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17권 - 13화
제5장. 얼마나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는 유충일의 뒷모습을 향해 최치곤은 악착같이 다가섰다.
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는데, 전혀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갑갑함은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형님!”
최치곤이 안타깝게 부르는 순간이었다.
후욱, 복도 저 끝에서 거인처럼 커다란 강성태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성태야!”
유충일을 도와달라며 애타게 부르는 순간, 최치곤은 아련하게 밀려드는 통증과 함께 현실로 밀려났다. 그리고 몸 곳곳에서 일어난 통증이 강력한 진통제로 만든 방어벽을 뚫고서 최치곤을 찔러댔다.
자세는 또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목이며 등, 허리와 다리까지, 한 번만 뒤틀면 더 바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끄응.”
억지로 등을 움직이려던 최치곤이 나직하게 신음을 뱉어낸 뒤였다.
그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억지로 눈을 뜬 최치곤은 형상만 보이는 사람을 향해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이 들어요?”
이은주가 어떻게?
의아해하는 것과 별개로 이은주의 손에서 피어난 온기가 최치곤에게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
“일어나 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울먹이는 이은주의 음성이 최치곤의 정신을 좀 더 현실로 당기고 있었다.
“저녁은 먹은 거로 할게요. 그리고 괜찮으면 매일 올게요.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요.”
저렇게 울먹이는 이은주에게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옴짝달싹 못 하는 몸처럼 목소리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최치곤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내 이은주의 손을 쥐었다.
움직였어! 움직였다고!
지독한 통증을 이겨낸 최치곤이 이은주의 온기를 느낄 때였다.
뜨거운 숨이 느껴진 직후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운 이은주의 입술이 최치곤의 손등에 닿았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부드러운 이은주의 음성이 들렸고, 그 직후에 최치곤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
뜻밖에도 박노익이 아침 일찌감치 이병렬의 병실에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얼른 상체를 세운 이병렬과 자리에서 일어난 김진용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일이 생각보다 많더라고. 새벽에 올라왔다. 아침 안 먹었지?”
“예.”
강성태가 답을 한 직후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박노익과 함께 다니는 문기주가 다섯 명의 덩치들과 들어왔다.
“아침이나 함께 먹을까 해서 준비했는데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냥 적당하게 준비했다.”
박노익이 말한 ‘적당하게’의 기준이 어느 정도일까?
멍하니 바라보는 강성태 앞에서 문기주와 다섯 명의 덩치들이 죽, 곰탕, 갈비탕, 육개장, 심지어 구운 갈비, 그 외에 계란찜이나 김치 따위의 밑반찬을 깔아서 느닷없이 병실이 뷔페식당으로 바뀐 느낌이었다.
게다가 박노익은 병원을 지키는 인원이 제법 있을 거라고 여겨서 무려 60인분이나 준비했다.
아르윈을 불러서 필리핀 조직원의 숫자만큼 음식을 나누었고, 그러고도 남는 분량은 방지병원 스태프들에게 보내주었다.
“아르윈과 기주까지는 함께 먹었으면 합니다.”
“동생이 그러겠다는데 내가 다른 말을 할 게 있나?”
강성태가 박노익에게 양해를 구한 일이었다.
음식을 가져온 문기주는 말할 것 없고, 김진용과 아르윈까지 빙 둘러앉아 아침을 함께 먹었다.
“부산은 이교창이라고 경상도 동생에게 맡겼다. 업장 인수는 태완이 형님 변호사가 진행 중인데, 이번 일이 가라앉는 데까지 대략 보름쯤 필요할 거 같다. 답답하더라도 동생이 일단 교창이를 믿고 기다려주었으면 싶다.”
“알겠습니다.”
강성태는 덤덤한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형님. 조강치나 서창호, 장세조 쪽에서 문제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깡치 형님이 조직을 워낙 야비하게 돌렸던 모양이다. 업장 인수대금을 지분대로 나눠서 입금하겠다니까 오히려 다들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위자료까지 얹어준다는 말을 듣더니 알아서 식구들 입단속 시키겠다고 나섰다.”
이병렬의 질문에 답한 박노익이 궁금한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더 할 말이 없느냐는 의미로 보였다.
“형님이 직접 챙기신 일입니다. 병렬이가 다른 의견이 없다면 저는 그거로 만족합니다.”
부산을 이교창이라는 동생에게 맡겼다. 그런데도 강성태는 그 점에 관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강성태가 보여주는 신뢰를 확인한 박노익이 가볍게 웃은 뒤에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 교창이는 부산 정리한 뒤에 부를 테니까 그때 인사하자.”
“그것도 형님께서 결정해 주십시오.”
“고맙다, 동생.”
자신의 위치를 지켜준 강성태에게 박노익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간단한 인사였다. 그런데 둘러앉은 이들에게는 광주 황상열이 천안 민병련과 손잡고 반격을 시작했고, 부산 조강치가 달려들면서 더욱 처절하게 변했던 싸움이 끝났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민병련은?”
궁금한 듯 박노익이 물었고,
“태완이 형님께서 정리하셨습니다, 형님.”
이병렬의 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더는 부산과 관련한 대화는 없었다.
**
오후 출근인 김민정은 방에서 나왔다가 낡은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 장숙경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엄마, 왜 그러고 있어?”
“응?”
“왜요? 또 꿈에서 성태 오빠 봤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든 김민정은 장숙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한테 연락도 하지 말라며? 커피알리고에도 가지 말고. 그래놓고 엄마가 이러면 어떻게 해?”
“너는, 알지도 못하면서.”
“뭔데, 그럼? 민재 오빠가 혹시 사고 쳤어? 우리 조카 생겨?”
“얘가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뭐냐고 그럼?”
“꿈에 네 이모가 보여서 그래. 서럽게 울면서 나한테 성태 돌봐줘서 고마웠다고. 어디 먼 길 떠나는 사람처럼 그러더라.”
내용을 들은 김민정이 입술을 내밀며 곤란하고 아픈 심정을 표현했다.
“그 이모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아?”
“듣긴 했는데 기억은 없지, 엄마.”
“하긴. 어릴 적부터 네가 좀 아둔하기는 했지.”
“엄마!”
“아이, 시끄러워.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김민정과 말을 하다가 감정이 깨졌다는 식으로 장숙경이 몸을 일으켰다.
“나 한숨 잘 거니까 출근할 거면 조용하게 나가.”
“내 점심은?”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무한다, 진짜. 성태 오빠가 왔으면 엄마가 그랬겠어?”
툭 던진 김민정의 말이 건너간 직후였다.
방으로 들어가던 장숙경이 정말이지 매서운 얼굴로 김민정을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그냥 나온 말이야.”
“나 진짜 차별 않고 키웠다. 아빠도 그 부분을 가장 신경 써주셨고. 늘 아빠하고 민재, 너한테 그게 고마웠어.”
“잘못했어요.”
“그런데도 성태가 저렇게 혼자 살아. 그 이유를 몰라? 민재나 네가 관련된 일이라면 독약이라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걸 정말 몰라서 그래?”
“죄송해요.”
연달아 사죄하며 시선을 떨군 김민정을 좀 더 노려보던 장숙경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퇴근할 때, 카스텔라 사와.”
“알았어요.”
답을 들은 뒤였다.
장숙경이 한번 봐준다는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고, 김민정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아침을 먹은 다음이었다.
박노익은 오늘 하루 쉬겠다며 병원을 나섰고, 김진용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일을 보러 출근했으며, 아르윈은 조직원들이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 바람에 병실에는 강성태와 이병렬 둘만 있었다.
이병렬이 돌아본 침대에서 강성태는 모처럼 휴가를 얻은 직장인처럼 길게 누워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커피 마실래?”
TV 채널을 돌리던 이병렬이 질문을 건네자 강성태가 몸을 일으켰다.
“또 그런다? 내가 탄다니까.”
“둘이 달랑 있는데 보스니 넘버 투니 따지려고? 적당히 좀 해.”
이병렬의 말문을 틀어막은 강성태가 침대에서 내려와 구석으로 향했다.
“끄응.”
신음을 흘린 이병렬이 테이블 앞에 앉았을 때, 믹스 커피를 두 잔 만든 강성태가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지금 저러고 있을 여유가 있을까?
부산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들었던 마카오 회의에 얽힌 일만 해도 하나둘이 아니던데?
결국, 강성태가 앉기를 기다린 이병렬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꺼내 들었다.
“왜 이러고 있어?”
“바르지오 만시니라고 내게 정보를 주던 옛날 동료가 있어. 한국으로 오라고 했던.”
“아! 부산 가는 차 안에서 통화했던 사람?”
“납치된 거 같다.”
“뭐?”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의 일이고, 상황이 워낙 툭 튀어나가서인지 이병렬은 실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그런 건데?”
“가장 의심스러운 놈들은 삼합회지. 멕시코 공사를 중국 정부가 노리고 있다니까 그쪽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 뭐냐, 곤 뭐라는 회장한테 가서 의논이라도 해야지?”
이병렬의 재촉에도 강성태는 느긋하게 믹스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보였다.
“바르지오 만시니는 정보 담당이었어. 그런 만큼 자기가 만진 정보나 주변을 분명하게 관리했고. 그런 그가 우리나라로 향하는 도중에 납치됐다.”
“배신자가 있구나?”
확신처럼 묻는 이병렬의 눈을 향해 강성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신자를 찾아봐야지. 이러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마카오 회담이 멕시코 공사를 결정하는 마지막이거든.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업권이 보리스 파리오에게 넘어가.”
뜬금없을 설명인데도 이병렬은 강성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회의가 무사히 마무리되면 멕시코 사업에 더는 변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 사업을 뺏어야 하는 삼합회는 곤잘레스 회장을 암살하는 수 말고 남은 게 없지.”
“아무리 삼합회라고 해도 그렇지, 대놓고 세계적인 사업가를 살해할 수 있겠어?”
이병렬의 질문이 나온 뒤였다.
“범인이 실종된 바르지오 만시니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중국, 삼합회, 보리스 파리오 회장은 책임을 면하니까.”
“아!”
감탄을 쏟아낸 이병렬이 곧장 “하여간 개 씨발 새끼들!” 하는 욕으로 불끈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걸 알면서 왜 이러고 있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움직일까? 납치한 놈들도 지금 너랑 똑같이 그게 가장 궁금하겠지? 그래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 보는 거다.”
“다가오지 않으면?”
“다가오게 만들어야지.”
“아흐, 더럽게 복잡하네.”
이병렬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말 나온 김에 하나씩 시작해 보자.”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집었다. 그런 뒤에 은선곤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한 점 꼬투리 잡을 구석이 없는 응대였다.
“저녁에 식사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나요?”
- 혹시 몰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저녁 7시쯤 어때요? 장소는 문자로 넣지요.”
- 예, 회장님. 그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아! 소개해주고 싶은 분이 있는데 모시고 가도 될까요?”
- 회장님 편하신 대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래요. 저녁에 보죠.”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이병렬에게 눈짓을 건넨 뒤에 다시 스마트폰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회장님.”
-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네.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이번 공사 컨소시엄의 총괄 비서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저녁을 함께하면 가장 좋습니다.”
- 시간은?
“오늘 저녁 7시쯤입니다.”
- 스케쥴을 조정하려면 비서들이 무척 곤란하겠군. 자네가 노리는 게 그건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스마트폰 건너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의 숨소리가 길게 넘어왔다.
- 장소는?
“회장님께서 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묵는 호텔의 꼭대기 층이 어떤가? 음식은 평범하지만, 전망이 꽤 괜찮아.
“저녁 7시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능숙한 영어로 통화를 마친 강성태를 이병렬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강성태는 방금 있었던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의 통화를 이병렬에게 들려주었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골치 좀 아프겠다.”
“내가 뭘 노리고 이러는지 알겠어?”
“그걸 어떻게 아냐? 그저 내가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정도인데 배신자 놈은 얼마나 골이 복잡할까 싶은 거지.”
궁금해하는 강성태에게 이병렬이 뻔뻔한 답을 내놓았다.
“혹시 내가 못마땅하면 그냥 때려라. 이렇게 계산해서 사람 피 말리지 말고.”
“때리면 얌전히 맞고 있기는 할 거냐?”
“그건 좀 곤란하지.”
느닷없이 오간 농담 덕분에 무거운 이야기 중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마카오에 아르윈만 데려가서 되겠어?”
“키란도 함께 갈 거니까 그 정도면 적당할 거 같다.”
“삼합회가 떼거리로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럼 나도 잔뜩 부르는 거지. 그 뒤에 삼합회 놈들이 얼마나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연달아 질문을 던지던 이병렬이 입을 다물고 눈가를 좁혔다. 한순간이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성태의 눈이 번득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