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권 -17화 (249/513)

12권 -17화

대강 이야기를 마친 강성태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바르지오 만시니가 보낸 메시지를 알려주는 스마트폰의 진동이 있었다.

문자의 내용은 붉은 점이 찍힌 지도였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에 담긴 지도를 키운 강성태는 장소를 확실하게 눈에 담았다.

“이제 가봐야겠다.”

“경호 팀장의 임무가 그리워지면 언제고 연락 주십시오.”

“제안만 고맙게 받는 거로 하자.”

짧게 인사를 마친 강성태는 존 보스만의 배웅을 받으며 객실을 나섰다.

실력을 먼저 평가할 것 같지만, 세계적인 부호의 경호 팀장은 신뢰할 만한 사람의 소개를 통해 연결되는 게 가장 일반적이었다.

누군지 알 길은 없지만, 당연하게 강성태를 소개한 사람이 있었겠다. 다음 단계로 보리스 파리오는 강성태의 과거 경력과 실력, 최근 활동을 철저하게 검증했을 테고.

경호원을 하지 않을 강성태에게는 불편한 현실이지만, 곤잘레스 이두안을 지켜낸 데다, 그 과정에서 가페와 스페츠나츠의 히트맨을 제거했으니 그쪽 바닥에서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며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과 그가 내놓은 제안을 떠올렸다.

보리스 파리오와 같은 거부가 강성태를 찾았다.

카페와 스페츠나츠 히트맨을 상대하며 곤잘레스 이두안과 딸 로라의 생명을 지켜낸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였다.

이게 곤잘레스 이두안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이 된다.

가페의 히트맨을 제거한 강성태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은 꼴이어서 그의 체면과 평가가 망가질 수 있었다.

어쩐지 감당하기 버거운 제안을 내놓더라니.

단순히 그의 자부심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여겼었는데 거기에 보리스 파라오를 비롯한 세계적인 갑부들에게 흠 잡히고 싶지 않은 욕심도 담았던 모양이었다.

사업을 크게 하는 기업인들, 거부들의 생각과 행동, 판단은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고, 특히나 많이 가진 자들의 복잡한 계산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세계에 속한 이들만 지니는 자부심과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성태가 로비로 나섰을 때, 로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유섭우가 다가왔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형님. 형님은 드셨습니까?”

“위에서. 지금 잠실 한강 공원 주차장으로 가야 하는데 그쪽으로 승합차 한 대를 부를 수 있을까?”

“동생들은 몇 명이면 되겠습니까, 형님?”

“운전하는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툭하면 덩치들이 가득 탄 승합차가 등장하는 마당이라, 달랑 차 한 대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 보였다.

실제로 유섭우는 짧은 통화로 강성태가 원하는 승합차를 마련했다.

“차는?”

“입구에 대놓았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유섭우가 몸을 돌려 호텔 입구로 향했다.

**

증권사 직원들과 근처 회사원들이 회식 혹은 가벼운 접대에 주로 이용하는 여의도의 단란주점은 확실히 강남의 클럽이나 룸살롱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던 윤중선은 룸으로 들어서는 이세종을 보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좀 늦었지?”

“저도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안쪽으로 앉으십시오, 매형.”

상석에 앉은 이세종은 심드렁한 얼굴로 천장과 벽, 테이블, 가지런하게 놓은 잔과 우롱차들을 돌아보았다.

방송국 보도국장인 그에게 익숙한 장소였으나 이미 강남의 화려함에 젖어버린 뒤라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장태섭을 밀던 건설사가 만세를 부르는 분위기입니다.”

“만세라니?”

윤중선이 따라주는 양주를 스트레이트 잔에 받은 이세종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장태섭이 구속되는 바람에 불똥이 튀지 않을지를 염려하는 데다, 투자금을 회수할 방법을 모색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인간이 돈이 어디 있어? 투자금으로 주택과 토지를 사들였다며?”

“그 주택과 토지를 압류해서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모양입니다.”

“그럼 우리한테 유리한 거 아냐? 장태섭이 날아갔으니까 남은 건 우리밖에 없잖아?”

“저, 매형.”

대답 대신 윤중선은 질문을 던진 이세종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번에 박노익이라고 주식 하는 깡패 두목과 장태섭이 구속된 게 사실은 신강남파 강성태 회장을 노린 거란 말이 있습니다.”

“뭐? 그런 소리를 어디에서 들었어?”

스트레이트 잔에 엄지와 검지를 걸친 이세종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윤중선을 바라보았다.

“저쪽 건설사에 들렀던 김에 우리 쪽 시공사에 들렀었습니다.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일단 숨죽이고 지켜보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말입니다.”

보도국장인 이세종이 모르는 일을 윤중선이 안다고?

의심을 풀지 않는 눈초리로 윤중선을 바라보던 이세종이 룸의 구석에 달린 투박한 조명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장에 온다던 인물 중 고검장이 있었는데?”

“별장이요?”

“아냐. 그래서? 지금은 일단 보류다?”

“저쪽 건설사가 장태섭의 땅을 확보하면, 그걸 우리 쪽에서 되사는 거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저쪽 건설사는 얼마라도 투자금을 회수하는 거고, 우리는 바로 사업할 토지를 확보하는 거라 가장 좋은 결과입니다.”

“그게 최고네. 다 됐잖아.”

흡족해하는 이세종 앞에서 윤중선은 뭔가 뒷덜미를 잡힌 얼굴이었다.

“뭔데? 저쪽 만세 부르지. 장태섭이 사놓은 주택과 토지 한꺼번에 가져오지. 문제 될 게 없잖아?”

“그게 매형. 아직 강성태 회장이 구속되지 않아서 다른 조직과 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농성장에 박힌 도끼를 빼낼 조직을 찾아다녔는데, 아직은 다들 강성태 회장을 겁내는 분위기입니다.”

“거! 깡패들 빼고 하면 안 되나?”

이세종의 짜증을 받은 윤중선이 쓴 입맛을 다셨다.

“필요악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깡패들을 빼면 진짜 생 양아치들이 나타나서 보상이 어쩌고, 합의가 어쩌고 손 벌리는데 그거 미치고 팔짝 뜁니다.”

“누가 그걸 몰라? 짜증나니까 그렇지. 술이나 마셔.”

술을 반쯤 마신 이세종이 잔을 내려놓았다.

“저기 매형. 강성태 회장님과 연결은 아무래도 어려울까요?”

“내일 검찰청 담당 기자에게 알아보기는 하겠는데 지금 연결해도 구속되면 말짱 꽝 아냐?”

“이 바닥에서 그런 분 뵙기 쉽지 않은데, 참 아쉽습니다. 제가 법인 카드를 드렸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매너는 또 어떻고요?”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옆에서 바로 주먹이 날아와.”

“그날 도끼 박는 모습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던 끝에 이세종은 미간을 바싹 좁히며 고개를 비틀었다.

“신강남파 강성태가 구속된다면?”

“예?”

“조태완 고문부터 줄줄이 달려들어 갈 공산이 크다는 건데?”

“조태완 고문은 누굽니까, 매형?”

“가만있어 봐.”

궁금해하는 윤중선을 누른 이세종이 계속해서 눈알을 굴렸다.

“박 뭐라는 주식 깡패랑 장태섭이 긴급 체포될 정도면 검찰이 아예 작정했다는 거고, 강성태를 노리는 말이 돌 정도라면 별장에서 큰소리치던 일이 틀어졌다는 의미가 되지?”

앞쪽에 취재 기자들이 앉아 있다는 듯 이세종은 혼잣말로 사건을 정리했다.

“그럼 우리 회장님도 검찰 편에 섰을 테니까 이럴 때 지난번 특집 보도에다가 조태완부터 줄줄이 신강남파의 내막을 먼저 보도하게 되면?”

혼잣말을 계속 늘어놓던 이세종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특종이잖아! 그것도 회장님과 자제분인 상무님의 마음에 쏙 드는 특종! 미리 방송하는 게 불편해하시면 준비해 놓았다가 강성태 회장이 구속되는 순간, 보도해도 되고.”

말을 마친 이세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형?”

“마시고 가. 나는 아무래도 급하게 회사에 들어가 봐야겠다. 기자들도 불러야 하고.”

테이블과 소파 사이를 옆으로 움직인 이세종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룸을 나섰다.

너무 급한 거 아닐까?

아무리 봐도 강성태 회장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은 아니던데?

어쩐지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윤중선은 입맛만 다셨다.

**

거대한 유리를 깔아놓은 듯 고요한 한강은 건너편 건물들의 불빛을 품은 채 도도하게 흘렀다.

강을 따라 이어진 조명,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잠실 한강 공원 주차장은 늦은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복잡한 주차장에서 빈자리를 찾아 차를 돌리며 참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강준은 벌컥 화가 치밀었다.

영상이 터지면 뭐? 어떻게 하라고?

막말로 선출직이어서 선거 때 고개 숙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총장에게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대놓고 눌러 볼까 하는 욕심도 생겨났다.

두 번째로 주차장을 돌던 고강준은 막 빠져나가는 승용차를 발견하고 그곳에 멈췄다.

‘얼른 좀 나가라.’

어쩌다가 깡패에게 걸려서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을까.

검찰이 아니고는 절대 죄를 물을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고강준은 고검장이었다.

누가 감히 자신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또다시 치민 화를 누르며 그는 막 빈자리에 거칠게 차를 넣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는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두 번째로 주차장 입구와 편의점 방향을 돌아볼 때였다.

번쩍하고 대각선 구석에서 상향등을 켰다 끄는 승용차가 시선을 붙들었다.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앞에서 운전석 문이 열리고 소신영의 기사나 비서인 듯한 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고강준도 혼자 왔는데 직원을 데리고 와?

그렇더라도 고강준을 발견했다면, 직접 내려서 오든가!

“소신영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다가온 직원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근엄하게 그를 바라본 고강준은 기다리는 승용차를 향해 걸었다. 그런 뒤에 직원이 열어주는 운전석 쪽 뒷자리에 몸을 넣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주차장의 조명을 받은 소신영이 참담한 얼굴로 고강준을 맞았다.

“이우섭 부의장도 같은 문자를 받으셨답니다.”

빤히 짐작했던 내용을 소신영은 새삼스럽게 내놓았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던 대응에 놀라 달려오기는 했는데 우리 계획대로 밀고 나가면 어떻겠습니까?”

“어나니머스라면 그들이 말한 대로 무작위로 영상을 배포할 능력을 지닌 놈들이오. 거기에 아무리 내가 우리 언론을 이끈다고 해도 해외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고, 또 이 부회장은 우리가 먼저 약속을 어겨 일이 커졌다며 원망하는 눈치였소.”

“흐음.”

답답한 숨을 토해내는 것 외에 고강준이 할 수 있는 말이나 대책은 없었다.

“해외 기사를 우리 언론이 모른 척한다고 해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내용이 퍼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으니. 이래서 너무 가르치면 안 되는 건데 우리나라는 개나 소나 너무 배운 게 문제요.”

“그렇다면 회장님은 어나니머스라는 놈들 때문 해외 언론이나 사람들이 영상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소? 도대체 깡패 놈이 어떻게 그런 조직과 연결된 건지, 원.”

혼잣말처럼 뒤를 마친 소신영이 의지가 담긴 눈으로 고강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되면 박노익과 장태섭을 처벌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오.”

고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실은 소신영의 의견이 정답인 거 같은데 깡패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탓이었다.

“어나니머스를 이익집단으로 만들 방법은 없겠습니까? 우리나라 사회를 해외 집단이 통제하려 든다, 뭐 이런 식으로 몰아가면 어떻습니까? 여차하면 우리도 댓글 부대를 만들어서….”

소신영이 고개를 젓는 모습에 고강준은 쏟아내던 말을 중간에서 삼켰다.

분해서 떠들기는 했지만, 영상과 문자에 담긴 기록들이 터지면 고강준은 변호사마저 제대로 하기 힘들 게 분명했다. 그나마 소신영은 돈이라도 많지, 전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고강준은 완전 인생 실패자와 다를 바 없었다.

주변의 시선은 또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멀리 봅시다. 총장이 되시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고강준을 소신영이 달랬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에 영상이 떠올라서 고강준은 울컥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함정에 빠져 마약에 당했다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약을 놓았던 양길동과 강성태를 동시에 긴급 체포해서 먼저 발표하면 영상에 대한 설명도 됩니다.”

“우리 고검장의 생각을 나도 안 해 본 게 아닌데 그렇게 되면 영상이 실제 모습이라고 인정한 꼴이 되오. 총장이 되시는 꿈을 버리실 수 있겠소?”

소신영의 반문을 받은 고강준은 답답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한적한 주차장 구석이었다.

최고급 승용차의 내부는 화려했고, 가죽 시트는 편안했으며, 승용차라 믿기지 않을 만큼 공간은 여유로웠다.

운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소신영의 직원을 보며 고강준은 볼을 씰룩였다.

저게 고강준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하물며 깡패라면 고강준 보기를 염라대왕 대하듯 해야 마땅한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

소신영의 직원을 바라보던 고강준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창에 붙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덩치 두 명이 직원을 밀쳐내는 모습 때문이었다.

“저? 저?”

그 직후에 놀라고 당황한 소신영의 음성이 들렸다.

홱, 소신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고강준은 심장이 승용차의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툭툭툭.

승용차에 팔을 걸친 강성태가 고개를 들이밀며 유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저 깡패가 여길 어떻게?

툭툭툭.

고개를 바싹 들이댄 강성태가 픽 웃으며 소신영 쪽의 창문을 다시 두들겼다.

“창문 안 내리면 깨버릴 건데 여기에서 너무 소란스럽지 않겠어?”

고강준은 태어나서 이토록 소름 끼치게 두려운 순간은 없었다. 그 직후에 느닷없이 왼쪽 볼이 얼얼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생각이 딱 멈춰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