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 9화
가해자 부모들을 노려보며 눈빛을 번득이던 조태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쇳소리 가득한 질문에 가해자 부모들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없으면 이만 돌아가. 박중배. 저 사람들 보내.”
“예, 형님.”
고개 숙이는 박중배를 보며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저희가 남순이 아버지에게 돈을 더 건네겠습니다.”
“원하는 걸 말하라고.”
“우리 아이들이 더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가해자 부모 대표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강성태는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가해자 놈들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강성태의 웃음을 본 가해자 부모들이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저기, 저희가 남순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더 건네면 될까요?”
“자꾸 돈, 돈 하시는데 돈은 그만 말씀하시고, 더 주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아, 예. 사과해야죠. 사과하겠습니다.”
대답은 쉽게 나왔다. 하지만 가해자 부모들의 눈에 담긴 억울해하는 감정을 봐서는 진심 어린 원망이 나오면 모를까, 잘못을 반성하는 건 틀린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제 자식, 제 가족만 중요한 사람들, 그래놓고 힘에 눌리면 억울하다며 원망하는 사람들.
부모가 무슨 죄가 있냐고?
저런 개떡 같은 모습으로 자식을 가르쳤으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발린 사과를 떠드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아르윈의 부친 이승현을 통해서 충분히 보았었다. 그리고, 지금 가해자 부모들은 그와 똑같은 표정과 말을 내놓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가해자 아이들이 더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만 일어나세요.”
믿어도 될까? 각서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가해자 부모들이 대표에게 의미가 분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박중배. 모시고 나가.”
“예, 형님.”
강성태가 표정을 바꾸자 박중배가 가해자 부모들에게 반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서운 눈짓을 던졌다.
쭈뼛쭈뼛, 가해자 부모들이 모두 나간 뒤였다.
“왜 이렇게 보내? 여기에 학교를 세우려면 저 사람들을 꽉 움켜쥐었어야지.”
조태완이 왜 그렇게 부모들을 밀어붙였는지를 털어놓았다.
“저 사람들은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만난 거로 남순이를 더 괴롭히는 일은 없을 테니 이 정도에서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뭔가 있는데?
진짜 속내를 알고 싶다는 듯 조태완이 집요하게 강성태를 들여다보았다.
강성태는 답을 대신해서 시선을 돌렸다.
“조 변호사님. 직접 맡아주셔도 좋고, 다른 분을 추천해도 괜찮으니까 남순이를 위해 변호인을 선임했으면 합니다.”
“변호인을요? 피해자가 변호인을 선임하는 건, 피해 보상을 제대로 받거나, 가해자들이 엄중한 형량을 받게 하려는 건데 보상은 이미 끝났으니 원하시는 게 혹시 엄중한 처벌입니까?”
저거였나? 가해자 부모들을 일찍 일어서게 한 이유가?
조태완이 강성태와 조철호를 번갈아 본 직후였다.
“전관예우를 비롯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가해자들이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해주십시오.”
강성태의 요구를 들은 조철호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였다.
“엄중하게 법률적 검토를 해봐야겠지만, 이 건은 단순한 성폭행처벌법이 아니라 집단이라 특히나 아동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제7조 위반에 해당합니다. 성인의 경우 5년 이상, 무기징역인데 집단이라 다시 7년 이상, 무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기징역을 받게 해야죠.”
“가해자 중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형벌을 저질렀어도 청소년의 경우는 20년 징역이 법정 최고형입니다. 이론상 그렇고 장단기로 나누면 5년에 10년이 최고형입니다.”
뭔가 갑갑한 표정으로 설명한 조철호가 도움을 청하는 얼굴로 조태완을 돌아보았다.
“합의했을 경우 형량이 줄어듭니다. 거기에 탄원서와 상대방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또 줄어들게 돼서 이 경우 19세 미만의 가해자는 대략 5년 미만의 형량이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순이 아버지가 지체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주십시오. 합의를 위해 협박이나 회유가 있었는지도 알아봐 주시고요.”
강성태의 요구가 건너간 뒤였다.
“그래서 아까 돈을 더 주지 말라고 했었어?”
“예.”
조태완이 물었고, 강성태가 답했다.
“이건 또 언제 생각한 거야?”
“두들기고 난 뒤에 고민하던 일인데 아까 부모라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마음이 굳었습니다.”
“하아, 참. 돈을 주지 말라는 말 뒤에 사과가 먼저라고 해놨으니 아까 그 인간들은 진짜 사과부터 하겠다고 넘어갈 게 아닌가? 대단하다, 대단해.”
감탄을 쏟아낸 조태완이 조철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스가 저렇게 바라는 일이니 조 변이 있는 대로 힘을 써 봐.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하다 하다 안 되면 한두 놈만이라도 무기징역을 맞게 애써달라고.”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태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논이 대강 끝났다.
“저는 이제 서울로 갈까 합니다. 형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 변이 재단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니까 우리도 서울로 가긴 해야지. 그전에 이세종을 만나볼 생각이니까 보스 먼저 출발해.”
“알겠습니다. 김정훈. 태완이 형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예, 형님.”
김정훈에게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밀동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신강남파는 보스가 있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형님도 계셔야죠.”
“어여 출발해. 가서 좀 쉬고.”
조태완이 세상 너그러운 사람처럼 강성태를 향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
박노익은 아침 일찍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승양을 보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앉아요.”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실까?”
“그게 무슨 소리요?”
자리에 앉은 박승양의 삐딱한 말투와 시선을 박노익은 덤덤하게 받았다.
“그룹에 속한 건설사 대표들이 강성태 회장과 약속을 잡았다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계셔도 되냐는 거요?”
손으로 집어놓은 것처럼 눈꼬리가 좁은 박승양이 얇은 입술을 뒤틀면 진짜 승냥이처럼 보인다.
“우리 박 회장이 왜 이렇게 날카로우실까?”
박노익이 넉넉하게 대꾸할 때, 여직원이 들어와 커피를 놓아주었다.
“커피부터 드시오.”
“커피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저쪽은 소신영 JBC 회장에 고강준 고검장, 이우섭 부회장까지 모두 움직였어요. 막말로 피는 여기 박 회장 사무실에서 뿌렸는데 선짓국은 저쪽이 먹는다니까요.”
듣기에도 섬뜩한 표현을 내놓은 박승양이 뻔뻔스러운 태도로 잔을 들었다.
“북극에 사는 곰 아시나? 털이 하얀 북극곰? 그놈이 죽어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펩시 콜라를 사 들고 가는 거라니까요. 이건 반칙이지.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박 회장이 이렇게 한가하면 코카콜라는 누가 파나?”
평소 같으면 그만 좀 하라고 할 박노익이 상체를 끄덕이며 웃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소파 옆의 작은 협탁에 올려둔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받아야 할 전화라 잠시만 실례하겠소. 여보세요?”
누군데 박노익이 급하게 전화를 받지? 혹시?
박승양의 찢어진 눈 안에서 작은 눈알이 반짝였다.
“바쁠 텐데 어쩐 일이야? 그래? 그쪽 일은?”
질문을 던졌던 박노익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잠시 있었다.
“이선정은 어떻게 했어? 뭐?”
박노익이 놀라서 상체를 세우는 순간, 박승양은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고개를 위로 들었다.
뭔데? 왜 그러는데?
날카롭게 살아왔던 그의 감각이 이건 예사 전화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강성태 회장?’
박승양이 입술만 움직여서 건넨 질문에 박노익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봐요. 코카콜라, 아니 건설 공사 어떻게 된 건지?’
다급하게 매달리는 박승양의 심정을 이해했을까.
“여기 박승양 회장이 와 있는데 말이지. 그룹 건설사를 만나기로 했어? 말이 돈 건 아니고, 박승양 회장이 워낙 기업 쪽으로 정보가 빨라서 그렇지. 전에 소개할 건설사가 있다고 말한 것도 있고.”
강성태가 뭐라고 한 모양이었다.
잠시 듣고 있던 박노익이 입술을 늘리며 웃었다.
“내 체면을 생각해주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점잖게 사양했던 박노익이 좀 더 크게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잠시만.”
짧게 말을 건넨 박노익이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고는 스피커 통화를 눌렀다.
“동생 말대로 했어.”
박노익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 안녕하십니까? 강성태입니다.
스마트폰에서 강성태의 음성이 나왔다.
“아니? 강성태 회장님? 아이고, 회장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 전화까지 주시고. 피곤하셔서 어쩔까요? 괜찮으시면 제가 산삼이라도 몇 뿌리 보내드리겠습니다.”
뻔뻔하기로는 대적할 사람이 없을 지경이고, 구렁이 가죽 세 겹을 뒤집어쓴 듯 능글맞은 박승양의 아부였다.
- 말씀만 받겠습니다. 그리고 건설사를 만나기로 한 건 맞습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박노익 형님께서 소개하시는 건설사를 컨소시엄에 포함할 테니 서운해하지 마시고 준비해 주세요.
“서운하다니요? 나는 태어날 때 서운함을 어머니 뱃속에 두고 나온 사람입니다.”
듣고 있던 박노익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박승양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우리 강 회장님께서 박노익 회장을 얼마나 아껴주시는지 알겠습니다. 이 박승양은 그저 언제나 강 회장님께서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낯이 간지러워서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던 박노익이 팔을 뻗어 스피커 통화 기능을 죽였다.
“여기까지만 하자, 동생. 우선 좀 쉬고, 시간 되면 밥이나 함께 먹자고. 그래. 들어가.”
통화를 마친 박노익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제 마음이 놓였냐는 투로 박승양을 바라보았다.
“박 회장. 이제부터 진짜요.”
박노익은 갑자기 변한 박승양의 눈빛과 말투에 얼굴에 담았던 미소를 지웠다. 이렇게 진지한 표정의 박승양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움직입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서 멕시코 공사를 먹고 싶어 하는데 앞에 세계적인 거부를 내세웠고, 뒤에서는 삼합회가 꿈틀댑니다.”
박노익은 눈가를 좁히며 박승양이 내놓는 말에 집중했다.
“중국은 멕시코 건설을 따내서 미국을 압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공사를 따내는 데 거치적거리는 인물이 있다면 삼합회를 이용할 생각인 거 같습니다.”
“삼합회가 우리나라에서 더는 설치기 어려울 텐데요?”
“강성태 회장에게는 어느 정도 제안이 있었을 거요. 그걸 거부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협이 있을 거고. 삼합회는 아시지? 그들이 노린 걸 어떻게 손에 넣는지도 짐작하실 테고.”
고개를 갸웃했던 박노익이 독기가 올라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변을 먼저 제거한다는 거요?”
“공사에서 얻는 수익은 두 번째요. 중국이 진짜 원하는 건 공사에 투입되는 인부니까. 적어도 만 명이 넘는 중국 인부가 합법적으로 멕시코에 들어갈 기회요. 그걸 방해하면 그들만의 방식으로 달려들지 않을까요?”
진지하게 내놓는 박승양의 말은 이유가 어떻든 받아들이고 보는 게 좋다.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아요.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건넨 제안을 강 회장이 거절하는 순간 시작될 테니까. 저쪽은 공산당 차원에서 나서는 거요. 그러니 얼쩡대는 북극곰 정도는 머리를 잘라 벽에 걸어두려고 하지 않겠소?”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서늘한 음성이었다. 주눅이 들만도 한데 박노익은 오히려 잔인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똥개도 삼십 프로는 먹고 들어간다는 내 집 마당에서 그렇게 쉽게 당할 수야 없지.”
“앞으로 힘쓸 일이 많으실 텐데, 어떻게? 산삼이라도 좀 구해드릴까?”
“산삼보다는 잘 드는 회칼이 더 좋지 않겠소?”
능글맞은 박승양의 질문에 박노익은 진심이 묻은 답을 내놓았다.
**
박노익과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창밖을 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밀동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처참한 일을 당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한 건설업체는 자격이 안 돼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니 아래에 속한 건설사들은 그룹사들이 강성태에게서 공사를 따오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더 깊게 몸을 낮추고 있을 거다.
규정, 질서는 일정 수준의 굴복을 강요한다.
그것이 변질되면 단지 자격을 갖췄다는 이유로 한 등급 위의 인간인 양, 온갖 권력을 누리려는 부류가 생겨나는 걸 테고.
방송국 회장, 고검장, 국회 부의장, 그들이 능력을 갖추었다는 건 인정, 그렇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인생을 짓밟을 수 있다고 믿거나, 규정과 질서를 무시하고 행동한다면 그건 따귀를 맞을 짓이었다.
얼마나 더 따귀를 때려야 할까.
강성태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따귀 생각은 그만 잊어버리라는 듯 스마트폰이 손 안에서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차갑게 웃은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서울로 오는 길이라고 들었는데 어디쯤 오셨소?
소신영은 강성태의 동선을 알고 있었다.
이세종, 이 간신 아랫도리 같은 인간, 그사이에 또 소신영에게 충성심을 보이겠답시고 강성태의 동선을 보고한 모양이었다.
“한 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해.”
- 건설사 미팅 때문에 그런데 내일 오후 3시쯤 어떻소? 시간이 괜찮으면 장소를 결정하겠소.
“괜찮아.”
- 그럼 장소를 확정해도 되는 거요?
강성태의 답을 들은 소신영이 밝아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