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10화
김민재를 시작으로 맹가네 일가족이 블라이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강성태나 블라이스 엔터테인먼트를 의심해서 일가족이 모두 나선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강성태가 배려해준 자리에 달랑 막내만 보내는 게 결례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맹요선은 김민재에게만 맡겨두기 미안해서 나섰다. 중간에 끼인 맹가네 둘째 딸 맹진선만은 혼자 남기 뭐해서 깍두기로 따라붙었다.
블라이스 건물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크고 웅장했다.
입구에 팬들이 적어놓은 응원 문구와 낙서들이 즐비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TV에서만 보던 아이돌들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블라이스 김진용 대표님 비서실 직원입니다. 김민재 씨 되시나요?”
“제가 김민재입니다.”
투피스 정장의 여직원이 웃는 얼굴로 김민재를 맞았다.
“대표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건물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가리킨 여직원이 몸을 돌렸다.
두리번, 두리번, 화려한 건물 안을 둘러보며 걷는 동안, 맹인선 또래의 아이들 대여섯 명이 계단을 향해 뛰었다.
표정이 밝았다. 복장도, 행동도 흠잡을 구석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맹인선이 연습생으로 있게 된다면 더 무얼 바랄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맹씨 부부는 사시에 합격한 남의 자식 보듯 연습생들에게 시선을 주었고, 맹인선은 공주를 바라보는 시녀처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계단을 보았다.
소리 없이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랐다.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다음이었다.
“이쪽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은 복도였다.
왼편은 사무실로 보이는 방문이 줄줄이 있었고, 오른쪽은 블라이스 홀이라는 목찰과 함께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이사, 상무, 전무, 대표이사, 왼편에 있는 방문의 명판을 읽으며 걸어간 일행 앞에서 여직원은 블라이스 홀이라는 오른쪽 문을 열었다.
“김민재 씨 일행분 모셨습니다.”
맹가네 부부는 김민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을 건넸다. 누가 뭐래도 이 자리를 만들어준 건 강성태였고, 그건 또 김민재가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대표이사도 김민재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나 말이다.
안으로 들어간 맹가네 부부는 딱딱하게 굳었다. 가장 큰 언니 맹요선부터 진선, 인선, 세 자매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란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김진용입니다.”
“아, 예! 김민재입니다.”
그사이 깡패가 분명해 보이는 김진용이 공손하게 김민재의 손을 잡았다.
상상이나 했나?
TV에서 보던 아이돌들이 줄줄이 관람석에서 일어서서 김민재와 맹가네 식구들을 맞을 거라고. 심지어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린 매니저, 보컬 트레이너, 댄스 트레이너, 작곡가까지 김민재와 맹가네 가족을 맞고 있었다.
고수부지에서 깡패들이 빼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너무 두려워서 감정 따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대체 맹가네 식구들이 뭐라고 이렇게 대해줄까.
그것도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지는 막내딸을 위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만, 아이돌 지망생으로 이런 환대를 받았다면 적어도 기회가 없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님?”
맹요선의 부친을 김민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런 뒤에 가족들은 차례로 김진용과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마친 김진용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TV의 경합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보컬 트레이너 두 사람이 다가왔다.
“혹시 MR 준비해 온 거 있어요?”
“네. 여기.”
USB를 받은 트레이너들이 맹인선을 데려갈 때, 김진용은 김민재와 맹가네 가족에게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바로 뒤에 지금 인기 절정의 덮어놓고 키운 걸그룹 와라가 있어서 그런지 화려한 공작 틈에 끼어든 비 맞은 닭처럼 보였다.
보컬 트레이너 두 사람이 맹인선을 데리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 뒤에 한 명이 구석으로 움직여 피아노 앞에 앉았다.
“편하게 불러.”
“네.”
맹가네 가족이 보기에도 맹인선은 얼어붙었다. 마이크를 받은 손이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피아노 반주였다.
MR을 틀기 전에 기본 실력을 알아보자는 의도로 보였다.
반주가 시작되었다.
입 앞에 세운 맹인선의 마이크가 좌우로 흔들려서 제대로 실력을 보이기는 애초에 틀린 일로 보였다. 그리고 맹인선은 박자를 놓쳤다. 그렇게 까불고, 날뛰던 맹인선이 노래 한 소절 못했다.
반주가 멈추고 정적이 자욱하게 깔릴 때였다.
앞에 있던 김진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험악한 인상, 커다란 덩치, 굵직한 목과 등판, 팔뚝, 저대로 걸어나가서 맹인선의 따귀를 갈기는 건 아닌가 싶었다.
“무대를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성공해? 오디션을 보러 왔으면 무대를 무서워하지 마!”
쇳소리 가득한 김진용의 음성이 맹인선을 향해 달렸다.
“나를 봐. 엔터테인먼트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대표하고 있어! 대신 어떤 놈이든, 우리 블라이스 식구들 건드리면 대가리를 터트리거나 목을 물어뜯어서라도 지켜내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이거야 원 엔터테인먼트 접수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기야 김진용은 누가 봐도 깡패였다. 원래 블라이스는 김종수 프로덕션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김진용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트레이너들과 비서실 직원, 그 외에 매니저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사이 김진용은 피아노 앞에 있는 보컬 트레이너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약속했지? 나는 여기 맹인선의 평가에 끼어들지 않는다. 결정은 트레이너들과 매니저, 소속 가수들이 해.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내가 정말 존경하는 형님이 보내신 아이다. 제대로 노래 한 번만 부르게 도와주라.”
김진용이 고개를 숙였다.
와라를 비롯해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아이돌들이 긴장한 눈으로 김진용을 보고 있었다.
정적이 흐를 때였다.
“대표님. 같이 무대에 올라가도 될까요?”
와라만큼이나 인기 있는 남자 아이돌 TMI의 멤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MR 주세요!”
반주가 나왔다. 그리고 음악을 신호로 관객석에 있던 아이돌들이 우르르 무대로 올라갔다. 와라까지.
TMI의 멤버가 마이크를 붙들고 랩을 시작했고, 다른 아이돌들이 맹인선을 둘러쌌다.
김진용은 그때도 맹인선을 보고 있었다.
‘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김진용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성태 형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기회를 놓치면 끝이다.’
김진용의 눈을 본 맹인선의 입이 움찔거리며 가사를 내놓고 있었다.
맹인선의 어깨를 감싼 남자 아이돌이 마이크를 앞으로 내밀어 준 순간이었다.
“마지막이야! 더는 못 참아!”
맹인선이 노래를 시작했고,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TMI 멤버가 다시 랩을 했고, 이어 맹인선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맹인선은 트레이너들이 돌아볼 정도로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1절을 마쳤을 때, 커다란 환호성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다들 경험했고, 이겨냈던 떨리는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에 환호성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봐! 제대로 하니까 얼마나 멋있냐!”
김진용이 흐뭇한 감탄사를 내뱉을 때, 김민재는 마른침을 삼켰고, 맹가네 식구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박노익은 고작 20분 만에 방지병원에 들어섰다.
국산 리무진 승용차에서 내린 박노익은 운전했던 덩치를 손으로 불러 곁에 세웠다.
“동생, 문기주라고 내가 그나마 가장 믿는 놈이다. 너는 앞으로 여기 동생을 형님으로 모셔라.”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문기주입니다, 형님.”
“강성태다.”
강성태가 손을 내밀자 문기주가 황송한 듯 두 손을 내밀며 상체를 깊게 숙였다.
“이쪽은 최치곤입니다, 회장님.”
강성태는 최치곤을 소개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최치곤입니다, 형님.”
이번에는 박노익이 강성태를 흉내 내듯 고개를 끄덕인 뒤에 손을 내밀었다. 이 양반은 조태완과 다른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가서 저녁 먹자.”
“치곤이는 일이 있어서 먼저 보내겠습니다.”
“그거야 동생이 알아서 해야지. 반가웠다. 다음에 또 보자.”
“예, 형님.”
문기주와 최치곤은 따로 인사하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박노익이 관심을 주지 않았고, 최치곤도 적당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차는?”
“두 시간 뒤에 오기로 했습니다.”
“그럼 내 차로 가.”
박노익이 움직이자 그보다 빨리 걸음을 옮긴 문기주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간 박노익은 자리를 건너가 운전석에 앉았다.
“뭐 해? 얼른 타.”
이미 자리에 앉은 박노익이 양보할 거 같지 않아서 강성태는 조수석의 뒤에 몸을 넣었다.
“배나무집으로 가자.”
박노익이 식당을 정해준 다음이었다.
정문 앞에서 깊숙하게 고개 숙이는 최치곤의 옆을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녁을 먹자고 했어?”
“내일 오전에 회장님 사무실에 가볼까 하는데 어떠신지 물어볼 겸해서 그랬습니다.”
“내 사무실에? 왜?”
질문을 던진 박노익이 어떤 답을 내놓을까 하는 궁금한 얼굴로 강성태를 보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올라온다는 조직들이 회장님을 먼저 찾아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에 찾아뵐 테니, 아무 일 없으면 함께 성북구 개발 현장 둘러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태완이 형님이 그러라고 하셨나?”
“병렬이가 조언해주었습니다.”
“병렬이?”
박노익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신월동 이병렬 형님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형님.” 하고 문기주가 답을 내놓았다.
“아! 이병렬이. 이름만 불쑥 들으니까 헛갈렸지.”
이병렬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투로 박노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나무집은 교보생명 사거리 뒷골목에 있는 생고기 전문 식당이었다. 단골인 모양으로 박노익을 반갑게 맞은 주인이 안쪽의 공간을 따로 내주었다.
곧바로 밑반찬과 숯불, 그리고 고기가 들어왔다.
“술은?”
“편한 거로 하십시오.”
“그럼 소주로 하자.”
강성태가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전화했다는 사실이 박노익을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고기를 구워가며 소주 두 병을 마시는 동안, 그는 내내 유쾌했다.
어릴 적에 조직에 몸담게 된 이야기, 사채업자 박승양에 관해 떠들던 박노익이 한순간,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강남 삼대장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동생들 열 명이 전부라 조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 거기에 태완이 형님 물러나셨고, 도진이 형님은 뭐.”
입맛을 다신 박노익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동생이 강남대장이다.”
말을 마친 박노익이 소주잔을 내민 뒤에 입으로 가져갔다. 함께 소주를 마신 강성태가 병을 들어 잔을 채운 뒤였다.
“성북구 개발 사업만 제대로 마쳐. 그러면 처음으로 강남과 강북을 하나로 묶는 진짜 보스가 탄생한다.”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왜 이래? 내가 검사 사무실에서 태완이 형님께 전화했었다는 말은 들었지?”
강성태를 본 박노익이 묘한 느낌의 웃음을 지었다.
“아까 봤던 기주란 놈을 보내겠다고 했었지. 꼼짝없이 10년 이상을 썩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꾸리던 회사들을 동생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강성태의 눈을 본 박노익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내가 넘긴 것들을 지켜줄 거 같았거든. 동생이 그렇게 버텨줘야 내가 데리고 있던 놈들도 변하지 않고 내 수발을 들어줄 테고.”
“뭘 믿고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태완이 형님을 보면 알지. 이 바닥에서 밀려난 퇴물을 동생처럼 끌어안고 지켜주는 게 어디 쉬운가? 아! 물론 동생이 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동생은 기본을 지켜줄 거 같았다.”
말을 마친 박노익이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마시자, 강남대장.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일 오전에 방문할 일을 의논하려던 자리에서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병렬 때도 그렇지만,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흘렀다.
우우웅.
그 뒤에 문자가 하나 먼저 들어왔다.
슬쩍 들여다본 액정에 이학의 이사장에 관한 자료가 올라와 있었다. 어떻게 된 게 고강준이나 소신영보다 자료가 더 많았다.
문자를 간단하게 확인한 뒤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로 전화가 들어왔다.
“받아.”
편하게 권하는 박노익에게 짧게 고개 숙인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방지병원입니다, 형님.
시간에 맞춰 달려온 아르윈의 전화였다.
“여기 교보생명 사거리에 배나무집이거든.”
- 내비 찍어서 가겠습니다, 형님.
“부탁해.”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동생. 부탁 하나만 하자.”
자리가 끝날 것을 짐작한 것처럼 박노익이 입을 열었다.
“우리 바닥에서 회칼을 사용하면서부터 진짜 깡패는 없다. 돈이라면 환장하는 양아치들 세상이지. 얼른 강북대장까지 차지해. 그리고 중국놈들하고, 일본놈들 쫓아내.”
의아할 정도로 뜬금없는 박노익의 요구였다.
“이대로 십 년만 지나면 말이다. 어지간한 우리나라 조직은 전부 중국과 일본 조직의 시다바리가 된다. 그놈들이 뿌리는 돈에 꽁꽁 묶이는 거지. 솔직히, 동생이 태완이파 흡수하기 전에 그쪽 클럽도 그랬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몰래 약을 먹인 여자들을 동남아 거부들 방에 밀어 넣은 일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회장님은 주식 쪽 일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박노익이 입가를 늘이며 웃었다.
“내가 왜 동생에게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넘기려고 했는지 아나? 우리 바닥에도 일본과 중국의 돈이 넘어와서 돌아. 그렇게 와서 상장사가 지닌 현금 싹 빼내서 도망가지. 멍청한 개새끼들이 돈 몇 푼 얻자고 바지 서서 교도소 달려가고 있고.”
오래 불판에 올라 있던 고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나 박노익에게 달려갔는데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강성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송도 상인이 피도 눈물도 없지만, 그런 꼴은 또 못 봐.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 동생이 나타났을 때 좋았다. 태완이 형님 바로잡아서 함께 가는 모습이 부러웠고. 자, 강남대장. 마약을 막은 것처럼 더러운 돈도 막아.”
묘한 미소와 함께 박노익이 찰랑이는 소주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성태가 잔을 마주치면서, 둘이서 동시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흐하하하하.”
그런 뒤에 몹시 만족한 박노익의 웃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