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 2화
문에서 고작 십 미터 정도였다. 그런데도 조태완은 병실에 들어선 강성태를 향해 빨리 침대 옆으로 오라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강성태는 곧바로 침대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뭐 하냐?”
“준비하고 있습니다, 형님.”
뭐가 이렇게 급할까?
조태완의 독촉을 받은 김정훈이 냉장고에서 홍삼 달인 물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마셔. 몸에 좋아.”
조태완의 재촉에 강성태가 잔을 비운 뒤였다.
“도끼 박아놓고, 성경일이 두들겼어?”
“들으셨습니까?”
“흐햐햐햐햐.”
지금껏 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경박한 웃음을 토해낸 조태완이 체증이 쑥 내려간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장태섭이 그 새끼, 강북 대장이라고 설치더니 속 시원하게 됐다! 에이, 개새끼.”
“전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런 양아치 새끼하고 무슨 일이 있어?”
대뜸 부인했으나 조태완의 눈매에는 분명 통쾌한 기색이 달려 있었다.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그리던 조태완은 강성태를 보며 정신을 추스르는 눈치였다.
“장태섭이 그 새끼가 원래 빨래질을 잘해. 그러니까 보스한테 다이렉트로 덤비지는 않을 테고, 박노익이든, 아래쪽 조직을 꼬드기든 할 테니까 다닐 때 조심해.”
“그렇지 않아도 조직을 정비할 생각입니다. 그건 그렇고 퇴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집 정리가 내일 끝난다네. 오늘은 병원에서 지내고, 내일 원자춘이 만나고 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강성태는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장소는요?”
“정훈아.”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조태완이 대뜸 김정훈을 찾았다.
“정훈이가 문자로 넣어줄 거야. 이세종이가 3시쯤 올 테니까 그때 출발하면 돼. 거기 가서는 제발 적당히 해.”
“현장을 덮치는 장면을 바로 뉴스에 내보낼까 합니다.”
“뭐?”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조태완은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걸 바로 뉴스로 내보내? 막말로 홀딱 벗고 있으면 글자 그대로 방송사고인데, 이세종 생각은 안 해?”
“괜히 보도를 미뤘다가 이런저런 압력을 받느니 한 방에 끝내버리려고 그런 겁니다.”
“보스. 내 얼굴을 좀 봐.”
조태완이 진지한 표정으로 강성태의 시선을 붙들었다.
“나는 보스랑 달라서 직선으로만 살지는 못했다. 물론 내 밥그릇에 숟가락 들이미는 놈들을 잔인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권력 있는 인간들에게는 깔끔하게 고개 숙였어.”
무슨 말을 하려고 살아온 방식을 늘어놓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강성태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보스가 거기 있는 인간들을 뉴스에 바로 내보내면 그 세 사람은 확실히 무너트리겠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 인간들과 친분이 있거나 몸담은 조직이 움직여.”
아직 조태완은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래놓고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국회의원들이 전부 나서다시피 여기저기 압력을 행사할 테고, 검찰 조직 전체가 보스와 주변을 털어댈 거고, 마지막으로 방송, 신문사까지 우리 조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게 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안 되면 내가 보스를 형님이라고 부르마. 내가 이렇게 사정할 테니까 이번만큼은 내 말대로 해주라.”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냥 현장 덮쳐서 영상만 확보해. 그거 꽉 움켜쥐고 우리 조직 못 건드리게 하자. 혹시 알아? 나중에 정말 급한 일 생겼을 때, 그 인간들을 부려먹을지?”
강성태가 옅게 웃는 것을 보자 조태완은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전에 병렬이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적 있다며? 그럴 때 그 인간들이 나서면 한칼에 해결돼.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 말대로 하자.”
조태완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대로 하는 거지?”
“우선 바로 뉴스에 내보내는 건 뒤로 미루겠습니다.”
“하후.”
위장약 광고의 한 장면처럼 조태완이 가슴에 손을 얹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진용이를 보낼까 합니다.”
“김진용 말이지? 그거야 보스가 결정할 문제지.”
“그쪽 경험이 없어서 혹시 반대하실까 염려했습니다.”
“실무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니까 대표는 내부 조율만 하면 돼. 무엇보다 딴 짓 안 할 사람 찾기가 어려운데 보스가 믿는 사람이라면 끝난 거지, 반대할 게 뭐 있어?”
별장 일을 순순히 받아들여 준 것이 고마워서 사소한 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 반대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강성태에게 조태완은 시원시원하게 답을 내놓았다.
“점심은?”
“병렬이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먹을까 합니다.”
“혼자 다니는 거 아니지?”
“아래에 유섭우가 보낸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쯤에는 제 일만 보는 숙소 식구들 몇 명 준비할까 하고요.”
“그래-애?”
오늘 조태완은 여러 차례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내일 집에 가실 때는 저도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보스가 왜?”
“집을 알아둬야 급한 일이 있을 때 달려가죠. 내부 구조와 동선도 봐둬야 하고요.”
위급한 순간을 위해 내부를 확인하겠다는 말이었다.
그게 그렇게 고마웠을까?
삽시간에 눈이 붉게 물든 조태완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이, 사모님. 고문님 순서입니다.”
“내가… 더 뭘 바라겠어.”
“왜 그러세요?”
“고마워서. 그냥 보스가 고마워서.”
“여성호르몬이 많아지신 거 같은데 2세 계획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닙니까?”
“풉!”
강성태가 건넨 농담에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 김정훈이 급하게 고개를 처박았고, 그 직후에 조태완의 눈에서 감동이 싹 사라졌다.
“이 넋 빠진 놈이?”
“죄송…합니다, 형님.”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느라 얼굴이 붉게 물든 김정훈이 가까스로 사죄를 내놓았다.
**
스마트폰을 들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던 이세종은 철문에 박힌 도끼와 바닥에 널브러진 성경일을 상상하듯 눈을 껌벅였다.
- 성경일 상무라고 그 인간이 가장 무서웠거든요. 잔인하기도 하지만, 주먹이든 칼이든 그 인간을 당할 사람이 없다고 다들 손사래를 쳤는데 회장님께서 아예 피떡을 만들어 놨더라니까요.
“회장님이라니?”
- 아! 소개해 주신 강성태 사장님을 우리 개발사 대표이사 회장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시행은 어떻게 되는 건데?”
- 말도 마십시오. 성경일 상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시공사에서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당장 필요한 시행비를 모두 지원해 줄 테니 마음껏 해보랍니다.
만족한 듯 웃은 이세종은 후련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 매형이 대단하신 건 알았지만, 어떻게 그런 분까지 아십니까? 거기에 매너는 또 얼마나 좋으신지 여기 농성 중이던 양반들이 껌벅 넘어갔습니다.
“그래?”
- 하여간 매형, 존경합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 그런 거라뇨, 매형? 강성태 회장님 같은 분이 지금처럼만 도와주시면 대한민국 굵직한 시행은 전부 제 것이 됩니다.
“말만 해.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창으로 다가선 이세종은 방송국 앞마당을 내려다보며 목소리에 힘을 가득 실었다.
- 정말이십니까, 매형?
“내가 언제 허튼소리한 적 있어?”
- 그런 게 아니라 너무 꿈같아서 그렇습니다, 매형.
“알았으니까 실수하는 일 없이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일 진행해. 성태…, 회장의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감사합니다, 매형.
통화를 마친 이세종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 그럼 성태 형님이 원하는 일을 화끈하게 처리해서 점수를 따야지?”
창에서 책상으로 돌아온 이세종은 구내전화기를 들고 번호 네 개를 눌렀다.
“나다. 준비는 어떻게 됐어?”
상대방의 말을 듣던 이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편집하는 대로 뉴스에 다이렉트로 쏠 거니까 중계차 확실히 준비하고, 편집 인원도 한 명 더 늘려. 그래! 내용은 가서 말해 준다니까! 여차하면 올해 보도대상 탈 정도로 중요한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상대방의 말을 듣던 이세종이 흡족한 듯 미소를 그렸다.
“장소는 내가 따로 알려줄 테니까 지금부터 전부 스탠바이 상태로 있어. 담당 피디하고 앵커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케이! 이거 끝나면 진하게 한잔하자. 뭐? 당연하게 클럽으로 가야지! 그래!”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세종은 의자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등을 묻었다.
“어떤 인간인지 모르지만, 보도국장 이세종이 속옷 안까지 샅샅이 털어주마.”
시행일이 잘되면 수익이 백 억대다.
강성태 덕분에 화끈한 보도 터트리면 입지 단단히 굳힌다. 거기에 조태완이 국회의원 만들겠다고 경비 펑펑 지원해 주고 있어서 이세종은 더 바랄 게 없었다.
혹시 보도 내용이 별게 아니면 어떻게 할까?
잠시 눈을 허공으로 치켜떴던 이세종은 픽 웃었다.
강성태가 어설픈 사건을 가져올 리도 없지만, 만약 허접스러운 사건이라면 이걸 빌미로 아쉬운 부탁을 하기도 더 쉬울 일이었다.
클럽에 가서 즐기는 데 부담도 없을 테고.
계산을 마친 이세종은 만족한 얼굴로 오늘 보도 순서를 집어 들었다.
**
방지병원 응급실에 들어간 강성태가 비어있는 침상을 확인했을 때였다.
“이병렬 환자 병실로 올라갔어요.”
얼굴을 아는 간호사가 다가와 짧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벌써 올라가도 될까?
이병렬의 상태가 염려됐으나 유헌우가 알아서 결정했으리라는 기본적인 믿음은 있었다.
“원장님은요?”
“간단한 수술이 있으세요.”
“이병렬 환자의 병실에 있을 건데 원장님 나오시면 연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간호사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응급실 통로를 이용해 로비로 나왔다.
월요일이라 외래 환자가 제법 많았다.
이럴 때 보면 병원이 제법 되는 것도 같은데 현금을 악착같이 밝히는 이유가 뭔지 한편으로 궁금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위로 올라간 강성태는 곧장 이병렬의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김진용과 조봉진이 몸을 일으켜 인사했고, 이병렬은 고개만 돌렸다.
“다녀왔어?”
“가서 시원하게 도끼 하나 박아놨고, 성경일이라는 놈 두들겼다.”
“누구?”
“성경일이라고 그쪽 티에스 개발 상무라고 하던데?”
웃음이 나왔던 모양인지 헤벌쭉 입술을 늘이던 이병렬이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장태섭이 바로 아래가 성경일 아니냐?”
“그렇습니다, 형님.”
이병렬이 묻기 무섭게 김진용이 바로 고개를 숙이고 답을 내놓았다.
“그 새끼를 두들겼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다니. 장태섭이 졸라 바쁘겠네.”
무슨 소리인가 하는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태섭이는 모사꾼이야. 빨래질로 큰 놈이고. 보스에게 일대일로 달려들기보다는 주변을 끌어들여서 연합 세력을 만들려 할 게 틀림없어.”
“고문님도 그 말씀 하시던데 조심할게. 아, 참.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 자리가 비었거든. 거기에 진용이 앉히려고 하는데 어떠냐?”
대답 대신 이병렬은 김진용을 먼저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내가 믿을 사람이 필요해. 다른 생각 안 품을 사람.”
강성태의 답을 들은 이병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저는 병렬이 형님 모시겠습니다.”
지켜보던 김진용이 고개를 숙이며 뜻을 밝힌 직후였다.
“이 새끼가 미쳤나? 어디 보스가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고 나와?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만만했어? 아니면 믿어준다니까 간이 부풀어?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죄송합니다, 형님.”
“가, 이 새끼야. 가서 대표도 하고, 그쪽 일 경험도 쌓고, 그러고 와.”
조태완이 그러더니 거친 말을 쏟아내는 이병렬이 눈시울을 붉혔고, 답을 하지 못한 김진용도 붉어진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궜다.
“대답 안 해?”
“형님 모시게 해주십시오, 형님.”
“야, 이 답답한 새끼야. 네가 나한테만 매달리면 우리가 신강남파 안에서 파벌을 만드는 꼴이 된다고. 왜? 엔터 대표가 되면 나 안 찾아올 거냐? 인사 못 하겠어? 그래서 그래?”
“아닙니다, 형님.”
“그러니까 가서 대표 맡아. 그리고 절대 허파에 바람 들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널 찾아가게 된다.”
“예, 형님.”
“그래. 그렇게 보스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얼굴 생각나면 프리 스테이션에 모이자.”
김진용을 다독인 이병렬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치곤이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친위 부대 맡아달라고 했다.”
답을 들은 이병렬이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성태를 살폈다.
“도끼 박은 것도 그렇고, 왜 이렇게 순순히 따라와? 뭐야? 뭔데 이래?”
“이병렬. 조직 제대로 만들자.”
“니미. 여태 그 짓 하자고 이런 거잖아?”
“내가 직급을 뭐라 부르는지 몰라서 그런데, 부두목? 2인자? 그거 맡아주라. 내가 없을 때 조직 이끌 사람.”
“뭐?”
“그래야 내가 마음 편하게 설치고 다니지. 뒷일 감당해 줄 사람이 있어야.”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이 픽 웃었다.
“그럼 씨발. 여태 난 뭐였어?”
“뭐?”
이번에는 강성태가 멍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 씨발. 그럼 여태 날 2인자로 생각 안 했다는 거 아냐? 와, 이거 졸라 서운하네!”
“그게 아니잖아.”
당황하는 강성태를 보며 이병렬이 히죽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