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 3화 (295/513)

15권 - 3화

이어지는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죽도록 얻어맞은 놈들의 바지를 무릎으로 내린 채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이 새끼들이 진짜! 김치 해 봐! 김치!”

이런 협박은 애교였고, 웃지 못하는 놈들에게 정원 가위를 든 김진용이 달려가 헤벌쭉하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유가 있을 거다.

오민상 씨의 마당에서 담뱃불로 점을 하나씩 찍으라고 했을 정도로 계산이 빠른 이병렬이라면 말이다.

이어서 셋을 세우고 사진, 다시 다섯을 모아서 사진, 사진 찍기는 계속 이어졌다.

달라진 모습도 있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러워하던 가해자 놈들이 아예 포기한 얼굴로 순순히 검지와 중지를 들고서 썩어 보이는 하지만 확실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마침내 길었던 촬영이 끝났다.

“가위 이리 줘.”

다시금 앞으로 움직인 이병렬은 정원 가위를 받아 날을 위로 해서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

“잘 들어, 이 새끼들아.”

가해자 놈들은 주먹과 발길을 날리는 김진용보다 히죽 웃는 이병렬이 더 두려운 눈치였다.

“오늘 밤에 단체로 모여서 주접떨다가 패싸움을 한 거야. 알았어?”

옆으로 걷던 이병렬이 걸음을 멈추고 가해자 놈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싫으면 가서 신강남파 이병렬에게 졸라리 맞았다고 떠들어. 그래도 돼. 그럼 너희 잘난 부모가 경찰에 신고하겠지? 내가 잡혀가겠네? 어쩌지?”

모노드라마를 찍는 사람처럼 마지막 순간에 이병렬은 또다시 잔인한 눈빛으로 사악한 미소를 그려냈다.

“그렇게 나불거린 놈은 지금 사진을 전국 조직에 뿌릴 거다. 귀를 잘라주면 천만 원, 손가락 하나당 또 천만 원, 그렇게 현상금을 걸 거라고. 이 개새끼들아. 그러니까 얼마든지 가서 씨부려. 내 이름 다시 들려주마. 이병렬. 잘 기억해 둬.”

이병렬의 경고가 떨어진 직후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에게 인사한 조덕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둥이 나불거린 놈이 생기면 내가 소리소문없이 달아다가 파묻어 버릴 테니까 분명히 기억해라.”

조폭 특유의 쇳소리 잔뜩 묻은 음성으로 조덕진이 으르렁거렸다.

“병렬이 동생이 잡혀가 봐야 돈 4백만 원이면 얼마든지 합의해. 안 해 주면 밤길 걷다가 배때기에 회칼 박힌다는 거 밀동과 대전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테니까. 알았냐?”

뭐도 집 앞에서는 먹어준다고, 광기 어린 이병렬보다, 지금은 대전 두목 조덕진이 가해자 놈들은 더 두려운 기색이었다.

“저기 회칼에 찔린 놈도 마찬가지다. 누가 찔렀는지 너희는 못 봤어. 저 새끼가 뭐라고 떠들든 상관하지 말고 너희는 그렇게만 말해. 알았어?”

“예.”

고개를 떨군 놈들이 죽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저러지 않아도 된다. 막말로 아무리 신고하고, 억울하다고 외쳐봐야 검찰에서 기소 안 하면 강성태는 다칠 일 없다.

조덕진이 저렇게 나서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강준 고검장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병렬이 가해자 놈들의 입을 막으려 협박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시 신고하지 못하게 이남순을 협박하던 상황을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저러는 걸까?

이병렬의 의도가 궁금했으나 강성태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무튼, 또 배웠다.

회칼로 응징하는 것도 효과가 있지만,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을 상대할 때는 아예 인간성 자체를 처참하게 짓밟는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병렬이 어깨에 걸친 정원 가위는 섬뜩했다.

혹시나, 만약, 저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 또다시 비슷한 짓을 저지르려 할 때가 있다면 지금 이병렬이 어깨에 걸친 가위가 무조건 떠오를 거다.

남자는 그거면 충분하다.

“이 씨발 놈을 확 잘라버릴까?”

실제로 그 점을 노린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병렬은 수시로 정원 가위를 내려서 가해자 놈들의 사타구니에 들이밀었다.

거친 동작이었다. 자르지는 않았지만, 몸을 비트는 가해자 놈들의 허벅지나 더러운 물건에 상처가 나기에는 충분했다.

대략 20분에 걸쳐 가해자 놈들의 사타구니에 번갈아 정원 가위를 밀어 넣던 이병렬이 고개를 돌렸다.

“칼 먹은 새끼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형님?”

“내가 아는 병원이 있어.”

답을 한 조덕진이 허락을 구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알아서 보내. 그리고 저놈 때문에 문제 생기면 무조건 내가 한 거로 진술해. 걱정하지 말고.”

“고모가 아무리 경위라고 해도 밀동입니다, 형님. 제가 알아서 경찰서 작업하겠습니다, 형님.”

답을 한 조덕진이 이병렬을 향해 눈짓을 던졌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맡겨두라는 신호였다.

**

서대문 기자는 또다시 벨을 눌렀다.

“군청 문화과장으로 있는 가해자의 부친이 사는 집입니다. 십여 명이 넘는 가해자들이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했는데 지체장애가 있는 피해자 부친에게 준 합의금은 4백만 원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내용을 전한 서대문 기자가 몸을 돌려 다시 벨을 눌렀다.

“조금 전까지 거실 불이 켜져 있었는데도 끔찍한 범죄를 쉬쉬한 것처럼 이렇게 문을 잠근 채 답이 없습니다. 밀동의 가해자들의 부모와 친척들은 경찰서 민원실 경위, 군청 과장, 밀동 체육회 회장 등 소위 지역 유지로 평가받는 사람들입니다.”

문을 돌아보았던 서대문 기자가 다시 시선을 카메라로 가져왔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어쩌면 추악한 범죄를 은폐했다는 안도감에 편안하게 잠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피해자는 죽음을 떠올리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상 밀동에서 JBC 서대문이었습니다.”

서대문 기자의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화면에 메인 앵커가 올라왔다.

“참 끔찍한 사건입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경찰청에서는 밀동 집단 성폭행 사건을 축소, 은폐한 정황을 포착하고 오늘 오후 7시 부로 밀동 경찰서장과 민원실장, 민원실 여순경의 직무를 정지시켰으며, 발령 대기를 지시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경찰청에 나가 있는 장대기 기자가 전해드리겠습니다.”

화면이 경찰청을 배경으로 서 있는 기자에게 옮겨갔다.

**

티셔츠와 정장 바지, 점퍼를 입은 연순동은 늦은 시간에 이학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어왔고, 소파로 다가오는 걸 보았는데도 이선정은 고개만 슬쩍 들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후.”

한숨을 내쉰 연순동은 반쯤 기가 꺾인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선정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일단 처음부터 다시 말해봐.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게 모두 당신 때문이야.”

“알았으니까 일단 있었던 일이나 말해. 그래야 대책을 세우든가 하지.”

굳은 표정의 연순동을 향해 이선정은 박노익을 만난 과정과 있었던 일, 오간 대화를 모두 들려주었다.

“돈은 얼마나 건넸어?”

“2백만 엔.”

“일본 돈?”

놀란 연순동의 반응에 이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진짜. 2천만 원 돈을 엔화로 줬으니 살인 교사는 관두고 돈의 출처에 관해서는 뭐라고 할 거야?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해?”

“당신이 워낙 무르게 구니까 그랬지.”

“하, 참. 그건 그렇고 정말 칼로 찌르라고 말했어?”

이번 질문만큼은 켕기는 모양인지 이선정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해. 다른 말 없이 칼로 찌르라는 말만 했어? 그게 다야?”

“여러 번 찌르면 좋겠다고….”

“또?”

“칼로 찔러서 입원하면 잔금 1억8천만 원 더 주고, 만약 죽으면 거기에 1억 더 준다고….”

답을 들은 연순동이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기가 막힌 심정의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막아주면 되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고검장님이 강성태를 편들고 있는데 내 말이 먹히겠냐? 거기에 JBC 소신영 회장도 한통속이고. 답답해서 말해주는데 내가 며칠 전에 잡아넣었던 깡패 두목이 박노익이었어.”

이선정은 눈만 껌벅였다.

“그걸 풀어주라고 지시한 분이 고검장님이라고. 이제 이해가 되냐? 우리가 가만있으면 박노익 말대로 무조건 뉴스에 그 영상 올라갈 거고, 그럼 당신은 구속이야. 구속. 거기에 자금 출처까지 파면 재단 쑥대밭 되는 건 시간문제고.”

“어떻게 해, 그럼?”

“강성태에게 가서 용서 빌라고 했다며?”

“내가 그 새끼한테 가서 어떻게 용서를 빌어? 죽으면 죽었지, 난 못 해! 아니 안 해!”

한숨을 먼저 푹 내쉰 연순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마라. 그걸 누가 강요하겠냐?”

“방법이 있어?”

“방법? 내가 변호사 사무실 차려서 변호할 테니까 재판 끝날 때까지만 구치소에서 견뎌. 당분간 재단 도움 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럼 되지 않겠냐?”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제대로 기가 부러진 탓에 평소라면 표독스럽게 달려들었을 이선정의 음성에 독기는 거의 없었다.

“살인 교사인데 엔화, 그것도 한화 2천만 원이 넘는 증거까지 모두 넘겨준 상황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하냐? 더구나 영상까지 찍혔다며?”

“그거 거짓말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투로 연순동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박노익은 주식 바닥에서 알아주는 조폭 두목이야. 평소에도 상대방의 대화를 녹화하는 인간이 아무렴 작정하고 나온 자리에서 가짜 볼펜을 꽂았겠냐?”

아예 포기한 듯한 연순동의 표정과 음성이 이선정을 다급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

조덕진이 덩치들과 함께 가해자 놈들을 태우고 떠난 다음이었다.

이병렬은 지치고 힘든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안산까지 정리 끝났다. 주둥이 놀린 놈은 이번 주 안으로 찾아낼게.”

주변의 산들이 깊게 감춰두었던 한기를 어둠에 풀어내며 몸이 힘든 이병렬을 노리는 느낌이었다.

“일어나. 근처 카페를 가든, 군청 근처 편의점에 들르든, 따듯한 거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시간 돼? 병원 선생님 여기 와 있다며?”

“남순이 달래주고 있으니까 오히려 시간을 주는 게 좋아. 치곤아! 차 좀 가져와.”

“예, 형님.”

최치곤이 달려가는 것을 본 이병렬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음료도 좋지만, 그보다는 병원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강성태의 시선을 본 이병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껏 이모 장숙경이 육감으로 강성태의 심정이나 상태를 알아보았고, 최치곤이야 워낙 오래 함께한 사이라 눈빛을 읽기는 했는데 이병렬만큼 짧은 시간에 이토록 정확하게 알아채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픽 웃는 강성태 옆으로 승용차가 멈췄다.

어두운 산속이라 라이트 불빛이 문명의 온기를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강성태와 이병렬이 뒷좌석에, 최치곤이 조수석에 탔으며, 김진용과 조봉진, 남은 신강남파 식구들이 각각 승용차에 올라타고서 처참했던 산장의 주차장을 벗어났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는 도중이었다.

“가해자 놈들이 신고하면 그냥 나한테 넘겨. 그래야 고강준에게 말하기 편해.”

“저 새끼들 신고 못 해.”

혹시나 싶어 건넨 강성태의 말을 이병렬은 확신에 찬 답으로 받았다.

“밀동에서 덕진이 형님은 그냥 저승사자야. 강북 개발 사업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 나가도 장태섭을 어쩌지 못한 거랑 비슷해. 유지? 밀동에서 아무리 까불어봐야 대전 조덕진 형님을 거스르고는 제대로 못 견뎌. 다들 그 정도는 알 거고.”

강성태를 힐끔 돌아본 이병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고한다고 해도 고검장 선에서 덮으려고 하면 대전 검찰청이 아예 헛소리로 치부할 텐데 뭐가 문제야?”

역시 이병렬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지를 벗겨가며 사진 찍고 협박한 건 가해자 놈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대전 식구들한테는 오늘 일이 좋은 교훈이 됐을걸?”

출렁이던 길이 끝나고 포장도로에 들어서자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승차감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허튼짓하면 졸라리 잔인하게 응징한다는 걸 봤으니까 덕진이 형님이 따로 단속하지 않아도 당분간은 알아서 숙일 테고. 덕분에 대전 조직까지 깔끔하게 내부 단속한 거지.”

강성태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에 관한 일이라면 확실히 이병렬은 완벽한 스승이었다.

“시간만 좀 있었으면 성인용품 가게에 들렀다가 오는 건데. 급하게 오느라고 그냥 온 게 진짜 아쉽네.”

가로등이 하나둘 보이는 도로에서 이병렬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거 왜 남자 물건 있잖아. 이만한 거. 그거 사 왔으면 애새끼들 뒤에다 하나씩 꽂아줄 수 있었는데, 씨발.”

이런 건 굳이 배울 필요 없겠다.

“아! 태완이 형님 여기 계시지?”

“응. 호텔에.”

“그럼 그리 가자. 인사드리고 여기 일도 말씀드리는 게 좋지. 덕진이 형님이 그리 가셨는데 우리가 안 가는 건 도리도 아니고.”

“그것도 그러네. 치곤아. 호텔로 가자.”

강성태는 순순히 이병렬의 뜻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마시는 것보다는 호텔에 앉아 있는 게 이병렬에게 좀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상처는?”

“별거 아냐. 그나저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상하실까? 내가 멋있어 보였어?”

“염병.”

강성태의 반응에 킬킬대던 이병렬이 옆구리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태완이 형님 아니냐? 덕진이 형님이 도착했을 시간이니까 궁금해서 전화하신 거 아닐까?”

“박노익 형님인데? 잠시만.”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통화되나?

“예, 말씀하십시오.”

이병렬이 궁금해서 돌아보는 앞에서 강성태는 “예.” 하는 대꾸만 건네며 박노익이 전해주는 내용을 꼼꼼하게 들었다.

- 일단 그렇게 말해뒀으니까 혹시 연락 오면 나머지는 동생이 알아서 해. 부이사장이라는 여자 영상 하고 받은 돈도 그대로 있다.

“고생하셨습니다.”

- 나야 뭐 한 게 있나? 대신 말이야. 이번은 나한테 걸렸으니까 무사히 넘어가지만, 또 어디에서 동생을 노리는 인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것만은 조심하자고.

“예, 형님. 감사합니다.”

- 형님 소리, 참. 마약이다, 마약. 그럼 또 연락하자고.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이선정?

너는 일단 따귀 다섯 대로 시작하자.

강성태가 이학의와 연순동을 떠올릴 때, 승용차의 앞유리로 관광호텔의 간판이 들어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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