니다, 형님. 내일이 일요일이라 여기 업장이 쉬기 때문에 성경일이 움직이는 건 월요일이 되지 싶습니다, 형님.

“고생했다.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조심해.”

- 저는 이제 장례식장으로 가 있겠습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복잡하게 꼬여서 삐걱대던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는 느낌이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유섭우인데 사우나에서 거들먹거리던 놈들을 제대로 두들겼단다.”

통화 내용과 성북구의 재개발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Hello?”

강성태를 바라보았던 아르윈이 짧게 답하고 통화를 마쳤다.

“아래층이 모두 비었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벗었다. 그런 뒤에 쿠크리를 들어서 손잡이가 아래로 가게 천으로 묶었다.

심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르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묶는 데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 형님?”

“결정적인 순간에 자루를 꺼내기 쉽고, 칼집이 방패 역할을 하도록 묶는 건데, 이 칼을 받을 때 동료로 받아들이겠다는 맹세를 한 게 있어서 조심스럽게 대하는 거지.”

정서와 문화가 달라서 알아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설명을 마친 강성태는 권총을 들어서 탄창과 장전을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안전핀을 돌렸다.

“직원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는 끝났다.

권총을 돌려서 허리 뒤에 꽂은 강성태가 걸음을 옮기자 아르윈이 곧장 뒤따랐다.

투숙객들이 나가며 문을 반쯤 열어놓은 객실들을 지난 아르윈이 비상계단의 철문을 열었다.

흐릿한 조명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계단 입구에 서 있던 필리핀 여직원이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 긴장하는 기색이 보이기는 했는데 그렇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평온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여직원 역시 아르윈과 같이 타고난 강단이 있는 데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노리는 일을 경험해 본 느낌이었다.

“스위치는 누가 내려?”

“청소할 때 사용하는 무전기에요. 이거로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아르윈이 묻자 필리핀 여직원이 생활 무전기를 들어 보였다. 그런 뒤에 강성태의 팔에 걸린 쿠크리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여유를 보일 정도라면 정말 문을 열라고 부탁해도 괜찮겠다는 믿음마저 생겼다.

비상계단을 나서려는 필리핀 여직원을 강성태가 붙들었다.

“복도 끝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했을지 몰라. 무선 카메라는 선이 필요 없으니까 그걸 먼저 확인해.”

어떻게?

여직원이 시선으로 묻고 있었다.

“매립형은 벽이나 천장을 뚫어야 하니까 어려울 테고, 청소하는 척하며 복도 양 끝의 구석을 살펴봐. 할 수 있겠어?”

“예.”

편안하게 답을 한 여직원이 망설임 없이 복도로 나섰다.

열린 문을 통해 강성태는 재빨리 복도를 살폈다.

세탁물 수거를 위한 수레와 파란 비닐봉지가 걸린 수레가 복도 안쪽에 있었고, 필리핀 여자가 가리킨 방을 제외한 나머지 객실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문이 닫히자 계단에 들어왔던 조명이 바로 꺼졌다.

어둠 속에서 비상계단을 표시하는 파란불에 의지해 귀를 세우고 있을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며 시트를 가슴에 품은 여직원이 계단으로 들어왔다.

“두 번이나 둘러봤는데 카메라는 못 봤어요.”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지금은 필리핀 여직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움직인 여직원이 태연하게 복도를 걸어서 왼쪽 3번째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성태는 객실 문을 빠르게 훑었다.

여직원이 말한 대로 객실 문 주변에 카메라는 없었다.

무기를 꺼내기 전에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었다.

강성태가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뜻을 알아차린 여직원이 왼손을 들어서 목을 긋는 시늉을 보였다.

어쩐지 아르윈보다 더 손발이 척척 맞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경호할 때, 이런 사람이 제일 두렵다는 생각도 했다.

러시아 두 놈이 있는 방으로 다가간 강성태는 허리 뒤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는 문고리가 있는 반대편 벽에 몸을 붙였다.

‘전기를 내리라고 연락해.’

복도 안쪽에 있는 여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철컥.

문고리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가로로 눕혀놓은 형태의 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강성태가 시선을 짧게 던지자 아르윈이 여직원을 당겨 복도 안쪽으로 움직였다.

문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렸다.

강성태는 열린 부분을 빠르게 훑었다.

안전고리는 없었다.

콰앙.

문을 세차게 들이받으며 뛰어들자, 바로 앞에 있던 놈이 뒤로 밀렸고, 테이블에 앉았던 놈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꽈악.

강성태는 문 앞에 있던 놈의 눈에 엄지를 꽂아 넣으며 머리를 움켜쥐었고 가슴에 찍어넣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푸슝.

두 번에 걸쳐 꿈틀댄 놈이 늘어지는 순간이었다.

휘익!

그 짧은 순간에 테이블 의자가 강성태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콰작.

몸을 낮춘 강성태를 대신해서 가슴에 총을 맞은 놈의 머리를 세차게 때린 의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붙들고 있던 놈을 밀쳐낼 때, 테이블에 있던 놈은 허리 뒤에서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염병할, 유리!

강성태는 그대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휙. 터덕. 퍼억. 터더덕.

턱을 노리고 날린 팔꿈치를 놈이 팔뚝으로 막았고, 날아드는 주먹을 강성태가 손으로 때려냈다.

터더덕! 퍼억! 퍽! 터억!

연달아 팔꿈치와 팔뚝이 마주쳤고, 한 번씩 턱과 목덜미에 주먹을 꽂아 넣었으며, 다시 강성태가 날린 주먹을 놈이 때려냈다.

짧은 순간에,

퍼억! 퍽! 퍼벅!

강성태와 놈 모두 상대방의 턱과 목덜미에 주먹과 팔꿈치를 꽂아 넣었지만, 비명이나 고함은 없었다.

강성태는 눈, 턱, 목덜미, 명치를 노리며 뾰족하게 세운 엄지와 중지를 내세운 주먹, 팔꿈치를 날렸고,

터덕! 퍽! 터더덕!

날아드는 엄지와 주먹, 팔꿈치를 팔뚝으로 막고, 손으로 때려냈다.

퍼억!

강성태가 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고,

콰득!

놈의 팔꿈치가 귀 아래에 박혔다.

제대로 맞아서 눈앞에 별이 튀었고, 대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순간을 못 이겨서 손을 멈추면 남는 건 죽음밖에 없었다.

휘익. 터덕.

빠르게 파고드는 주먹을 때려낸 강성태는 왼팔에 걸어둔 쿠크리를 뽑았다.

완력에 자신 있는 모양이었다.

콰악. 와락.

쿠크리를 든 강성태의 오른손을 붙든 놈이 가슴을 들이받으며 달려들었다.

체중이 몰리는 순간에 강성태는 상체를 비틀어서 놈을 아래로 깔았다.

콰자자작!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테이블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질 때, 강성태는 잡힌 왼손을 빠르게 뻗었다.

콰악! 콱!

강성태의 왼팔, 놈의 오른손이 동시에 서로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쉬지 못한 데다, 쿠크리를 든 강성태의 오른손과 손목을 붙든 놈의 왼팔이 맞서는 상황이라 눈과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거?

터널을 들어갈 때마다 겪거든.

알지? 익숙한 놈이 좀 더 수월하게 견딘다는 거.

강성태는 이를 꽉 깨물며 왼손으로 놈의 목을 짓눌렀다.

“끄윽.”

처음으로 아래에 깔린 놈이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직후에 강성태는 쿠크리를 쥔 오른손을 비틀었다.

“끄으으.”

손목을 잡은 놈의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쿠크리의 날 끝이 놈의 가슴에 붙는 순간에 강성태는 손잡이에 체중을 실었다.

이가 드러나도록 힘을 쓰던 놈의 왼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서로의 목을 움켜쥐고 있어서 지금껏 누구도 숨을 쉬지 못했다.

서걱.

가슴을 파고드는 쿠크리의 감촉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일그러진 놈의 눈이 강성태를 바라보는 순간,

서거억.

쿠크리의 날이 놈의 가슴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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