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5화
알고 싶던 걸 물었고, 원하는 내용을 들었다.
“같은 조직 동생도 아니고, 박노익 씨 정도면 보복을 염려할 상황도 아닌데 고민할 게 있나?”
“뭘 해드리면 되는 거요?”
“선수끼리 왜 이래요? 문도진이 알죠? 강남 삼대장 중 한 명이 갑자기 사라졌잖아. 그런 뒤에 태완이파가 카지노를 흡수하면서 느닷없이 신강남파라고 이름 바꾸면서 강성태가 두목이 됐고. 떠오르는 스토리 없어요?”
박노익을 들여다보던 연순동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사라지기 직전에 문도진이 우리 박노익 씨에게 연락했다거나 만나지 않았을까? 태완이파에서 강성태를 앞세워 카지노를 흡수하려고 한다, 오늘이나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연락이 끊기면 검찰이나 경찰에 연락해서 찾아달라. 어때요?”
“만났다면 장소가 있어야 하고, 통화를 했다면 기록이 남아야 할 텐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대포폰이라는 좋은 물건이 있어요. 갑자기 문도진의 연락이 끊기자 한강에 가서 버렸다. 법정에서도 그렇게만 해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3년에 5년은 분명한 거요?”
“의심이 많으시네. 우리 커피 한잔할까요? 내가 밖에서 주문할 건데?”
의미를 담은 눈초리로 말을 건넨 연순동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평검 때 모시던 분이라 특별하게 배려하는 거니까 엉뚱한 생각하지 맙시다.”
짧은 경고를 던진 연순동이 309호 검사실을 나섰다.
저녁을 먹은 시간이라 계장부터 여직원까지 모두 퇴근했고, 박노익을 데려가기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할 교도관은 휴게실에 보낸 상황이라서 검사실에는 박노익만 남았다.
‘도주하라고 꼬드기는 거야, 뭐야?’
박노익은 정면에 있는 창을 통해 변호사, 공증, 법무사의 간판이 즐비하게 붙어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더럽게 엮였는데?’
건너편 건물과 어둠을 배경으로 삼은 유리창이 현실을 깨달으라는 투로 형광등 아래에 홀로 앉아 있는 박노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박노익이 쓴 입맛을 다실 때였다.
손으로 대충 가른 듯한 가르마를 한 변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공식적인 선임료만 1억, 사이드로 2억 원을 따로 지불해서 선임한 전직 중앙지검장이었다.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안을 들러본 그가 박노익의 옆에 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이런 걸 기수사건이라고 합니다. 기획수사라는 의미고, 박 사장 같이 원하는 진술을 해야 하는 분을 앵무새라고 불렀소.”
고래 힘줄 같은 돈을 3억이나 처먹여서 선임했더니 기껏 와서 한다는 소리가 앵무새?
“여기 부장검사가 형량을 얼마나 불렀소?”
박노익의 뒤틀린 눈빛 따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변호사가 질문을 내놓았다.
“버티면 25년에 추징금과 벌금, 원하는 진술을 하면 3년에 5년 집행유예, 벌금 5억이라고 들었습니다.”
박노익의 인생이 걸린 조건이었다. 그런데도 변호사는 둘러본 아파트의 전세보증금 얼마, 월세로 전환하면 보증금과 월세가 얼마인지를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박 사장의 몫이오. 만약 협조를 못 하겠다고 결정하면 내가 형량을 절반으로 줄여드리지. 12년에 추징금과 벌금 포함이오. 원하는 진술을 한다면 일주일 안으로 구속에서 풀어드리겠소.”
잠시 변호사를 보던 박노익은 특이하게 엄지 안쪽으로 눈을 문질렀다.
이것들이 사람을 얼마나 병신 같이 봤으면 이 정도로 빤한 디딤 수를 쓰지? 내 돈을 처먹고 검사들과 짝짜꿍해서 선심 쓰듯 던진다는 게 12년을 교도소에서 썩으라고?
뻑뻑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변호사님.”
박노익이 목을 꺾으며 중앙지검장 출신의 변호사를 불렀다.
“내 돈을 3억이나 쳐드시고 한다는 말이 앵무새가 어쩌고에, 12년 이란 소리요?”
“말을 가려서 하세요.”
“가리긴 뭘 가려, 이 씨발.”
“이 양반이?”
“깡패 돈 처먹고 사는 변호사 주제에 어디에서 인상을 찌푸려? 25년? 그런 거로 내가 겁낼 사람으로 보여? 차라리 내가 당신 죽이고 사형받는 거로 흥정 한 번 해볼까?”
쇳소리를 가득 묻혀서 쫙 깐 목소리였다.
거기에 눈알에 독기를 잔뜩 올려서 지금 박노익은 정말 살인도 마다치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어차피 형 집행은 안 하잖아? 25년을 받는 거나, 여기에서 당신 죽이고 사형 처맞는 거나 나한테는 별반 다르지 않아. 10년만 지나 봐. 검사들 싹 바뀌었을 때, 높은 자리 출신 변호사 선임하면 병보석 작업도 될 테니까.”
변호사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가만있어.”
으르렁거리는 박노익의 눈알이 하얗게 뒤집히자, 움찔한 변호사가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지금부터 전화 한 통 할 테니까 그 뒤에 나가. 그리고 곧바로 사임계 제출해. 1억은 정식 계약이니까 처먹고, 2억은 토해내. 안 그러면 사형 아니라 세상 없는 걸 받더라도 당신 자식들에게 해코지할 거니까 알아서 하고.”
차갑게 경고를 던진 박노익이 손을 내밀었다.
“2억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소?”
“휴대전화기 달라고.”
구치소에 수감되며 휴대전화기를 빼앗긴 박노익의 요구였다. 볼을 씰룩했던 변호사가 스마트폰을 꺼내 박노익에게 내밀었다.
입맛을 다시던 박노익이 독한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두 통으로 바꿉시다. 번호를 외우지 못해서 다른 놈에게 번호만 물어보고 끊을 테니까.”
빠르게 번호를 누른 박노익은 인사하는 상대방을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번호를 받아냈다.
그가 새롭게 받은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박노익입니다, 형님.”
변호사를 노려보았던 박노익이 말을 이었다.
“짐작하실지 모르겠는데 내가 들어온 거, 강성태 작업입니다. 문도진이 실종과 관련된 진술을 하면 집행유예 준다는 조건을 들었으니까 틀림없습니다.”
조태완의 말을 듣던 박노익이 입술을 늘였다.
“태섭이 새끼 들어왔다는 건 들었습니다. 어차피 그 새끼가 모사꾼인 거 여기도 다 알 겁니다. 그러니까 그 새끼 나불거리게 나를 미끼로 쓰는 걸 겁니다. 아니면 태섭이 새끼 진술에 힘을 싣는 정도로만 써먹고 버릴 테고요.”
말을 마친 박노익은 심각한 표정으로 조태완의 말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형님. 그보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내일 문기주라는 동생을 보낼 테니까 강성태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기주를 통해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형님.”
시계를 힐끔 본 박노익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10시에 기주든, 변호사든 접견 올 테니까 아마 점심쯤 연락드릴 겁니다. 예, 형님. 쉬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박노익은 스마트폰을 변호사에게 건넸다.
“씨발. 전화 한 통에 1억이라니. 더럽게 비싼 통화 했네. 인생 좀 똑바로 살아, 이 양반아.”
불편한 기색을 억지로 누른 변호사가 스마트폰을 받았다.
**
소신영부터 이우섭, 고강준 정도의 인간들이 따귀를 얻어맞고 얌전히 있을 거라 생각할 만큼 강성태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만, 한 주나, 두 주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던 걸 뛰어넘어서 바로 박노익을 체포했고, 장태섭마저 긴급체포하는 것으로 영상 따위 완전히 뭉개고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거기에 추악한 영상까지 뭉갤 만큼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줄은 몰랐다.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겠지?
일이 급해졌으니 강성태도 깔아두었던 대비책을 급하게 내놓아야 할 때였다.
병실을 나선 강성태는 텅 빈 로비에 앉아 스마트폰 버튼을 눌렀다.
- 미스터 강? 보고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반갑게 전화를 받는 바르지오 만시니의 음성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 멋지게 일을 마무리했더군.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던데 한 번쯤 방문하는 게 좋지 않겠나?
“내 앞가림이 바빠서. 부탁이 하나 있다.”
- 뭐든 말만 하게. 히트맨을 해결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생명의 위협을 받은 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로라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바르지오는 본인이 생명의 위협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들뜬 음성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나?”
- 그걸 알고 싶다면, 곤잘레스 회장을 찾아가 봐.
멋진 선물을 숨겨놓고 포장을 벗길 순간을 기다리는 음성이었다. 이어진 내용으로 짐작할 때, 곤잘레스 회장과 관련된 일인 게 분명했다.
- 자. 이제 미스터 강이 바라는 일이 뭔지 들어볼까?
반쯤 조명을 내린 로비에서 강성태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나니머스의 도움이 필요해.”
- 흠.
바르지오는 바로 잠시 뜸을 들였다.
- 어떤 종류지?
“부패한 관료 몇 명이 있다.”
강성태는 간략하게 영상을 손에 넣은 과정, 그리고 네 사람의 신분을 바르지오에게 들려주었다.
“과거에 어나니머스가 세타스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인질을 구출한 적 있지? 그 정도 수준에서 해결해주었으면 싶다. 저들의 도발을 멈추는 정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 부패한 관료는 썩은 생강과 같아. 어느 나라에나 있고, 토양에 따라 성격과 맛, 냄새가 다르지. 하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확실히 충격적이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건너온 직후였다.
- 급하게 처리해야겠지?
“내가 체포될 수 있다면 설명이 되나?”
- 초특급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군.
강성태는 대꾸하지 않고 바르지오의 답을 기다렸다.
- 어나니머스의 일은 내 권한을 이용해 처리하겠다. 대신 내 부탁도 들어줘.
“말해.”
- 곤잘레스 회장을 찾아가.
분명 멋진 선물을 감춘 느낌이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급했다.
“이렇게까지 재촉하는 이유가 뭐지?”
- 미스터 강. 때로는 서프라이즈도 있는 법이잖나. 즐길 일을 만나면 즐기자고.
“내가 지금 그런 걸 즐길 형편이 못 돼서.”
- 한국은 지금 저녁 시간이지? 오늘 밤에 시작해서 내일 오전에 끝내주지. 대신 통화를 마치는 대로 곤잘레스 회장에게 전화라도 해줘. 내일 자네가 걱정하는 일이 대강 마무리된 상태에서 만나면 좋지 않겠나?
“내일과 모레는 저녁 약속이 있어.”
- 점심은?
애원하는 듯 매달리는 바르지오의 요청에 강성태는 픽 웃었다.
“알았다. 바로 전화하지. 곤잘레스 회장의 일정을 봐서 내일이나 모레 점심때 방문하고. 됐지?”
- 어나니머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지. 먼저 영상과 네 명의 이름, 직책을 내가 문자로 보내는 주소로 전송해 줘. 그리고 진행과정을 전송할 테니까 혹시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일 경우 주의해.
바르지오의 장담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강성태는 곧바로 곤잘레스 이두안의 번호를 눌렀다.
- 미스터 강? 기다리는 사람 심정을 생각해줘야 하지 않겠나?
바르지오 만시니와 비슷한 느낌으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일이 좀 많았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점심때쯤 방문할까 하는데 시간이 어떠십니까?”
- 오늘 저녁은 어떤가?
아직 특별한 일은 없었다. 거기에 바르지오를 통해 어나니머스가 움직일 테니 조금이나마 여유도 생겼다.
“지금 출발하면 30분 정도 걸립니다.”
- 저녁은? 아직 전이라면 나와 함께하세.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주차장으로 나서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곤잘레스 회장은 어지간해서 살갑게 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만, 계산이 철저해서 신세 진 일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특히 돈으로 보상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인물이었다.
히트맨을 해결한 데 대한 보상 때문인 듯싶은데 가서 만나보면 알 수 있을 일이었다.
병원 주차장으로 나선 다음이었다.
뜻밖에도 유섭우가 서 있다가 상체를 깊게 숙였다.
“고문님이 보내셨어?”
“예, 형님.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모시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형님.”
기껏 온 사람을 돌려보내기는 어려웠다.
“잠깐 호텔에 들렀다 갈 거니까 일단 출발해.”
강성태를 위해 뒷문을 열어준 유섭우가 조수석에 앉았다.
호텔을 들은 덩치가 승용차를 움직여서 곧바로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 직후였다.
우우웅.
바르지오 만시니가 보낸 문자가 스마트폰 액정에 올라왔다.
강성태는 영상이 담긴 주소를 연결했고, 이어 네 명의 직책과 이름을 적어서 답신을 보냈다.
박노익과 장태섭의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 운전하는 덩치와 유섭우의 표정이 무거웠고, 빤히 느낄 정도로 승용차 안에 긴장이 맴돌았다.
“성북구는 어떻게 됐어?”
“윤중선 대표가 전화와 문자를 계속 보내더니 장태섭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연락이 딱 끊겼습니다. 도끼는 아직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형님.”
답을 한 유섭우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돌렸다.
“저, 형님. 조사받게 될지 모르는데 도끼를 회수하면 어떻겠습니까?”
“놔둬.”
“사실은 고문님께서 말씀하신 일입니다, 형님.”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그냥 둬.”
“예, 형님.”
긴장을 풀어보자고 나눈 대화의 끝에서 유섭우는 걱정을 가득 안은 얼굴로 앞을 보았다.
“내가 괜히 버티는 게 아냐.”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강성태는 나직하게 생각을 내놓았다.
“언제 내가 긴급체포될지는 모르지만, 진용이, 정훈이, 너, 이렇게 셋이 고문님과 병렬이 지키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뭔가 말하려던 유섭우가 고개만 숙이고 말았다. 그가 품은 염려, 그 때문에 하려던 말을 강성태는 충분히 짐작했다.
“물론, 고문님부터 병렬이까지 전부 구속될 수도 있는데 그때 진짜와 가짜가 전부 드러날 거다.”
“예? 형님?”
“누가 기회를 봐서 등에 칼을 꽂을지 알게 될 거라고.”
잡혀가면 얼마나 살다 나올지 모르는데 배신자를 알게 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유섭우의 옆모습에 담긴 의문을 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어둠은 빛에 대항하지 못한다.
회칼을 들고 몸뚱이를 찌르는 살벌한 싸움을 하고 다니지만,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폭력 조직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이번 긴급체포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문제는 공권력이 썩었을 때였다.
소신영, 이우섭, 고강준 같은 인간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큼 주변이 썩어버리는 데 문제가 있었다.
세타스 카르텔을 상대로도 인질이 된 동료를 구출해 내는 어나니머스의 능력이라면 고강준에게 좋은 교훈이 될 거다.
이번 일은 따귀를 몇 대나 때려야 하는 거지?
박노익의 긴급체포는 세 대, 장태섭은 그냥 넘어가고.
호텔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강성태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따귀의 숫자를 헤아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