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 9화 (341/513)

《341》17권 - 9화

안다미는 그녀의 삶에서 한 달가량의 수명이 녹아 없어졌다고 느낄 만큼 혼신의 노력을 다해 수술에 매달렸다.

그 간절한 심정을 알아주었을까.

심장이 멎었던 최치곤은 CPR을 통해 숨을 되찾았다.

솔직히 말하자.

외과 의사로, 온갖 위급한 환자를 가장 먼저 상대하는 응급실 근무자로 판단하자면 최치곤의 현재 상태는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한 지경이었다.

거기에 유충일이라는 환자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경이롭게 버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학계에 보고해야 할 수준이었다.

응급실에 마련한 두 개의 침대 사이에 앉아있던 안다미는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성태의 말을 전해준 직후였다.

최치곤은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으로 안다미의 손을 움켜쥐었었다.

“성태가…. 성태를 도와야… 하는데….”

숨이 돌아오기 무섭게 최치곤이 흘려낸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수술대 맞은편에서 안다미를 바라보던 부친 안호상의 복잡했던 눈빛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역시나 심장이 멎었었던 유충일 역시 “성태 형님….”이라며 강성태를 애처롭게 찾았었단다.

수없이 찔렸다.

끔찍한 모습의 환자를 수없이 보았던 안다미에게도 잔혹하게 느껴지는 상처들이었다.

도대체 이 두 사람에게 조직은 어떤 의미이고, 강성태는 또 어떤 존재이기에 저토록 수없이 칼에 찔리면서도 도와야 한다는 혼잣말을 내뱉고, 죽음의 문턱에서 애처롭게 불렀을까.

안다미가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볼 때였다.

“선생님. 제가 지킬 테니까 잠시라도 눈 좀 붙이세요.”

함께 수술에 참여했던 방지병원 스태프가 안다미에게 다가왔다. 수술 직후에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난 모양으로 그나마 눈에 생기가 조금은 올라와 있었다.

“아직 괜찮아요. 차라리 조금 더 쉬고 오세요.”

“점심도 안 드셨다면서요?”

“우리가 밥 거르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요.”

안다미가 두 번에 걸쳐 거절하자 방지병원 스태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수술이 끝났는데도 안다미는 강성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먼저, 이렇게 위독한 최치곤을 부탁하고도 자리를 지키지 못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들어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다음으로는 유충일과 최치곤 모두 아직 안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더 직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 심장이 멎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안다미는 무거운 표정으로 최치곤을 살폈다.

두렵다. 의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둔 여자로서.

언제 강성태가 저런 모습으로 안다미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현실을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강성태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보았다. 그러나 강성태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위기에서 빠져나올 거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나.

“안 선생?”

생각에 잠겨 있던 안다미를 유헌우 원장이 깨웠다.

“내가 지킬 테니까 잠깐이라도 쉬어.”

“원장님 먼저 쉬세요. 수술 끝나고 진료까지 하신 거잖아요.”

“나야 뭐, 진료할수록 이게 짭짤해지니까 전혀 피곤한 줄 몰라.”

유헌우가 동그랗게 만든 엄지와 검지를 안다미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돈만 밝히는 의사, 꼭 그런 모습이었다.

“저기, 응급수술용 버스 말인데, 안 박사님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그거 사용료를 내가 현금으로 대신 받으면 어떨까?”

돈만 밝히는 건 아니지만, 돈을 밝히는 것만은 분명해서 안다미는 눈만 껌벅일 뿐, 답을 내놓지 못했다.

**

소신영의 설득에도 강경하게 나오던 고강준이었다.

“이 영상만 증거로 내놓아도 강성태는 무조건 사형입니다.”

그렇게 버티던 그가 정세원과의 통화를 지켜본 뒤에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영상을 꼭 쥐고 계십시오. 우리가 약점을 잡혔던 것처럼 그 영상으로 강성태를 누를 때가 있을 겁니다.”

“참나. 다른 곳도 아니고 부산 검찰이 직접 확보한 영상인데, 강성태가 아직 운이 살아있나 봅니다.”

“그게 다 우리 고검장님이 복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복이라뇨?”

불편하고 아쉬운 감정을 털어내지 못한 고강준이 텁텁한 눈으로 소신영의 답을 요구했다.

“어떤 루트를 거쳤는지 모르지만, 정세원 총수는 분명 그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고검장께서 얼마나 힘을 썼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마지막에 총장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말뜻이 뭘 의미하겠습니까?”

“흐음.”

“이렇게까지 당부했는데도 고검장께서 강성태를 체포하고, 그 이유로 멕시코 건설 공사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

말을 중간에서 삼킨 소신영이 의미가 분명한 눈빛을 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우.”

이번에 내쉰 고강준의 한숨은 그가 결심했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부산 사건을 덮으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보기 전에 마무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소신영을 바라보던 고강준이 마침내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번호를 누른 뒤에 준엄한 표정으로 상대의 대응을 기다렸다.

“나다. 그래. 긴 말 할 것 없고, 보내준 영상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인상착의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얼굴만 어설프게 조작한 흔적도 보이는 거 같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고강준의 눈 끝이 매섭게 올라갔다.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다는 건, 내가 우습게 보였거나 아니면 나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 그게 아니면 뭐야? 내가 동네마다 있는 바보 형처럼 만만했어?”

부산지방검찰청의 부장검사를 고강준은 마치 동네 꼬마를 대하듯 거침없이 몰았다.

“야, 인마! 그게 사실이라고 치면 그사이에 너는 뭐 했어? 그리고 그 맨션 건물, 공사중이라는 팻말로 통제까지 했다면서? 그거 알고도 조강치라는 깡패 두목 부탁에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는 거 아냐? 아니지? 신고 들어온 거 묵살하라고 경찰에 압력 행사했지? 오늘 오전에 무척 바빴겠네? 그래?”

말꼬리를 붙잡는 고강준을 보며 소신영은 내심 진저리를 쳤다.

“아, 이제 잘못하셨어? 사람 말을 씹어서 땅에 뱉어놓은 뒤에 잘못했다고 하면 내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부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님. 세상 참 편하게 산다?”

지금도 봐라.

그럴 일은 없지만, 행여나 고강준에게 조사를 받게 된다면 원하는 진술을 할 때까지 계속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럴 거 없어. 부장검사 끗발로 계속 수사해. 나는 그냥 보고만 받을게. 그렇게 사건 해결해서 방송도 타고, 기자들 밥 사줘 가면서 얼굴 알려서 얼른 내 자리 차지해. 내가 이거, 훌륭한 부장검사를 몰라봤네. 눈이 썩었어.”

그 정도에서 이제 그만하지.

속마음은 그런데 소신영은 눈앞에서 통화하는 고강준을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릎을 왜 꿇어? 아! 자리 비켜달라기 미안해서 그래? 그럼 내가 자리 비워놓을 테니까 그냥 올라와.”

참 길게도 빈정대던 고강준이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든 스마트폰 너머에서 “죽여주십시오!”라든가, “지금 바로 올라가 석고대죄하겠습니다!” 따위의 간절한 외침이 달려 나와 소신영의 귀에 그대로 들렸다.

CCTV 영상 아래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는 놈들이나, 그 영상을 보고 수사하겠다는 말 좀 했다는 죄로 죽여달라거나, 시대에 안 맞는 석고대죄를 운운하는 놈들이나.

어느 놈이 조폭이고, 어느 놈이 검찰인지, 통화만 듣고는 참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간다. 그리고 너 그거 알아둬라. 벌써 그 영상이 밖으로 돌았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거. 혼자 똑똑한 척하지 말고 넓게 봐. 멀리 보고. 알았냐?”

이제야 만족한 눈매로 바뀐 고강준이 “끊어.” 하는 한마디와 함께 통화를 마쳤다.

“보시다시피 사건은 없던 거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부산에서 영화 촬영이 있었다는데 그걸 오해하셨던 모양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눈가를 좁혔던 고강준이 졌다는 투로 웃었다.

“영화 촬영이었던가요? 요즘은 영화 참 실감 나게 잘 만드는군요.”

그런 뒤에 소신영의 말을 받고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불편한 기색 따위 어디론가 날려버린 고강준의 눈에 총장 자리에 대한 탐욕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

어지간해서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는 곤잘레스 이두안이 날카롭게 시선을 들고서 존 보스만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해?”

“예약했던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고,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CCTV를 확인하고 있어서 조만간 확실하게 알게 될 겁니다.”

“후우-.”

책상에서 상체를 세운 곤잘레스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는 의자에 눕다시피 기댔다.

“바르지오 만시니의 행방을 추적할 정도의 능력, 그의 동료들이 어떤 수준인지, 미스터 강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서도 그를 납치할 만큼의 무식함,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할 곳은 한 곳밖에 없지.”

“중국이 나섰다고 보십니까?”

“정확하게는 마음 급한 보리스 파리오가 요청했다고 보는 게 맞지. 이렇게 되면 내가 자네의 안전을 염려해야 하나?”

검은 피부 탓에 유독 하얗게 보이는 존 보스만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곤잘레스가 내놓은 질문이었다.

“제 능력이 의심스러우시면 새로운 경호팀장을 구해주십시오.”

“능력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일세. 누구보다 보리스 파리오의 욕망을 잘 아는 자네와 바르지오 만시니가 개인적으로 그와 연락했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지금껏 이런 종류의 말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시금 이어진 곤잘레스의 질문에 존 보스만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뻑뻑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미스터 강이 그러더군. 자네는 순수한 의도에서 연락만 했을 거라고. 나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팀장에, 내가 오래도록 의지했던 개인적인 친분까지 더해서 질문하지. 자네를 신뢰해도 되겠나?”

“저는 경호팀장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답을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좋아. 그 말을 믿어주지.’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강에게 연락하게.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주고. 실제로 필요한 점이 있다면 자네가 먼저 내게 알려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존 보스만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존.”

곤잘레스가 그를 불러세웠다.

“내게는 두 사람이 필요해. 자네와 바르지오 만시니. 그걸 잊지 말게.”

“미스터 강은 왜 넣지 않으십니까?”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이번 사업의 한 축일세. 필요하다는 표현보다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언짢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존 보스만은 곧바로 만족한 미소를 그려냈다.

“가능하면 마카오 회의의 경호를 미스터 강에게 맡기셨으면 싶습니다.”

그런 뒤에 뜻밖의 제안마저 내놓았다.

“경호에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

“그보다는 미스터 강이 지휘하는 상황에서 제 능력이 더욱 완벽하게 발휘된다고 이해해 주십시오. 제 자존심보다는 회장님의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요청하는 겁니다.”

신뢰란 참 오묘한 감정이라서 사소한 행동 하나에 옅어졌다가 별것 아닌 말 몇 마디에 진해지곤 했는데, 곤잘레스 이두안과 존 보스만은 다시금 두터워진 신뢰를 확인하고 비슷한 미소를 그렸다.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아.”

곤잘레스 이두안이 분명하게 지시했고, 깍듯하게 고개 숙인 존 보스만이 방을 나섰다.

**

강남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최치곤과 유충일, 두 사람의 불행한 소식을 받아들지 모른다는 현실이 승용차 안을 짓눌렀다.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었다.

화제를 바꿔볼까 싶어 이병렬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앞으로 죄를 아래로 떠넘기는 일만은 하지 말라는 당부를 전할까 했는데, 자칭 신강남파 넘버 투인 이병렬이 지시한 일을 아르윈과 키란이 함께 탄 승용차 안에서 뭐라 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왜?”

강성태의 시선을 알아차렸던 모양이었다.

장세조의 주먹에 얻어맞은 탓에 왼쪽 눈가와 턱이 부어오른 이병렬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보겠다는 듯 질문을 건넸다.

그 직후였다.

우우웅.

[회장님. 회장단 모임에서 잠시 모셨던 은선곤입니다. 통화 괜찮은 시간에 알려주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짧게 울더니 은선곤의 문자를 액정에 올렸다.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단정하고 조심스러운 태도 속에 눌러두었던 은선곤의 눈빛이 바로 떠올랐다.

숨이 막히는 상황을 버티느니 이 시간에 통화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강성태는 문자에 입력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중요하게 전달해 드릴 내용이 있어서 힘드실 걸 알면서도 연락드렸습니다.

‘힘드실 걸 알면서도’라고 했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 아니라, 부산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 부산지방검찰청에서 이상한 영상을 하나 확보했습니다. 고강준 고검장께서 회장님을 의심했던 모양인데 다행히 영화 촬영을 오해한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눈가를 좁히며 창밖을 보았던 강성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강준, 이 인간이 또 강성태를 어찌해보려 나섰던 모양이었다.

“회장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은선곤 씨도 고생 많았습니다.”

- 저야 지시받은 일을 처리할 뿐입니다.

차분하게 건너온 마지막 대꾸를 통해 회장단 역시 영상에 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받았다.

확실히 은선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가 빛의 세상에 속한 사람이어서 당장 강성태와 맞설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끝났다. 그런데 은선곤은 전화를 바로 끊지 않고 있었다. 뭔가 남은 듯한 아쉬움, 빛의 세상에 속한 사람인데도 마치 이병렬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함께했으면 하는 미련이 통화의 끝에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 괜찮으면 내일쯤 식사나 함께할까요?”

누군데 강성태가 이런 제안을 해?

이병렬이 힐끔 강성태를 돌아볼 때였다.

- 불러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회장님.

기다렸던 질문을 받은 것처럼 반가운 은선곤의 답이 건너왔다.

“내일 연락하죠.”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승용차의 앞을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빛에 속한 사람과도 이병렬과 같이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아직 답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은선곤을 통해 그 답을 얻게 될지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는 강성태의 시선에 방지병원의 건물과 간판이 들어왔다. 마치 지금은 현실에 집중하라는 충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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