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 17화
제6장. 고맙습니다, 삼촌.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눈치였다.
신강남파 식구들이 상체를 세웠을 때, 앞쪽 승용차에서 조태완이 내렸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기를 바란 적 없다. 안다미와 함께한 이유도 조용하게 들러서 이남순이라는 어린 피해자를 다독이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속은 그렇지만, 강성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조태완을 향해 움직였다. 강성태가 아는 조태완은 앞뒤 생각 없이 숫자를 잔뜩 불러들일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직접 오셨습니까?”
“보스가 움직이는데 가만있는 건 도리가 아니지. 여기 알지? 조철호 변호사.”
조태완이 뒤쪽 승용차에서 내린 조철호 변호사를 가리켰다. 강성태는 조철호와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퇴근 시간이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고 해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놀라거나 신기한 눈으로 강성태 일행을 돌아보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강 회장님.”
조철호가 조용하게 강성태를 불렀다.
“내려오시기 직전에 피해자의 부친이 가해자들과 합의했습니다.”
그런 뒤에 뜻밖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눈가를 좁히는 강성태를 보며 조철호가 좀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부친이 지체장애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더라도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가 아닌 데다 피해자가 고등학교 1학년인 미성년자라 부모가 대리로 합의한 점에 문제는 없습니다.”
대전 조덕진, 신강남파 강남 식구들, 조태완에 조철호 변호사, 안다미까지 달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엉뚱한 합의가 있었단다.
4백만 원에 합의했다고?
누가 들어도 제대로 된 합의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는 깡패인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합의는 합의고, 죄는 죄인 거지.
말 같지도 않은 합의는 법정에 가서나 사용해.
강성태가 독하게 눈빛을 빛낼 때였다.
대형 승용차 한 대와 중형 승용차 두 대가 도로 중앙의 나무를 돌아서 줄줄이 서 있는 덩치들 뒤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박중배였다.
강성태를 발견한 박중배와 함께 내린 밀동의 덩치들이 저승사자를 본 듯한 태도로 상체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는 곧장 강성태를 향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강성태의 눈빛과 인상이 좋지 않았고, 대전 조덕진과 신강남파 김정훈, 그 외에 덩치들이 살벌한 태도로 둘러싸고 있어서 박중배는 잔뜩 질린 얼굴이었다.
“태완이 형님이시다. 인사 먼저 드려.”
“밀동 박중배입니다.”
“조태완이다.”
상체를 깊게 숙였던 박중배가 황송하다는 태도로 조태완이 내민 손을 공손하게 잡았다.
“누추하지만, 형님. 제가 운영하는 호텔로 가시면 어떠십니까, 형님?”
박중배의 제안을 들은 강성태는 먼저 조태완에게 시선을 돌렸다.
“변호사님과 먼저 호텔에 계십시오. 저는 피해자를 만나보고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혼자서 다녀도 되겠냐는 뜻이 아니라 독이 너무 오른 상태여서 혹시라도 사고 생기는 거 아니냐는 걱정 담긴 질문이었다.
“피해자가 나쁜 생각을 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합의했는지를 알아보고 그 뒤에 형님과 변호사님께 의논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효력이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강성태가 부르는 ‘형님’이란 호칭은 마치 마법의 단어처럼 조태완을 녹이는 느낌이었다.
“보스가 그렇게 하라면 따라야지.”
순순히 뜻을 받아들이는 조태완의 곁에서 강성태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이남순 알지?”
질문을 받은 박중배가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며 고개를 숙였다.
“태완이 형님 호텔에 먼저 모신 뒤에 그리 안내해.”
“예, 형님.”
박중배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김정훈. 태완이 형님 우선 호텔로 가실 테니까 식구들 데리고 모셔. 그곳에서 여기 두 분과 식구들 저녁도 챙기고.”
“예, 형님.”
지시를 내리는 강성태를 조태완이 세상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덕진. 절반은 나를 따라오고, 나머지 절반은 호텔로 보내서 저녁 먹여.”
“감사합니다, 형님.”
뭐가 고마운지 모르지만, 조덕진의 답은 뜻밖에도 ‘감사합니다.’였다.
고개 숙이는 조덕진과 그의 답을 들은 조태완이 묘한 미소를 남기고는 승용차에 올랐다.
조태완이 탄 승용차가 출발했고, 이어 김정훈이 뒤따른 데다, 대전 덩치들 절반이 함께 움직이면서 밀동 군청 앞 공용주차장이 썰렁하게 변했다.
아차 싶은 모습도 있었다.
조태완과 한 무리가 사라지자 공영주차장 안쪽에서 기다린 듯한 승용차들이 줄줄이 강성태를 피해 멀찍이 돌아서 가는 모습이 그랬다.
미안한 일이었다. 강성태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강성태는 앞을 스쳐 가는 승용차를 향해 일일이 고개를 숙여 가며 길을 막았던 점을 사과했다.
‘이럴 필요가 있어?’
조덕진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그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중배가 오면 따라와.”
강성태는 조덕진과 최치곤에게 지시하고 기다리고 있던 벤츠의 조수석에 올랐다.
“성태 씨가 부른 사람들이에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문이라는 분이 알아서 불러들인 모양인데 아직 왜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습니다. 우선 이곳의 관광호텔에 가 있기로 했고, 우리는 이남순을 보기로 했습니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주환아. 삼촌.”
안다미가 들으라는 의도에서 스피커폰으로 하는 통화였다.
- 삼촌 오셨죠? 군청 앞에 계신 거죠?
확실히 좁은 동네라 소문이 엄청 빠른 느낌이었다. 든든한 응원군을 얻은 듯 오주완의 음성에는 힘이 묻어 있었다.
“그래. 남순이에게 내가 왔다고 보자고 해줄래?”
- 문자 보냈어요. 그런데 삼촌, 합의했대요. 그래서 더 억울하대요.
“들었어. 그래서 더 만나보려고. 괜찮겠어?”
- 무서워서 혼자 못 나오겠대요, 삼촌.
“내가 집 앞에 가서 클랙슨 울릴 테니까 내려오라고 해. 흰색 승용차에 비상등이라고 양쪽 깜빡이 켜고 있을게.”
- 그렇게 말할게요. 고맙습니다, 삼촌.
다 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주환은 앳된 음성이었다. 스마트폰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안다미가 통화가 끝나자 시선을 들었다.
“합의를 했어요?”
“아버지가 지체장애가 있는데 그 때문인지 4백만 원을 받고 합의해줬답니다.”
“말도 안 돼.”
“일단 가서 만나보죠. 변호사까지 와 있으니까 이남순을 보고 나서 방법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4백만 원이라고 했어요? 하, 참. 적은 돈이라는 뜻이 아니라요. 살면서 4백만 원이 이렇게 큰돈인 건 처음 알았어요. 그 정도로 합의된다면 가해자 놈들 전부 잡아다가 똑같이 짓밟고, 4백만 원 주면 되겠네요.”
분통이 터진 안다미의 말을 들은 직후에 강성태는 픽 웃었다.
“왜요?”
“4백만 원. 그거 주면 되겠네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안다미가 궁금한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
김진용은 양손을 앞으로 잡고서 이병렬의 뒤를 듬직하게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종환과 유섭우가 양쪽에서 이병렬을 받쳤고, 뒤에 대림동과 강서구 덩치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강성태가 장오기를 두들겼던 바로 그 다방이었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들고 덤비던 장오기가 이번에는 이병렬의 맞은편에 있었다.
“우리 보스가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도 계속 하노이파 놈들 뒤를 봐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광룡 애들과 주접떤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형님. 그쪽 애들이 워낙 거칠어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막말로 두 집 걸러 한 집이 베트남, 필리핀, 광룡 애들 가게입니다, 형님.”
말을 하다 답답했는지 장오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그걸 정리하라는데 왜 계속 뒤를 봐주냐고 묻는 거잖냐.”
“먹어야 살 거 아닙니까? 거뒀으면 위에서 숙소 생활비를 넉넉하게 내려주든가, 아니면 업소를 차려주든가 해야 베트남을 들이받든가 할 거 아닙니까?”
장오기가 당차게 대꾸를 내놓은 직후였다.
“이런 씨발 새끼가!”
욱하는 욕을 터트린 김진용이 불쑥 달려들었다.
콰작!
달려든 김진용은 앉아 있는 장오기의 코에 커다란 주먹을 꽂아넣었다. 가뜩이나 호리호리한 체형인 장오기의 고개가 뒤통수를 당긴 것처럼 홱, 뒤로 넘어갔다. 그런 장오기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은 김진용이 테이블을 향해 세차게 내리찍었다.
콰응! 쾅! 콰응!
“가만 안 있어? 이 개새끼들아!”
몸을 일으키던 안산 덩치들을 향해 이종환이 으르렁거렸고,
“그런데 이 씨발 새끼들이?”
주춤대며 눈치를 살피는 안산 덩치들을 보며 유섭우가 회칼을 뽑아 들었다. 그 직후였다. 유섭우를 따라 강서구 식구들이 허리춤에서 줄줄이 연장을 꺼냈다.
콰응! 콰앙! 콰응!
부서진 찻잔에 이마가 찢긴 장오기의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는데, 등받이에 등을 기댄 이병렬은 삐딱하게 고개를 틀고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만해.”
장오기의 눈이 풀린 걸 확인한 이병렬이 짧게 지시를 던졌다.
“죄송합니다, 형님.”
재킷을 당긴 김진용이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종환아. 안산에 생활비 안 내려줬냐?”
“아닙니다, 형님. 성태 형님께서 다녀가신 뒤로 숙소 운영하라고 2천만 원 내렸습니다, 형님.”
뒤를 향해 질문을 던졌던 이병렬이 ‘그렇다는데?’ 하는 표정으로 안산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신강남파는 숙소 대가리라고 해서 혼자 처먹는 거 없다. 룸빵 가서 양주 처마시고, 말꼬리를 잡느라고 숙소 동생들 배곯게 하는 놈은 개 양아치지, 형님이 아닌 거고.”
뒤로 늘어졌던 장오기가 힘겹게 몸을 세웠다. 제대로 깨진 이마와 주저앉은 코에서 진득한 피가 덩어리째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오기. 너는 은퇴해.”
피를 줄줄 흘리는 장오기를 이병렬은 더할 수 없이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대가리를 긁는 건 용서할 수 있는데 네놈 뒤에 있는 동생들 생활비 하고 밥값 슈킹친 건 용서가 안 돼. 하나 더.”
뭔가 말하려던 장오기를 이병렬은 오른손 검지를 위로 들어 막았다.
“우리 보스가 거두면 그때부터 신강남파 식구다. 우리 보스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마약, 고리대금, 인신매매고, 절대 금지하는 게 동생들 배 곯리는 거다. 넌 그걸 어겼어.”
앞에 한 말과 같은 거잖아?
멍하니 바라보는 장오기를 향해 이병렬이 세차게 오른손 주먹을 날렸다.
쩌윽. 콰다당.
강성태와는 다른 소리가 났지만, 고개가 흔들린 장오기가 테이블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구겨져 떨어졌다.
“아흐, 씨발.”
멋지게 주먹을 날리긴 했다. 그러나 상처가 울린 이병렬은 얻어맞은 장오기만큼이나 인상을 심하게 찌푸리며 오른쪽 옆구리를 감쌌다.
“심전등.”
“예, 형님.”
은은하게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싼 이병렬이 부르자, 안산 덩치 중 체격이 커다란 놈이 몸을 세웠다.
“안산 맡아.”
“예? 형님?”
“생활비 내려줄 테니까 애들 눈에서 배고픔이나 지워, 이 새끼야! 이게 뭐냐? 언제까지 양아치 새끼들처럼 노래방 삥이나 뜯으며 살 거야? 업장? 차려주면 운영이나 하겠냐? 배고픈 동생들이 돈 생기면 주머니에 넣기 바쁘지 일을 제대로 하겠냐고?”
고개를 떨군 심전등을 보며 이병렬은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어떻게 할래? 맡아서 제대로 해볼래? 아니면 우리가 직접 관리할까?”
“오기 형님께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심전등이 답을 한 뒤였다.
“안산은 여기까지다. 너희 모두 은퇴해. 아니면 여기를 떠나든가. 만약 이 뒤로 안산에서 보이면 그때는 내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제대로 알게 될 거다.”
날카로운 눈매로 이병렬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안산,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형님.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자세를 바로잡은 심전등이 상체를 깊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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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순의 집은 원래 외벽 색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낡은 4층짜리 빌라였다.
차에서 내리지 마라.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어라.
조덕진과 최치곤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안다미와 함께 차에서 내려 빌라 현관을 바라보았다.
오주환을 시켜 불러오라던 여학생이었다. 그때 오주환을 괴롭히던 어린 덩치들이 이런 짓을 할 줄 알았다면 아예 반쯤 죽여놓을 걸 그랬다.
어리다고 해서, 반성할 거라 믿고, 뒤를 허술하게 했던 잘못을 강성태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5분쯤 지난 뒤였다.
늘어진 카디건, 시장에서 산 듯한 체크무늬 셔츠, 비슷해 보이는 청바지, 야구 모자를 쓴 여학생이 빌라 입구에서 나왔다.
쭈뼛대는 동작, 바닥에서 겨우 강성태의 허리까지밖에 못 올리는 시선, 마주 잡은 양손, 나온 여학생은 완벽하게 주눅 든 모습이었다.
키도 엄청 작아서 강성태의 명치쯤 닿을까 싶었다.
덩치가 크다고 해서 충격을 좀 더 잘 견디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 어린아이를, 저렇게 작은 아이를 불러서 여러 놈이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