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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 16화 (227/513)

11권 - 16화

거칠게 열리는 문에 얻어맞은 유리 세브첸코가 휘청이며 뒤로 밀렸다.

객실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강성태는 쿠크리를 뽑아 들었다.

훈련받은 놈답게 내부의 조명을 모두 꺼두었다.

커튼으로 작은 거실 창도 가렸다.

복도에서 힘겹게 들어온 불빛이 전부인 객실에서 창가에 밀린 유리 세브첸코는 흑백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휙! 서걱!

한때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에서 암살자로 날고 기었다고 들었다.

핏! 서걱! 

그러나 러시아 나이로 마흔일곱,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은 반사신경이 둔해지는 중년이었다.

핏핏핏!

암살팀의 팀장을 맡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해도 맞붙은 강성태를 감당할 정도의 육체적 능력은 부족했다.

연달아 쿠크리에 당한 유리 세브첸코가 창틀에 왼팔을 얹은 자세로 버티며 녹색 눈알로 강성태를 확인했다.

오른쪽 겨드랑이와 어깨, 팔뚝이 길게 갈라져서 손목과 손, 그리고 아직 붙들고 있는 권총을 타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강?”

그가 던진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눈을 똑바로 마주한 상태에서 영어로 답한 직후였다.

최후를 각오한 모양이었다.

쿠크리와 강성태를 번갈아 본 그가 왼손을 번개같이 움직여 오른손에 든 권총을 잡았다.

와락, 달려든 강성태는 유리 세브첸코의 왼손 팔뚝을 누르고, 동시에 쿠크리의 날 끝을 그의 심장에 걸었다.

유리 세브첸코의 눈이 한 뼘 정도 거리에서 강성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에 담긴 독기에 눌렸다가는 유리 세브첸코의 무릎에 사타구니를 얻어맞을지 모르고, 하다못해 이마에 받혀 상황이 뒤집힐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강성태는 쿠크리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듯 앞으로 밀었다.

서거억.

섬뜩한 감촉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졌고, 이어 움찔했던 유리 세브첸코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무너졌다.

콰드등.

작고 둥그런 탁자를 붙잡았던 그가 의자와 함께 객실 바닥에 쓰러졌다.

러시아에서 들어온 암살조 다섯을 모두 해치웠다는 감상을 즐길 틈은 없었다.

유리 세브첸코의 권총을 집어 든 강성태가 급하게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철컥.

객실로 들어오는 덩치의 이마에 강성태는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형님…?”

하마터면 아르윈의 이마를 뚫을 뻔했다.

작전을 수행하는 대원들이 괜히 이런저런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닌데, 아르윈이 그것까지 알 리는 없어서 뭐라 할 것도 아니었다.

강성태는 숨을 나직하게 내쉬며 권총을 내렸다.

“저쪽은?”

“한 명은 심장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고, 문 안쪽에 있던 놈은 가슴을 맞았는데 숨이 붙어 있길래 조금 전에 확실하게 정리했습니다, 형님.”

안에 쓰러진 유리 세브첸코를 들여다본 아르윈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가져왔다.

“옆 객실에 타올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습니다. 씻고 오시면 이 방을 정리하겠습니다, 형님.”

확실히 이제는 새벽에 입국할 놈들을 대비해야 할 때였다.

강성태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권총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형님.”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을 아르윈이 내놓았다.

무기를 구한 것도 아르윈, 조직원을 동원한 것도 아르윈, 하다못해 호텔 종업원은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형님?”

아르윈이 간곡한 느낌으로 강성태를 다시 불렀다.

만에 하나 오늘 일이 문제 될 때를 대비해 가능한 한 자신이 품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어차피 사건화 된다면 강성태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런 게 두렵다기보다는 권총이라는 무기를 지금껏 보관하던 경험을 믿는 심정이었다.

권총을 건네준 강성태는 옆에 있는 객실로 움직였다.

맞은편 방에서 아르윈의 조직원들이 세탁 수레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저 안에 러시아 암살조의 시체 두 구가 들어있을 텐데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태연한 표정과 태도였다.

옆 객실에 들어선 강성태는 먼저 침대 위에 얌전하게 누워 있는 정장과 셔츠를 보았다.

조태완이나 김정훈, 이병렬이 툭 하면 꺼내 드는 명품은 아니었지만,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웃고 있는 펭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샤워실로 향하는 동안, 쿠크리를 풀어내며 시간도 확인했다.

새벽 2시였다.

오전 7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려면 지금쯤 비행기에 있을 테니 중국인 다섯 놈이 이곳의 사정을 알기는 어렵다.

‘고생했다. 고맙다.’

쿠크리를 풀어 피를 씻어낸 강성태는 날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은 후에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정장에 노타이셔츠, 허리 뒤에 쿠크리를 꽂아 넣고 나섰을 때, 피 냄새를 가리기 위해 뿌린 방향제가 복도에 가득할 정도로 객실 정리가 끝나 있었다.

“형님.”

객실로 들어서는 강성태를 아르윈이 불렀다.

찾아낸 물건들은 비슷했다.

권총, 스마트폰, 서울 관광 지도와 곤잘레스 이두안이 묵는 호텔의 팸플릿,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객실을 정리하는 필리핀 조직원과 호텔 직원을 돌아본 아르윈이 조심스럽게 사각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뭔데 이러지?

서류 봉투를 받아 접힌 입구를 열자 클립으로 묶인 A4 용지가 여러 묶음 보였다.

가장 앞면에 있는 묶음에는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사진과 약력, 좋아하는 음식과 주로 움직이는 동선, 그리고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의 사진 등이 여러 장에 걸쳐 담겨 있었다.

이어서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경비 현황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나름 철저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다음은 로라였다.

어학원, 통학할 때 이용하는 동선, 차량, 경호원의 숫자, 심지어 차에 타고 내리는 사진까지 있었다.

호텔로 옮기지 않았다면 어학원에 가는 순간이나, 빌라에 있는 사이에 납치됐을 확률이 높았다.

타깃이 더 있었나?

뒷면 서류 묶음을 꺼내 확인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존 보스만의 사진과 함께 경력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고, 커다란 덩치로 호텔 로비를 걷는 선명한 사진도 함께 있었다.

마지막 서류 묶음을 꺼낸 강성태는 아르윈을 먼저 보았다.

강성태와 관련된 자료였다.

용병 시절의 사진, 과거 참여한 전투 목록, 그리고 강성태도 지니고 있지 않은 증명서 사진까지, 꼼꼼하게 챙겨두었다.

내용물을 안에 넣은 강성태가 고개를 든 다음이었다.

“침대 옆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두 장짜리 서류를 아르윈이 건네주었다.

“뭐야 이게?”

“승합차 렌트 계약서 같습니다.”

아르윈의 말대로 렌트 개시 시간이 일요일 오전 7시, 인천공항이어서 의심할 여지없이 입국하는 놈들을 마중하기 위해 준비한 차량이 분명했다.

승합차 렌트 계약을 한 게 이틀 전이었다.

어쩌면 로라가 호텔로 옮긴 것을 보고 합류해서 작전을 수행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전 7시에 중국인 다섯이 인천 공항으로 들어오거든. 이거 취소시키고, 필리핀 조직원들이 그놈들을 차에 태울 수 있을까?”

“이름을 아십니까, 형님?”

“여권이 스마트폰에 있어.”

“그렇다면 일도 아닙니다, 형님.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확실히 우리나라 덩치들이 줄줄이 나가는 것보다 필리핀 조직원이 나가 있는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합차 뒤에 숨어 있다가 아까 총으로 제압해서 안산 공장 같은 곳에 가둬두면 가장 좋아. 반항이 심하면 모두 죽여도 상관없다. 문제는 차에 탈 때까지 의심받지 않는 거지.”

“조직원들이나 관광비자로 입국하는 필리핀 사람 인바운드 경험이 많아서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합니다, 형님.”

아르윈이 자신에 찬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어쩌다 너는 나를 만나서 가페 암살팀을 상대하게 됐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정리가 거의 끝난 객실을 돌아보았다.

“나가도 돼? 여기 직원들이 말을 흘릴 염려는 없어?”

“한국에 나와 일할 정도면 모두 본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상황입니다.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보상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면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이 몹시 불행해집니다, 형님.”

섬뜩한 내용을 아르윈이 참 편안한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야식을 드시거나 24시간 하는 커피전문점에 가시면 어떻습니까, 형님?”

아무래도 인천공항에 갈 조직원과 승합차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눈치였다.

잠자코 객실을 나선 강성태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였다.

반짝이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눈가가 벌겋게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눈가와 목덜미, 옆구리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곧바로 호텔을 나섰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로라를 내려주었던 호텔로 가. 그곳 객실에 잠시 올라갔다 나올 생각인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뒷문을 연 아르윈이 속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승용차가 출발하자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비상경계라고 했으니 이 시간에도 반드시 전화를 받아야 했다.

- 존 보스만입니다, 미스터 강.

실제로 신호음이 한번 울린 뒤에 바로 존 보스만의 답이 있었다.

“지금 호텔로 가는 길인데 커피 한잔 마실 수 있을까?”

- 혼자 오십니까?

“승용차를 운전하는 동료가 있는데 객실에는 나 혼자 올라간다.”

- 커피만 준비하면 됩니까?

“단둘이 대화할 공간이 있으면 더 좋아.”

- 알겠습니다.

새벽이라 길이 막히지 않아서 통화를 마쳤을 때는 이미 호텔 근처에 있었다.

호텔 정문에 도착하자 손을 앞으로 잡고서 기다리는 경호원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경호원들이 보고 있다. 나 혼자 내릴 테니까 그냥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앞에 있겠습니다. 전화 주십시오, 형님.”

답을 하는 아르윈의 눈가에 이전보다 두꺼운 존경심이 올라와 있었다.

강성태에 관한 자료를 대강이나마 본 눈치였다.

특전사나 용병을 꿈꾸는 남자들도 제법 있으니까 그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존 보스만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고개를 숙인 경호원들이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이어서 곤잘레스 이두안이 머무는 객실 층으로 올라갔다.

곤잘레스 이두안은 딸과 함께 단 하루도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딸 로라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납치를 염려하고 담당 경호원을 선발해야 했던 그에게 행복은 어떤 의미일까?

강성태가 보기에 경호는 나무랄 곳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두 명, 거기에서 객실까지 10미터 간격으로 경호원이 서 있었다.

객실 앞에 도착한 경호원이 옷깃에 걸어둔 무전기를 통해 강성태의 도착을 알렸다.

문이 열리자 한밤중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조명 안에서 존 보스만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미스터 강.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건 얼마든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서류 봉투를 든 강성태가 양팔을 들자 경호원 둘이 다가와 몸을 살폈다.

몸수색을 마친 경호원이 물러나면서 존 보스만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사용하는 집무실 반대쪽으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거실에 딸린 작은 회의실이나 수행원들의 휴식 장소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존 보스만이 권한 자리에 강성태가 앉은 다음이었다.

커피를 가득 담은 머그잔을 가지고 돌아온 존 보스만이 맞은편에 앉았다.

강성태는 탁자에 올린 서류 봉투를 존 보스만에게 밀었다.

서류와 강성태를 유독 하얗게 보이는 눈으로 번갈아 확인한 그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안에 담긴 자료들을 살피는 동안, 강성태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뜨겁게 보관하기 위해 오래도록 가열한 커피 특유의 쓴맛이 진하게 배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로라가 위험했었군요?”

시선을 든 존 보스만의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러시아에서 들어왔다는 다섯 명은 모두 해결했을 테고요.”

그의 시선이 붉게 물든 턱 언저리에 있는 것을 본 강성태는 픽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전 7시에 인천 공항으로 입국하는 다섯 명도 내가 해결하겠다. 그놈들까지 해결하면 전화할 텐데 그 정도면 로라가 빌라로 돌아가도 될 거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강.”

“서류에 나온 대로 이미 이쪽 동선은 다 읽혔다. 로비 쪽에 호텔 손님으로 보이게 위장한 경호원을 배치하는 게 좋아.”

“준비하겠습니다.”

존 보스만은 완벽하게 상관을 대하는 대원의 자세로 강성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유리 세브첸코 일행이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춘 꼴이다. 뒤처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싶다.”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뒤를 잡는 문제가 없도록 해결하겠습니다.”

“공항에 입국하는 다섯 명을 포함하면 더 좋겠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늦은 시간에 존 보스만을 찾아온 이유가 모두 해결된 꼴이었다.

남은 건 곤잘레스 이두안이 돈과 인맥을 이용해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오전 7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데 잠깐 눈 붙일 곳을 준비해 드릴까요?”

“공항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

존 보스만의 제안을 거절한 강성태는 작은 공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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