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16권 - 16화
제7장. 앞은 내가 맡을 거다.
밤 10시가 다 되면서 길었던 조문 행렬이 눈에 띄게 줄었고, 이어서 드문드문 이어졌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울린 뒤였다.
“중요한 조직은 거의 다 인사했어. 지금부터 오는 조직은 내가 따로 데려가서 인사시킬 테니까 들어가 쉬어.”
바깥에서 최치곤이 하는 일을 짐작하는 이병렬이 상체를 기울여 나직하게 조언했다.
커다란 김정훈의 영정, 그 아래 놓인 향로에서 피어난 향이 빽빽하게 공간을 적신 상황에서 강성태는 시선을 뒤로 돌렸다.
힘든 모양이었다.
이병렬은 물론이고, 김진용까지 낯빛이 하얗게 변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올라와 있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선 전화부터 받고 올게.”
“쉬라니까 그래. 분위기 봐서 우리도 갈게.”
이병렬이 권유할 때, 열 명 남짓한 조직이 고개를 숙인 자세로 들어왔다.
장례식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이종환과 유섭우가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얼굴로 에스컬레이터 앞을 지키고 있어서 조문 온 조직원들은 걸음 한 번에도 조심하는 눈치였다.
영정을 향해 향을 사른 덩치가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아홉 명이 비슷한 모습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보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조문객에게 시선을 두었던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숙인 상체 위의 김정훈이 강성태의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토록 편안한 얼굴일까.
‘태완이 형님 지켜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강성태가 눌러두었던 속마음을 전할 때였다.
상체를 세운 열 명이 강성태 앞으로 다가왔다.
“의정부 역전파 오등관입니다, 형님.”
김진용이 나직하게 알려준 뒤였다.
“오등관입니다, 형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강성태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숙였던 오등관이 한 걸음을 물러서서 상체를 깊숙하게 기울였고, 그와 동시에 뒤편에 있던 아홉 명이 몸을 숙였다.
의정부 오등관이 나간 뒤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잠시만 가 있을게.”
강성태가 장례식장을 나서자 이종환과 유섭우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전화 좀 받고 올 거니까 지금처럼 앞쪽 지켜. 힘든 건 아는데 오늘까지만 고생하자.”
“저희는 괜찮습니다. 섭우에게 앞쪽 맡기고 제가 모시겠습니다, 형님.”
이종환이 덩치들을 데리고 강성태를 따랐고, 유섭우는 다시 장례식장 2층 입구로 돌아갔다.
식사하던 공간으로 들어간 강성태는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조문객 때문에 바로 못 받았어. 무슨 일이야?”
- 민병련 번호 알아냈어. 어떻게 할까? 먼저 전화해서 목소리까지 확인할까, 아니면 이대로 부산으로 달려갈까?
민병련의 번호를 확보한 최치곤의 흥분한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달려왔다.
확인해? 아니면 달려가?
강성태는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다가가서 일회용 커피를 들었다.
“치곤아. 현장에 있었으니까 네가 판단해. 김종수가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얼마나 돼?”
일회용 커피를 부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을 때였다.
- 이건 진짜라고 봐. 만약, 이 번호도 김종수가 골사발 돌린 거면 내가 개 호구 되는 거지 뭐.
다부진 최치곤의 대꾸가 들렸다.
“조강치가 움직이면 부산은 말할 것 없고, 경상도 전체가 들고일어나. 알지? 그 정도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고검장 아니라 세상없는 사람이 나서도 뒷수습하기 어렵다는 거.”
- 내가 충일이 형님하고 반드시 민병련 달아올게.
“멀쩡하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몸을 돌린 강성태는 종이컵을 가져가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때까지 최치곤은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강성태가 종이컵을 내렸을 때였다.
- 나 있잖아. 너 만나기 전에는 그냥 개새끼였어. 기억하지? 민재 옷 뺏었다가 너한테 졸라리 얻어맞은 거. 마약 막고, 어려운 사람들 돕고, 선량한 사람들 삥 뜯지 않는 조직원이 된 거로 만족해.
“멀쩡하게 돌아오라니까 무슨 헛소리야? 그럴 자신 없으면 놔둬.”
- 은주랑 밥 먹기로 했어. 내가 그런 기회 놓칠 거 같냐?
돌아오라는 말이 떨어질까 염려됐는지, 최치곤은 숨겨두었던 약속까지 들고 나왔다.
- 성태야. 나 부산으로 가도 되지?
“민병련 전화번호 찍어주고 출발해. 가는 길에 민병련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 오케이! 내가 반드시 민병련, 그 개새끼, 네 앞에 던져줄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남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우우웅.
그리고 그 직후에 최치곤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종이컵을 내려놓은 강성태는 저녁을 먹었던 테이블에 앉았다.
순서대로, 계획대로, 물고 물리게.
표정을 가라앉힌 강성태는 문자를 확인한 뒤에 곧장 번호를 찾아 눌렀다.
독특한 신호음이 울린 뒤였다.
- Hello?
이탈리아 억양이 강하게 섞인 바르지오 만시니의 대꾸가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화이트 테일.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 이번엔 또 누군가? 이름과 전화번호만 주면 내가 화끈하게 뒤를 파주지.
옅게 웃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 민병련의 번호를 보내주었다.
“지금 보낸 번호를 확인해서 현재 있는 장소를 알아봐 줘. 앞으로 네 시간 동안은 이동하는지의 여부, 이동했다면 옮긴 장소가 어딘지도 지켜봐 줬으면 싶다.”
- 그 정도야 프로그램으로 얼마든지 가능해. 더 필요한 건?
“나는 그 정도면 만족해. 내게 원하는 게 있나?”
- 곤잘레스 회장의 일을 보기로 했다며? 그 정도면 만족한다.
수다스러운 느낌의 대꾸가 건너온 뒤였다.
“일주일 뒤에 마카오에서 회의가 있는 건 알지?”
- 물론이지.
강성태가 물었고, 바르지오 만시니의 답이 바로 건너왔다.
“그 자리에서 삼합회의 부두목 섭충명을 제거할 생각이다. 그리고 필요하면 보리스 파리오 회장도 함께 정리할 계획이고.”
워낙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을까, 어떤 경우에도 반사적으로 반응을 내놓던 바르지오 만시니가 침묵의 뒤편에 숨어서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선택해야 해, 화이트 테일. 내 맞은편에서 서서 보리스 파리오 회장을 지킬 건지, 아니면 나와 계속 손을 잡을 건지.”
- 미스터 강. 나는….
“만약 지금 듣는 내용과 마카오에서 마주하는 상황이 다르면 정말 불편하게 나를 만나게 돼. 그러니 답은 일주일 뒤에 마카오에서 확인하는 거로 하자.”
뭔가 변명하려던 바르지오 만시니의 입을 막은 강성태는 또다시 건너오는 침묵을 확인한 뒤에 말을 이었다.
“내키지 않는다면 아까 보낸 번호는 무시해도 돼.”
- 그 정도는 과거 우정으로 충분히 해결되는 일이지.
“고맙다. 화이트 테일.”
가라앉은 바르지오 만시니의 대꾸에 강성태는 먼저 고마움을 표시했다.
“가자. 지옥으로.”
그런 뒤에 뜬금없이 들릴 레드워터의 구호를 나직하게 스마트폰으로 건넸다.
포로라는 개념이 없는 레드워터의 특성상, 이 구호를 외치고 달려나가는 현장에 자비란 없다.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할 때처럼 총을 들고 달려드는 모두를 사살한다.
“만에 하나라도 내 맞은편에 선다면, 최선을 다해.”
- 나에게 협박까지 할 정도인가?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이다. 난 그저 화이트 테일의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 들려준 거니까.”
- 미스터 강. 레드워터 출신이 자네밖에 없는 건 아니란 점을 명심해.
“조언은 고맙다. 대신 내가 구르카를 소집하면 어지간한 피바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아줘. 지금까지 내가 구르카를 동원했던 단 한 번이 화이트 테일을 구출할 때였다는 것도.”
- 흥. 정보는 바로 보내주지.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잠시 우두커니 있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라이벌이라고 여길 정도로 부와 명예를 지닌 보리스 파리오라면 바르지오 만시니에게 엄청난 제안을 했을 게 분명했다.
먼저 계약한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레드워터의 규칙을 어겨가면서 마카오 회담의 정보를 삼킬 정도의 제안, 존 보스만이 강성태를 그의 경호팀장으로 소개할 만큼 대단한 유혹이었겠다.
보리스 파리오 회장은 멕시코 개발 사업을 원한다. 곤잘레스 회장에게서 그 사업을 빼내기 위해 삼합회와 손잡았을 뿐이지, 한국에 마약이 풀리는 일 따위 그의 관심 밖일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리스 파리오의 날갯짓이 삼합회의 멕시코 진출을 돕고, 멕시코에서 개발한 새로운 마약이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오는 길을 연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강성태가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보리스 파리오는.
그래서 존 보스만을 통해 경호팀장으로 함께 지내면 어떠냐는 제안을 건넸던 게 틀림없었다.
바르지오 만시니를 통해 경고는 분명하게 남겼다.
우습지만, 조직 간의 싸움을 거치면서 조금은 풀어졌던 육체적 능력도 최고치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강성태가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보며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지친 얼굴로 들어선 이병렬이 느긋하게 걸어와 인상을 찌푸려가며 맞은편에 앉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강성태를 이병렬은 고개를 기울여가며 살폈다.
“뭐야? 왜 등에 칼 맞은 얼굴로 그러고 있어?”
테이블에 놓인 종이컵과 스마트폰을 보았던 이병렬이 확인처럼 시선을 들었다.
“혹시 정말 못 이길 유혹을 받게 되면 이를 꽉 깨물고서라도 무조건 내게 와. 그게 뭐든 들어줄 테니까. 대신, 내 맞은편에 서지는 마라.”
바르지오 만시니의 일로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요구였다.
느닷없이 건넨 말에 마음 상하지는 않았을까.
“지랄을 하세요, 지랄을. 왜? 깡치가 나한테 돈이라도 찔러줬대? 아니면 김종수가 몇백억 통장에 꽂아줬다고 했어? 사람을 뭐로 보고?”
뱉어놓고 아차 하는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은 단순하고 화끈한 성격대로 별것 아닌 듯 대꾸했다.
이병렬은 진짜 남자구나 싶었다.
고맙기도 하고.
“니미, 등에 칼 맞은 얼굴을 하고 있길래 뭔가 했더니 뭔 김밥에서 단무지만 파먹는 소리를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도 저기, 저거. 커피나 한잔 타줘.”
헛소리한 잘못이 있으니까.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은 강성태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우우웅.
테이블을 울리며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스마트폰을 집어서 문자를 확인한 강성태는 곧바로 내용을 최치곤에게 전해주었다.
“이번에는 또 뭐냐? 진용이 새끼, 아파트라도 한 채 사줬대?”
“부산 HK맨션 501호.”
“정말 진용이 새끼가 그걸 받았어?”
놀라는 이병렬을 향해 강성태는 짓궂은 미소를 먼저 보였다.
“뭐냐고, 그게?”
“민병련이 있는 장소.”
“뭐!”
벌떡, 몸을 세우던 이병렬이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조용히 좀 해라. 너는 다 좋은데 너무 경망스러워.”
“내가?”
독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이병렬을 향해 강성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광주 유충일이 거의 부산에 도착했고, 치곤이가 숙소 식구들 데리고 가고 있어. 내일 새벽이면 민병련 데려올 거다.”
“이런 씨발!”
모든 감정을 ‘씨발’이라는 단어에 담긴 억양으로 표현하는 이병렬을 두고 강성태는 구석의 테이블로 움직였다.
“두 봉 넣어.”
“물은?”
“바보냐? 봉지가 두 개면 물도 그만큼 더 넣어야지.”
흐느끼는 것처럼 웃는 강성태를 보며 이병렬이 반 박자 뒤에 킬킬대는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형님. 제가 타겠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김진용이 급하게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놔둬. 내가 탈 일이 있어서 그래. 한잔 마실래?”
“제가 하겠습니다, 형님.”
“내가 타준다니까. 한 봉? 두 봉?”
“두 봉으로 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곁에 선 김진용이 부담스러운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은?”
“진하게 마시려고 두 봉 타는 거라서 물을 더 넣으면 말짱 꽝입니다, 형님.”
픽 웃은 강성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병렬은 ‘저런 이 씨….’ 하는 얼굴로 김진용을 노려보았다.
**
부산으로 달려가는 승용차 안에서 최치곤은 문자를 받았다.
주소와 함께 부산 HK맨션 501호라는 내용과 ‘민병련이 거기 있단다.’ 하는 강성태의 언질이 들어 있었다.
적어도 최치곤은 스마트폰을 이용할 줄 아는 덩치였다.
지도 어플에 주소를 입력한 최치곤은 엄지와 검지로 위치를 확인했다. 다음으로 주변 사진을 띄워 건물까지 직접 확인했다.
“씨발놈이….”
해운대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있는 7층 맨션이었다.
거주하기 위해서 건축했다기보다는 바닷가 별장으로 사용하기 좋은 구조와 위치였고, 실제로 그런 내용을 홍보하는 기사가 인터넷에 제법 올라와 있었다.
맨션을 충분히 확인한 최치곤은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여보세요?
“최치곤입니다, 형님.”
- 그래. 동생이 어쩐 일이야?
“성태 형님 지시로 전화 드렸습니다. 민병련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형님.”
긴장되겠지?
최치곤의 예상은 그랬다.
- 너도 부산으로 오는 거냐? 함께 움직이려고?
“예, 형님.”
- 어디 근처에 있으면 돼?
“해운대 쪽입니다, 형님.”
유충일이 연달아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 치곤아. 보스께서 말이다. 금식이 형님 은퇴를 내게 맡겨주셨고, 또 광주 동생들 살길을 열어주셨다. 처음 뵌 건데도 배근이 형님 말씀 한마디에 날 믿어주셨다.
비장한 유충일의 음성이 건너왔다.
- 네가 우리 보스와 어떤 관계인지 들었다. 내가 배신하면 당장 네가 죽을 텐데, 이런 자리에 널 보낼 정도로 날 믿어주신 거지. 그러니까 앞은 내가 맡을 거다. 대신 민병련은 네가 데려가.
“형님?”
- 나 말이다. 이런 보스를 모시는 날을 지금껏 바랐다. 그러니까 앞마이는 광주 동생들과 내가 선다. 그렇게 알고 조심해서 와. 끊는다.
일방적으로 말을 건넨 유충일이 툭 전화를 끊었다.
선 굵은 남자와의 통화였다.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묘하게 웃은 최치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