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 9화
제4장. 설마? 아니지?
새벽에 일어난 강성태는 가볍게 몸을 풀고서 기분 좋게 샤워를 마쳤다.
하루의 시작은 안다미의 전화였다.
이모네 가족과의 저녁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이 많아졌다며 미안해했는데 강성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 정말 서운한 거 아니죠?
“절대요.”
- 너무 이러니까 수상하네?
“걱정하지 말고, 건강 좀 챙겨요. 간식 사 갈까요?”
- 아니에요. 다음에 진짜 필요할 때 부탁할게요.
기분 좋은 통화로 하루를 시작한 강성태는 커피를 내려 거실 식탁에 앉았다.
오늘 삼합회의 원자춘만 해결한다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모두 끄는 셈이었다. 대신 성북동 장태섭부터, 어제 원주에서 마주쳤던 네 사람까지, 뒤를 노리는 인간들이 늘어났다는 위험도 준비해야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없는 사람을 쇠사슬에 매달아 죽여가며 배를 채우는 놈,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인간들.
법의 올가미를 뿌리치며 살아온 인간들이라면 언제고 맞붙어서 부숴주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만큼 힘들겠지만 말이다.
커피를 마신 강성태가 아침을 해결할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스피커폰을 눌렀다.
“여보세요?”
- 깡패야. 잠깐 통화 좀 해.
“말해.”
궁금하기도 하고, 어제 일이 미안해서 전화했는데 막상 통화가 연결되자 입이 쉽게 열리지 않은 눈치였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끊고.”
- 미안하다. 내가 부족했어.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강성태는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집에 와서 한숨도 못 잤어. 뭐 때문에 주저했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는데 변명하자면 주눅 들었던 거 같아. 아무리 내가 설쳐도 검찰 조직에는 대항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듣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오늘 사직서 쓰려고. 이게 내가 너한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반성 같아서.
“그럼 변호사 개업해서 그렇게 살아.”
- 한 가지만.
냉정한 강성태의 반응에 강선영이 급하게 통화를 붙들었다.
- 나 사직서 낼 때, 부장 따귀 때리고 나올 거야. 어차피 내가 통쾌하자고 하는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주눅 들었던 게 부끄러워서 그렇게라도 해보려고. 나중에 어려운 사건 생기면 연락해. 깡패 너는 어떤 사건이든 평생 무료로 해줄게.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 음성에는 확실히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선영. 너 부장검사 데리고 나올 수 있어?”
당황스러운 질문에 강선영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따귀를 때리겠다며? 데리고 나올 자신은 없어?”
- 왜 그러는데?
“나도 따귀 몇 대 때리게.”
- 진짜로 말해.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들려?”
당황한 감정을 대신하는 것처럼 강선영의 숨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들렸다.
“그럴 자신 있으면 사표 쓰지 말고 자리 지켜. 그리고 부당한 지시에 맞서서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 네가 어제 외면한 자리에 여동생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 그게 부장을 데려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분명하게 말하지만, 네가 보는 앞에서 따귀를 때릴 거다. 네가 진짜 어제 일을 반성하고 제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 정도 상황에 마주서는 각오쯤 보여줘야지.”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대신 너를 만나러 간다고는 말 안 한다. 어디로 데려가면 돼?
“내일 저녁에 그때 주점으로 와.”
- 사표는?
“일단 부장검사 볼 때까지 보류.”
조직의 보스가 되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검사의 사표 제출까지 결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 혹시 부장한테 일정이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 어제는 어떻게 됐니?
“자리에 없었던 일까지 알려고 하지 마.”
또다시 차갑게 건너간 강성태의 대꾸에 강선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내일 보자.
짧은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냉장고를 향해 움직였다.
**
아침을 먹고 난 조태완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명품 셔츠에 카디건, 정장 바지를 걸치자 환자복을 입었을 때와는 다른 조태완만의 독기와 근성이 돋보였다.
옷을 갈아입은 그가 한동안 지냈던 병실을 돌아볼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김정훈과 박노익이 들어왔다.
“왔어? 앉지.”
짧게 고개 숙인 박노익에게 조태완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앉자 김정훈이 냉장고에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보기 좋으십니다.”
“모처럼 환자복을 벗으니까 날아갈 거 같다. 마셔. 직접 달여서 몸에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나이 먹은 조직의 보스와 고문이 홍삼 달인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저쪽 건설사 말인데. 장태섭에게서 손 떼고 싶다던 건설사.”
잔을 내려놓은 박노익은 시선만 들고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지 말고 우리 보스와 직접 연결하면 어때? 대신 장태섭이 차지한 땅 가져오는 비용으로 퉁 치는 거로. 어때?”
“젊은 보스가 그러겠답니까, 형님?”
“우리 보스는 그냥 이세종에게 넘기겠다고 하는데 내가 중간에서 틀었다.”
“갑자기 이렇게 나오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조태완이 입술을 움직여 비릿하게 웃었다.
나이를 먹은 데다, 주식판에서 마귀들과 뒹군 박노익에게 어설프게 거짓말해봐야 먹히지도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세종이, 그 새끼를 키워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는데 결정적인 순간이면 꼬리를 말거든. 그런 놈 아가리에 백억이 넘는 돈을 물려주느니 내가 중간에서 줄가리 하려는 거지.”
“보스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건 맡겨둬.”
강단을 되찾은 조태완의 눈이 박노익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강남 삼대장 중 하나였던 조태완은 전국의 조직들이 모두 인정하는 수완가였다. 박노익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형님 정도 되시면 저를 찾지 않아도 건설사와 얼마든지 연락되실 텐데, 왜 굳이 저를 부르셨습니까?”
“네가 그랬지? 나이를 먹은 거 같다고. 나도 그렇다. 거기에 믿었던 동팔이에게 한칼 먹고 보니까 굳이 반칙해가면서 남의 밥상에 손 올리고 싶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김정훈을 돌아보았던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거의 다 죽은 나를 살려준 사람이 우리 보스다. 사람 키운다는 거 우리 바닥은 어렵다는 거 너도 알 거라 믿는다. 기껏 키워봐야 언제 등을 찌를지 모르고, 잘해야 업장 하나 얻어서 은퇴하는 게 다잖냐.”
고개를 끄덕인 박노익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내가 우리 보스 성장하는 걸 지켜보고 싶다면 믿겠냐?”
“상황이 참 어렵습니다, 형님.”
“내가 그렇다. 그런데 보스에게 등을 맡기고 보니까 세상이 또 이렇게 편할 수가 없어. 그러고 나니까 아까 말한 대로 성장하는 걸 보고 싶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지.”
“뭡니까, 형님?”
어느새 대화에 빨려든 데다, 강성태가 궁금한 박노익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우리 보스가 워낙 정직해. 그게 지랄이지.”
조태완의 말이 웃긴지, 강성태의 모습이 그렇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답을 들은 박노익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음을 터트렸다.
“깡패라는 게 반칙도 좀 하고, 억지도 부리고, 안 내키면 두들기기도 하고, 말도 바꾸고, 어? 그래야 하는데 이건 뭐 아주 바른 생활 보스야.”
“그래서 형님이 등을 맡기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나 말고 다른 놈들에게도 그러니까 문제지.”
박노익은 좀 전보다 좀 더 크게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내가 중간에 건설사 연결해서 작업한 걸 알면 어떨 거 같냐? 우리 보스 성격에 개발 사업 손 떼겠다고 하고, 너 찾아갈 거다.”
“이제 좀 이해됩니다, 형님. 그리고 부럽습니다.”
솔직한 박노익의 말에 조태완이 옅게 웃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지금은 선배들에게 빠따 맞았다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는 놈들도 나오고, 돈 쥔 놈에게 바로 고개 숙이며 형님이라고 부르는 세상이다. 적응 잘한 너 같은 건달만 살아남는 세상.”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웃음기를 감춘 박노익이 진지한 얼굴로 조태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머리 굴리지 말고, 건설사 연결해. 원하는 게 있다면 돈이든, 지분이든, 솔직하게 말하고. 내가 어지간한 건 어물쩍 넘어가는데 나 앞에 세우고 뒤에서 모사치는 건 못 참는다.”
“알겠습니다, 형님.”
박노익의 답을 들은 조태완이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너도 슬슬 은퇴 준비해야지?”
“형님 같은 후계자가 없어서 아직은 어렵습니다.”
“하긴.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쪽은 은퇴도 없겠구만.”
“그 대신 금감원과 검찰 쪽의 견제가 심합니다. 당장 다음 주만 해도 금감원 조사가 한 건 있습니다, 형님.”
“바지 세웠을 거 아냐?”
“금감원이 어떤 인간들인데 속을 모르겠습니까? 적당히 먹었으면 이제 손 떼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지난달에 인수한 회사에 자금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아무래도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 할 거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관이 가장 무섭지.”
박노익의 하소연을 들은 조태완이 다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함께하시겠습니까, 형님?”
“오늘은 약속이 좀 있다. 우리 보스에게 뭐 하나 넘겨줄 게 있어서 서류도 챙겨야 하고, 다음에 하자.”
“그러십시오. 그럼 건설사 담당자와 의논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형님.”
몸을 일으킨 박노익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
오전을 빌라에서 보낸 강성태는 점심 무렵에 조태완의 병실에 들어섰다.
“왔어?”
환자복을 벗은 조태완은 어제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앉아. 홍삼 물 한 잔 마셔줘야지?”
병실에 들어오면 거쳐야 하는 것처럼 홍삼 달인 물을 권한 조태완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 봉투 좀 가져와라.”
김정훈이 가져다준 누런 서류봉투를 받은 조태완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안에 명함이 있으니까 그리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 넘겨줘.”
“이게 뭡니까?”
“내가 전에 살던 한강 옆의 빌라.”
점심으로 먹을 메뉴 하나를 말하듯 조태완은 툭 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을 알려주었다.
“나를 지켜달라고 해준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고, 전에 목숨을 구해준 값이라고 여겨도 괜찮아. 대신 거절은 안 돼.”
강성태의 반응을 짐작한 조태완이 무겁고 강압적인 표정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결혼도 생각하고 있다면서? 받아.”
“부담스럽습니다.”
“보스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서류는 내일까지 건네줘. 명의를 바꾸는데 들어가는 세금까지 내가 모두 부담할 거니까 나머지는 걱정하지 말고.”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침대는 바꿔야 할 테고, 일단 가구를 놔둘 테니까 빌라를 돌아본 뒤에 필요 없는 걸 말해.”
“고문님?”
“남들은 이런 거 주면 눈이 돌아가. 보스가 눈이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란 거는 아는데 고맙다는 말은 듣고 싶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성태를 향해 조태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전에 박노익을 만났다. 장태섭과 개발 사업을 진행하던 건설사를 만날 건데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게 해줘.”
“이세종에게 넘기기로 했었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 그동안 내가 그 새끼한테 들인 돈 회수한다고 생각해주면 되지.”
“알겠습니다. 개발 사업은 알아서 하시고, 빌라는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그럼 개발 사업을 보스가 원하는 대로 해. 대신 빌라를 받아줘.”
“왜 이러십니까?”
반문하는 강성태를 조태완이 물끄러미 보았다.
“신강남파 보스가 신월동 빌라에 사는 게 싫어서 그렇다. 내가 언제고 찾아갈 곳에 있었으면 싶고. 거기 사는 게 싫으면 그냥 사무실처럼 써.”
강성태의 반응이 못마땅했는지 조태완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이라면 나쁘지 않겠다.
이병렬과 함께 있을 곳, 최치곤이 친위 부대를 이끌고 상주할 곳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그럼 사무실로 사용하겠습니다.”
강성태가 답을 내놓자 힐끔 시선을 준 조태완이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투로 입술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흐흐흐.”
만족한 웃음을 흘린 조태완이 이제야 개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점심 가져와라.”
“예, 형님.”
김정훈이 스마트폰을 꺼낼 때였다.
“원자춘이 오전에 입국해서 지금 아우라 호텔에 있다. 모두 다섯 명인데 스위트룸 두 개를 잡아서 방에 있다.”
조태완이 나직하게 상황을 들려주었다.
“내게도 따로 연락하지 않은 걸 보면 오후에 만나서 지금껏 있었던 일을 흥정할 계획인 거 같다.”
말을 마친 조태완이 눈빛을 빛냈다.
“계획은 세워두었지?”
“필리핀 조직원들을 따로 불렀습니다.”
“그놈들을 왜?”
김정훈을 돌아본 조태완이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지?”
“원자춘을 제거할 생각입니다.”
조태완은 말을 잊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얼굴이었고, 김정훈마저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