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16권 - 17화
통화를 마친 유충일은 운전하는 덩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해운대 쪽으로 가자.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해운대 근처 적당한 곳에 세워.”
지시를 마친 유충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보았다.
다들 유충일이 마지막에 후회할 거라고 했었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데리고 있는 숙소 동생들도 돌아보라는 충고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들었다.
고등학교 때 말이다.
지기 싫은 성격에 달려드는 놈들을 두들겼는데 하필이면 얻어맞은 놈들이 조직에 속한 꼬마인 게 화근이었다.
학교 앞으로 검은색 승용차가 몰려오고, 정장 차림의 덩치들이 정문 앞에 있다는 말이 들린 뒤에, 체육 선생이던 담임이 달려와 유충일을 뒷문으로 끌었다.
“출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주일 정도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 봐서 연락하마.”
담임은 유충일을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었다.
그날 집에 있는 유충일을 찾아온 건 권투부 친구였다.
“내가 맞은 놈들하고 알거든. 적당하게 날 잡을 테니까 그냥 미안하다고 해.”
그렇게 간 권투부 친구가 떡이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말을 듣고서 유충일은 다음 날 학교에 나갔다.
친구가 죽도록 맞았는데도 계속 숨어 있는 게 비겁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여차하면 그를 때린 놈들과 끝장을 볼 생각도 있었다.
“끝나고 남아.”
얻어맞은 놈들이 으르렁거릴 때, 유충일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인생은 정해져 있는 걸까, 아니면 돌발적인 상황에 따라 매 순간 바뀌는 걸까.
수업을 마치고 비장하게 일어서는 유충일의 앞쪽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불쑥 교실로 들어섰다.
“여기 유충일이가 누구냐?”
교실로 올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유충일입니다.”
머뭇대는 친구들 앞에서 유충일은 당당하게 답했다.
호리호리한데 대신 눈매가 강렬한 남자가 곧바로 유충일을 향해 다가왔다.
“네가 성용이네 애들 두들겼다는 유충일 맞아?”
“예.”
“새끼. 눈매 하나는 마음에 드네. 가자.”
졸라리 맞는 거 말고 더 있겠어?
여차하면 담배 빵이나 칼 빵 서너 개 생기겠지.
다부지게 각오를 세운 유충일은 남자를 따라 교실을 나섰다.
말 한마디 없이 교문까지 도착한 남자는 입구에 잔뜩 서 있는 덩치들을 보고 픽 웃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남자 새끼가 학교 다니다 보면 주먹질 좀 할 수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뭐 씨발, 떼거리로 와서 지랄들을 떨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유충일 앞에서 남자는 잔뜩 몰려와 있는 덩치들을 별것 아니란 투로 대했다.
“이봐, 금식이. 자네가 이렇게 끼어드는 건 반칙이지.”
“야, 이 새끼야! 여기 충일이란 애, 내가 관리하던 꼬마야. 알고서 지지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면서 간 보는 거야?”
권투부 친구가 부탁해서 왔다는 말은 뒤에 들었다.
덩치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던 당당함, 유충일의 앞을 홀로 막아주던 모습, 외롭고 지쳤던 유충일에게 그날 최금식은 영웅이었고, 든든한 벽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유충일은 최금식을 형님으로 모셨으며, 그 뒤로 변함없이 따랐다.
그날, 학교에서 보여주었던 당당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욕심과 야비함으로 바뀌어서 이후로 최금식에게 실망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여기 있으면 될 거 같습니다, 형님.”
생각에 잠겼던 유충일을 덩치 한 명이 깨웠다.
“여기가 어디냐?”
“해운대 호텔 주차장입니다. 차들이 많아서 여기 있으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유충일은 승용차에서 내려 양팔로 지붕을 짚고 섰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틈에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탔던 덩치 둘이 다가와 뒤를 지켰고, 뒤따라 온 승용차와 승합차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유충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거, 참.
광주에서 강성태의 주먹에 얻어맞은 게 엊그제였는데 오늘은 부산 해운대 앞에서 천안 민병련을 달아가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는 거다.
고개를 높게 든 유충일은 부산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호야. 나 말이다. 진심으로 신강남파 성태 형님을 모실란다.”
“예, 형님.”
이미 말했던 내용이라 그런지, 조성호는 당연하다는 음성으로 유충일의 의지를 받았다.
“부산에서 민병련을 달아가는 게 깡치 형님 뒤통수에 칼 박는 일이라는 건 너도 알지? 너희한테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까 뒤로 가서 동생들한테 내용 알려주고 싫다는 놈 있으면 조용하게 광주로 보내. 너도 마찬가지고.”
유충일이 하늘을 향해 말하듯 속을 털어놓은 뒤였다.
“제가 형님 모시고 숙소 지키는 동안, 별 더러운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형님.”
조성호가 다부진 음성으로 대꾸를 내놓았다.
“저나 동생들 모두 형님만 보고 숙소 지켰습니다, 형님. 민병련이 아니라 깡치 형님을 달겠다고 하셔도 다들 형님 모십니다.”
유충일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곳에서 조성호는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잘못하면 죽어, 이 새끼야.”
“동생들 이렇게 생각해주시는 형님하고 죽는 거 아닙니까. 형님이 금식이 형님께 따귀 맞을 때 숙소 동생들 들고 일어났었습니다, 형님.”
“이 씨발 놈들이? 뭐라는 거야, 이 새끼야?”
“형님 마음을 모르냐는 제 말 한마디에 다들 고개 숙였고, 형님 뜻 따르자는 한마디에 주저앉았던 동생들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그냥 깡치 형님 깨러 가시죠, 형님?”
이 새끼가 부산 바닷바람을 쐬더니 미쳤나?
워낙 황당한 요구여서 유충일은 기가 막힌 느낌의 웃음을 흘려냈다.
“형님께서 신강남파 성태 큰형님 모신다고 하면 저나 숙소 동생들 모두 한 길만 봅니다, 형님.”
“알았다, 알았어.”
“감사합니다, 형님.”
“염병. 뭐 이렇게 하나같이 제정신인 새끼들이 없어?”
“형님 동생 아닙니까, 형님?”
“개새끼가 말은?”
싫지 않은 얼굴로 웃는 유충일 앞에서 조성호는 비슷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
5킬로미터 앞에 상주휴게소가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 순간이었다.
“휴게소에 차 좀 세워.”
조강치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지시했다.
조수석에 앉은 덩치가 그의 지시를 스마트폰으로 전하자, 앞에 달리던 승용차 두 대, 뒤로 두 대, 다시 승합차 여섯 대가 차례대로 차선을 바꾸었다.
눈에 거슬리는 상대를 트럭으로 밀어서 제거하던 조강치는 본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어지간하면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드시 승용차를 이용해야 할 경우에는, 늘 줄줄이 차를 세웠고, 좌우를 승합차로 막다시피 해서 움직였다.
짙은 선팅을 한 뒷창문이 날카롭게 빛나는 조강치를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춰주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 조강치는 늘 오늘 같은 날을 걱정하고 염려했으며, 두려워했다. 언젠가 조강치라는 이름에도 주눅 들지 않고 맞서는 놈이 나오는 날 말이다.
‘하필이면….’
유리를 보며 조강치는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울린 신강남파의 젊은 보스가 그 주인공일 게 뭔지.
그뿐이면 그러려니 하겠다.
전국 조직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쌍욕을 얻어먹고도 얌전히 몸을 돌린 꼴이었다.
당장 조강치도 이제는 늙었다는 말이 돌 테고, 부산의 주인 자리를 노리는 서창호와 장세조가 감추고 있던 칼을 꺼내기 좋은 상황이었다.
경쟁을 시킨다고 둘을 키웠다.
혹여 둘 중 하나가 위로 올라설라치면, 적당한 싸움에 내몰아 힘을 빼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었고, 심지어 숙소비를 줄여서라도 인원을 통제했다.
서창호와 장세조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강치의 방식을 모를 리 없었다.
조강치에 대한 충성?
그런 걸 기대했다면 조강치는 벌써 서창호의 칼에 죽었거나, 장세조가 즐겨 사용하는 드럼통에 담겨서 부산 앞바다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을 거다.
지금 두 사람은 조강치가 두려워서 고개 숙이는 게 아니라 서로 상대방에 대한 경계를 놓지 못해서 기회를 노린다고 봐야 했다.
그 증거로 이미 서너 번의 칼부림이 있었다.
보여줘야 한다. 조강치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그러기 위해서는 강성태를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서창호나 장세조를 부러트려야 한다.
당장 서창호나 장세조가 없어지면 조강치의 잇몸이 시리겠지만, 그 아랫놈 중 똘똘한 놈을 골라 조금만 긁어주면 얼마든지 이빨 역할을 할 테니 잠시만 숨을 죽이면 된다.
창에 담긴 모습을 마주보며 조강치가 계산을 마쳤을 때였다.
방향지시등을 반짝인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며 휴게소에 들어섰다.
“오른쪽에 붙여.”
“예, 형님.”
조강치의 지시를 들은 덩치가 휴게소에 들어서기 무섭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어서 휴게소 본관 건물 앞쪽에 만들어놓은 작은 공원에 붙여서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서 내린 덩치가 문을 열어주는 순간에 뒤편에 멈춘 승용차와 승합차에서 덩치들이 우르르, 내려 조강치를 둘러쌌다.
“예? 아저씨? 담배는 저쪽에 가서 피워!”
흡연실에 서 있던 남자 둘을 거칠게 쫓아낸 덩치들이 공원을 빙 둘러서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창호와 장세조가 둘러싼 덩치들을 돌아본 뒤에 조강치에게 다가왔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무슨 말씀을 하시냐며 고개를 조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조강치가 내놓은 탄식을 들은 서창호와 장세조는 다른 말이 없었다.
그 순간에 조강치는 조태완과 박노익에게 실례하겠다며 고개 숙이던 강성태를 떠올렸다.
‘차라리 강성태를 불러서 다독인 뒤에 이 둘을 제거했더라면 은퇴할 때까지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조강치는 불쑥 떠오른 생각을 찌푸린 얼굴 아래로 삼켰다.
“어린놈에게 욕먹은 게 분해서 그냥 내려갈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자.”
조강치는 마음을 비운 사람인 양, 허탈한 표정을 지어가며 말을 이었다.
“강성태를 먼저 잡는 사람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마.”
조강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서창호와 장세조의 눈이 번득하고 빛났다.
‘어설픈 놈들.’
아무리 넉넉하게 계산해도 강성태라면 서창호나 장세조 중 한 명은 고꾸라트릴 게 틀림없었다.
그 싸움에서 강성태도 치명상을 입을 테니 서창호나 장세조 중 살아남은 한 놈을 트럭으로 갈아버리면 조강치는 계속해서 부산의 주인으로 남는다.
조강치가 빠르게 머리를 굴릴 때였다.
“내가 형님 모시고 부산으로 갈 테니까 세조 네가 성태 잡아.”
서창호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조강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강성태를 바로 치지 말고, 이병렬을 먼저 깨버려. 그럼 강성태는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대신 내가 동생들 보내서 최치곤하고, 김진용 작업해줄게.”
욕심 많은 서창호가 이렇게까지 양보한다고?
그것도 최치곤과 김진용을 작업해주면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알았다. 그럼 나는 다음 톨게이트에서 빠져나가서 바로 서울로 갈 테니까 형님 잘 모셔.”
장세조는 또 당연하다는 듯 서창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 새끼들이 혹시?
지켜보던 조강치는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장세조의 식구들이 빠진 부산에서 조강치는 완벽하게 서창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막말로 서창호가 칼질을 해도 막아줄 사람이 없는 꼴이었다.
대가리가 커진 두 놈이 사전에 손을 잡았던가?
신강남파 젊은 보스에게 쌍욕을 먹고도 얌전히 물러났으니 함께 있던 부산 덩치들이 실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서창호를 막아주겠다고 나설 놈이 없었다.
‘이런 개새끼들을 봤나.’
그야말로 개밥 주다가 잣 물린 상황이고, 요강 깨고 엉덩이 벤 꼴이었다.
이대로 죽을 줄 알았냐?
조강치는 독하게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장세조, 네가 강성태 상대하는 거 확실해?”
“예, 형님.”
장세조의 답을 들은 조강치는 다시 고개를 서창호에게 돌렸다.
“서창호. 너는 확실히 이번 싸움에서 세조 밀어주는 거지?”
“그렇습니다, 형님.”
‘오냐, 이 개새끼들아.’
생각과 달리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인 조강치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럼 다 같이 부산으로 가자. 내일 아침에 내가 은퇴한다고 발표하고, 장세조를 세울 테니 그 뒤에 강성태를 작업해.”
“예? 형님?”
장세조는 놀란 얼굴로, 서창호는 또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강성태를 잡는 사람을 후계자로 정하기로 했으니까 다른 말 할 거 없다. 나이 먹은 내가 버티고 앉아 망신 떠느니 장세조가 부산 이끌어. 그럼 되는 거지.”
“감사합니다, 형님.”
감격한 얼굴로 고개 숙이는 장세조를 향해 서창호가 볼을 씰룩였다.
“세조 너는 내일 아침에 부산 식구들 전부 불러.”
“예, 형님.”
“그럼 출발하자.”
조강치는 그 길로 승용차로 걸었다.
이제 장세조는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조강치를 지킬 테고, 기회를 놓친 서창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뛸 게 분명했다.
조강치가 뒷좌석에 앉자 덩치들이 줄줄이 세워놓은 승용차와 승합차에 올랐다.
부드럽게 움직여 휴게소를 빠져나오는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조강치는 비릿한 미소를 그려냈다.
‘이렇게 된다면 방향을 틀 수밖에 없지.’
정답은 강성태였다.
밤사이에 조태완이나 박노익에게 연락해서 강성태를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강성태, 장세조, 서창호가 처절하게 맞붙을 자리만 마련해주면 상황은 끝난다.
강성태가 둘을 모두 해결하면 그의 등에 타고 조태완처럼 고문으로 물러나도 나쁘지 않겠다.
속도를 높이는 승용차 안에서 조강치는 강성태를 떠올렸다.
서창호와 장세조를 상대로 숨결 한 번 밀리지 않는 그 강단이라니.
‘그놈 등에 타야 해. 조태완처럼 대우받으며 고문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새로운 후계자를 정한 조강치가 만족한 웃음을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