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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 18화 (229/513)

11권 - 18화

납골묘로 향하는 마지막 길만큼은 가족들만 있게 해달라는 부친의 청이 있었다.

안장하고 난 뒤에 찾아볼 수 있고, 이병렬이 퇴원하면 함께 들러야 할 곳이어서 강성태는 잠자코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저와 봉진이는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형님.”

“마지막까지 잘 지켜주고 와.”

김진용의 몸 상태가 염려됐으나 그 또한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김진용과 조봉진을 돌려보낸 강성태는 먼저 유섭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아리 쪽 반응은?”

“아직 특별하게 들리는 소식은 없습니다, 형님.”

“장례 치르느라 다들 무리했다. 하루 이틀 쉬는 건 뭐라 않겠는데 쓸데없이 미아리로 넘어가거나 술이 과해서 당하는 일이 없게 단속해.”

“충분히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강서구의 위상을 드높이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나 학교, 심지어 가정에서도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아 봐야 돌아오는 건 짜증이고, 생겨나는 건 반항심밖에 없다.

“나는 종환이랑 움직일 테니까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강성태는 대기하던 승용차로 움직여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이종환이 조수석에 올랐고, 유섭우가 문을 닫자 승용차가 움직였다.

줄줄이 상체를 숙이는 덩치들의 앞을 지난 승용차가 추모공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안중은 어떻게 됐어?”

“광룡 놈들이 건물을 비웠습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 뒤로 안중에서는 안 보입니다, 형님.”

“다른 중국 조직은?”

“광룡이 당한 걸 보고 나서 중국 쪽 하부조직들은 모조리 잠수 탔습니다, 형님.”

“마약 팔이 장사치들이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만큼 도는 물양이 줄어. 대림동 주변 상인들 괴롭히는 일 없게 하고, 화요일까지는 긴장 늦추지 마.”

“예, 형님.”

다짐을 받은 강성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톱 아래로 파고든 가시처럼 껄끄럽던 암살팀이었다.

놈들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어깨에 짊어졌던 짐 절반을 털어낸 듯 홀가분했다.

‘화요일 약속을 앞두고 일주일 간격으로 암살조를 보내? 원자춘이라고 그랬지? 화요일에 제대로 대접해 주마.’

창밖을 보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성경일은 침대에 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아후! 속이야.”

전날 얼마나 퍼마셨는지 아직도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풀풀 올라왔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저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침대 옆의 테이블에 두었던 물병을 든 성경일은 단숨에 반쯤 남은 물을 모두 마셨다.

“어흑.”

통쾌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처럼 요즘 성경일 인생 정말 제대로 꽃피고 있었다.

“불쌍한 새끼들.”

공부 졸라리 해서 대기업 건설사에 들어갔다는 놈들이 성경일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술잔을 들이미는 꼴이라니.

그나마 부장급 정도는 돼야 성경일과 대작하지, 과장 나부랭이와 그 아래는 감히 술잔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돈 좋다. 돈 좋아.”

시행일이 아니라면 그런 잘난 놈들이 성경일을 거들떠나 보겠나.

그런 잘난 놈들이 재개발 지역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이유로 수십억 되는 돈을 현찰로 들이밀면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독종들만 쫓아내면 곧바로 철거가 시작되고, 분양과 동시에 성경일은 40평대 신축 아파트 로열층을 거머쥔다.

날짜도 얼마 안 남아서 다음 주에 깡그리 밀어내면 진짜 끝이었다.

“개새끼들이 욕심이 모가지까지 차 가지고.”

한 가구당 책정된 보상금이 1억5천만 원이었다.

물론 보스 장태섭이 1억을 먼저 가져가고, 성경일이 다시 4천을 뜯어서 실제로 돌아가는 건 1천만 원인데, 월세로 살던 것들이 그 정도면 감지덕지해야지, ‘억, 억’ 거리면서 아예 팔자를 바꾸려 들었다.

이래서 깡패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건데, 보스 장태섭이나 성경일 자신 모두 사람이 너무 착한 탓에 천만 원씩 내밀어서 괜히 없는 놈들 가슴에 욕심만 피워놓았다.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일어난 성경일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뭐지?’

기절하듯 자는 사이에 새벽부터 들어온 전화와 문자가 한두 통이 아니었다.

성경일은 가장 믿을 만한 번호를 골라 통화버튼을 눌렀다.

-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무슨 일인데 이렇게 전화를 해대? 뭐야?”

- 그게, 형님. 어젯밤에 중달이가 함께 다니는 놈들하고 논현동 스토리 라인이라는 룸살롱에 갔다가 뒈지게 깨졌습니다, 형님.

“뭐?”

- 거기 책임자가 신강남파 김전동인데, 형님. 아예 대놓고 우리 쪽을 노린 눈치였습니다, 형님.

“야, 이 새끼야. 갑자기 신강남파가 왜 우리를 건드려? 이 새끼들이 뭔가 사고 친 거 아냐?”

- 강북 양아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형님. 구멍가게나 하던 것들이 개발 사업은 뭐냐고 하고, 형님. 신강남파 김전동한테 맞았다고 말하라고 했답니다, 형님. 그러면서 한 놈도 못 나타날 거라고 큰소리쳤답니다, 형님.

성경일은 눈매를 고약하게 뜨고서 침대 옆으로 난 창을 돌아보았다.

김전동이라고 이름은 들어봤는데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 그거 말고도, 형님. 앞으로 스토리 라인 업장에 나타나면 미아리까지 싹 엎어버리겠다고 했답니다, 형님.

“그거 믿을 수 있어? 이 새끼들이 괜히 오바치는 거 아냐?”

- 중달이 놈은 그럴 배짱도 없습니다, 형님.

그건 그렇다.

만약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좋게 봐줘도 신강남파가 작정하고 미아리 태섭이파를 긁어대는 꼴이었다.

“김전동이 누구 또래냐?”

- 형님 두 다리 아래 진규, 섭이, 광기 또래입니다, 형님.

“흐음.”

술이 확 깬 성경일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짜증이 슬슬 올라온다는 의미였다.

“여기 화랑 안마다. 식당에서 밥 좀 먹고 있을 테니까, 중달이랑 그 멍청한 새끼들 이리 데리고 와.”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성경일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강남파 강성태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아래쪽 선배들이 한수 접어줄 정도로 대단한 싸움 실력, 마약 문제로 대든 조직은 인천, 안산, 심지어 안중까지 가리지 않고 모조리 깨부순다는 소문까지.

“이 돼지 새끼들이 혹시 업장에서 약했나?”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그랬다.

아는 또래들을 통해서 알아볼까 하던 성경일은 몸을 일으켜 가운을 걸쳤다.

때리고 온 것도 아니고 뒈지게 얻어맞은 일을 떠벌여 봐야 괜히 이쪽만 망신당하는 꼴이라서, 먼저 들어보고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

일요일의 방지병원은 한가했다.

“병렬이하고 있을 테니까 그만 들어가.”

“그럼 형님. 애들 둘을 남겨놓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올 테니까 그냥 데리고 가서 쉬게 해. 고생했어.”

이종환과 덩치에게 눈짓을 건넨 강성태는 응급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소독하고 통로를 지나 커튼에 들어섰을 때, 최치곤은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대신 중환자인 이병렬이 눈을 끔벅이며 강성태를 맞았다.

강성태는 최치곤을 비켜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붉게 물들어 있는 이병렬의 눈이 독한 약 때문이 아니라 서달수의 발인을 짐작한 슬픔처럼 보였다.

“달수 보내주고 왔다.”

강성태가 나직하게 건넨 말에 이병렬은 대꾸가 없었다.

“납골묘는 가족들만 가고 싶다고 해서 진용이, 봉진이만 함께 갔고.”

“씨발, 우리끼리 가게에서 졸라 마시기로 했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소주 한 잔 못 따라줬네.”

힘겹게 입을 움직인 이병렬이 혼잣말처럼 아쉬운 속을 토해냈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른 뒤였다.

“저놈, 치곤이. 받아줘.”

이병렬이 뜬금없는 말과 함께 시선으로 최치곤을 가리켰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길게 편 최치곤은 고개를 뚝 떨어트린 자세로 정말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가씨 이야기 들었다. 그걸 뿌리치고 조직 생활을 하는 건 배신이라고 했다며?”

“치곤이가 그런 말까지 했어?”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냐?”

강성태는 새삼스러운 심정으로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마약, 인신매매, 사채 안 돌리는 제대로 된 조직 만들라고 나한테 그랬지? 그런 조직이라면 저놈이 있어도 되지 않겠어? 거기에 친위부대를 이끌기에 저만큼 적합한 놈도 없고.”

이병렬의 말을 듣는 순간 강성태는 최치곤의 부친 최재섭을 떠올렸다.

커피를 만드는 최치곤을 보며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행복해하던 늙은 아버지의 얼굴을 말이다.

“저놈이 숙소까지 관리하면 다른 숙소 선배들도 저놈을 함부로 하기 어려워. 그러니까 받아줘.”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서 강성태는 무거운 느낌의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조직을 정비해야 돼. 당장은 보스가 워낙 강하게 나서는 덕분에 그럭저럭 꾸려지는데 태완이파, 신호남파, 신월동, 대림동, 강서구, 안산까지, 온통 뒤엉켜 있어서 자칫 내분이 일어나면 걷잡기 어려워.”

“나도 비슷한 생각은 했는데, 치곤이는 처음부터 계산에 넣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직을 꾸리면 언제고 보스를 노리는 놈들이 나온다. 그런 놈들이 가장 걱정하는 게 친위부대고. 내가 일어난다고 해도 보스를 지키는 일에 매달려야 한다면 조직 정비에 제대로 힘을 쏟기도 어렵다.”

“고민할 테니까 시간을 좀 주라.”

이병렬이 더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충분히 의견을 전한 것도 있지만, 말을 길게 한 만큼 지친 느낌도 있었다.

“저놈은 저렇게라도 좀 더 자게 두고, 보스도 가서 잠깐 눈 좀 붙이지?”

“커피 한잔 마시고 올게.”

“나 잘지도 모른다.”

“편한 대로 해.”

최치곤이 깨지 않도록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다.

혼자 먹기보다는 커피 한잔 마시다가 최치곤이 일어나면 함께 먹을 생각으로 병원을 나섰다.

병원 바로 옆의 조그마한 커피전문점으로 향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방지병원에 있습니다.”

- 마음도 편치 않을 텐데 오늘은 좀 쉬지 그래?

“병렬이 옆에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조태완과 통화하며 걷던 강성태는 커피전문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뜩이나 좁은 커피전문점에서 죽이니, 작업하니, 숙소가 어떠니 떠들게 될까 봐 염려돼서였다.

- 내일 저녁 5시, 원주에 있는 별장에서 저녁을 먹는 모양이다. 나를 의심하고 있어서 다른 쪽으로 연락을 넣었더구만.

“몇 시쯤 들어가면 됩니까?”

- 식사하면서 술을 곁들이는데 밴드 들어가고 나서 약을 하니까 진짜는 7시에서 8시쯤 시작해. 밴드가 나온 뒤에 바로 들어가면 분명 현장을 잡을 텐데. 그러지 말고 내일 낮에 병원에 들러. 긴 이야기는 그때 하자.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또 오셨네요.”

“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가져갈 겁니다.”

최치곤이 더럽게 못 만들었다고 투덜대던 커피였다.

오늘따라 주문대 안쪽에 애인인 듯한 남자가 서서 강성태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이 여자에게 작업 걸지 마.’

남자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글씨로 써놓은 것만큼이나 분명했다.

연장이나 권총을 들고 달려가는 작업으로도 지치는데 굳이 이 작은 커피전문점에서 그런 짓을 할 마음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는 남자의 용기야 설명이 필요 없는 거라서 강성태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잔을 받은 강성태는 곧바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진한 커피 향을 맡자 밤을 꼬박 새운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병원으로 돌아간 강성태는 주차장 벤치에 앉았다.

잔인한 날에 햇살은 왜 이렇게 화려한지, 쌓인 피로를 위로받는 심정으로 커피를 막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에 스마트폰이 울었다.

급한 연락인지 몰라서 외면하기 어려웠다.

컵을 내려놓고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깡패, 어디야?

“방지병원.”

- 거기서 뭐 해?

사람이 병원에 있다고 하면 어디를 다쳤는지 물어보는 게 우선 아닐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질문이었는데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지금 통화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전화할 참이었는데, 내일 오후 3시쯤 움직일 생각이거든. 출발 장소는 논현동 근처로 일단 정하고, 출발하기 전에 내가 전화할게.”

- 마약파티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나 이른 시간에 한대?

“지방이라 가는 시간이 필요해.”

- 어디인데?

“정확한 장소는 내일 봐야 알아. 지금은 이 정도만 하자.”

대강 중요한 내용을 전한 강성태는 오른손으로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삼킨 직후였다.

- 오늘 저녁은 뭐 해?

쓴맛이 목에 턱 걸리는 듯한 질문에 강성태는 눈가를 좁혔다.

“결혼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함께 있기로 했어.”

- 깡패가 결혼도 하니?

“검사가 마약파티 하는 세상에 뭔들 못 하겠냐?”

-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뚝 끊겼다.

설마 아니겠지?

검사에 나이까지 많은데?

액정을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고개를 저은 것으로 찝찝한 기분을 털어냈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였다.

약속을 정하지도 않았는데도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멈추고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이 내렸다.

고개를 깊게 숙인 아르윈이 가죽 가방을 들고 바로 벤치 앞으로 다가왔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형님?”

“조금 있다가 안에 치곤이랑 먹으려고.”

강성태가 시선을 주자 아르윈이 바로 가방을 내밀었다.

“그놈들이 가지고 있던 여권, 지갑, 그 외에 물건들을 담아왔습니다, 형님. 그런데 특별한 게 있습니다, 형님.”

외판원처럼 떠든 아르윈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위쪽을 눌러 심을 꺼내는 두꺼운 볼펜을 강성태가 보기 좋도록 내놓았다.

달각.

앞으로 튀어나온 심을 본 강성태가 바로 시선을 들었다.

볼펜 심이 아니라 약물을 주입하기 위한 바늘이 분명했다.

“이걸 꽂으면 약이 나옵니다. 두 놈 중 한 놈에게 꽂아봤는데 확실히 마약 종류였습니다, 형님.”

“증상이 어떤데?”

“바로 동공 풀리고 침 흘리는 거로 봐서 환각 증세가 대단한 마약 같았습니다, 형님.”

“그래?”

볼펜을 내려다본 강성태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픽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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