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17권 - 17화
분실한 스마트폰의 위치로 구조를 요청하는 방식은 바르지오 만시니를 포함해 어나니머스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기존에 있는 스마트폰 제조업체의 시스템을 이용하기 때문에 납치한 범인들은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강성태는 다시 한 번 문자를 확인했다.
홍콩의 타이탐(Tai Tam) 구역의 베이뷰(Bayview)라는 아파트 근처 빌라였다.
홍콩까지 대략 네 시간, 공항에서 빌라까지 승용차로 또 한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장소였다.
시간도 문제지만, 바르지오 만시니가 보낸 이 구조요청만으로는 지키고 있는 인원이 몇인지, 무장은 얼마나 했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이동에 사용할 승용차와 운전은 가디언스파 조직원이든, 현지에서 일하는 필리핀 근로자든, 아르윈을 통해 도움받을 수 있을 테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강성태를 이병렬과 김진용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말해.”
당장 공항으로 함께 가겠다는 것처럼 이병렬이 다부진 표정으로 내용을 재촉했다.
“저쪽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거든. 전산으로 확인하면 바로 드러나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선을 흐려놓는 게 좋아.”
김진용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어차피 밤에 뜨는 비행기는 없을 테니까, 내가 급하게 광주든, 부산이든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시끄럽게 내려가면 되는 거구나?”
“내가 연락할 때까지 지방에서 시간을 끌어주면 더 좋아.”
“그런 거라면 이번에 접수한 부산이 제격이지.”
“자칫해서 얼굴 드러나면 오히려 의심만 사게 돼. 다행히 네가 병원에 있어야 하는 상태여서 저쪽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을 거다.”
“여기에서 나가는 건?”
“종환이와 대림동 식구들이 움직이는 거로 충분할 거 같다. 다행히 광룡이 무너져서 삼합회에 부산의 속사정을 전해줄 조직이 없고, 일본 야쿠자가 경상도 조직들에게 접근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시선만 끌면 승산 있어.”
“부산에서 말이 새나가지 않게만 하면 되겠네. 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얼굴을 감춰야 하는 역할이라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성태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병렬이 다부지게 대꾸를 내놓았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액정에 올라온 이름은 뜻밖에도 은선곤이었다.
‘잠시만.’
이병렬에게 눈짓을 건넨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혹시 쉬시는 걸 방해한 건 아닙니까, 회장님?
“우리끼리 의논할 일이 있을 때는 굳이 시간 따질 거 없어. 무슨 일이야?”
- 지난밤 9시경에 삼합회로 추정되는 인원 50명이 마카오의 스튜디오 시티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특이사항으로 같은 여행사에서 그들이 투숙하는 층의 다섯 개 객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예약했습니다.
이런 걸 은선곤이 알아내서 보고한다고?
워낙 예상 못 했던 내용이어서 강성태는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뭔데 그래?
궁금한 시선의 이병렬에게 강성태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눈짓을 던졌다.
“그 정보는 어디에서 얻었어?”
- 기획실에 속한 정보팀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홍콩의 모든 비행편과 마카오의 객실 예약 동향 중 특이사항을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올라온 자료입니다.
“그 인원을 삼합회로 추정하는 이유는?”
- 중국 본토에서 승용차로 건너왔고, 투숙객의 나이, 인상착의, 직업, 행동을 파악해서 얻은 결론입니다.
“다섯 개 객실을 왜 비웠는지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강성태의 질문이 건너간 직후였다.
-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님과 수행원들이 사용할 객실입니다, 회장님.
숨도 쉬지 않고 답이 있었다.
묻기 전에 알려줬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건, 이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만약 강성태가 끝내 묻지 않았다면?
강성태의 판단과 지휘 능력이 그 정도라고 가늠했을 테고, 통화의 끝에서 결정적인 정보처럼 내놓았을 게 분명했다.
유치하지만, 밉지 않았다.
픽 웃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 다른 말씀이 없으시면 정보가 생기는 대로 또 보고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일단 믿고 모험을 할까, 아니면 계획대로 진행할까.
만약 은선곤이 그룹의 이익을 위해 저쪽과 연락하고 있다면, 이병렬이 부산까지 다녀오는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건 말할 것 없고, 강성태와 키란, 바르지오 만시니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성태는 저녁에 보았던 은선곤의 간절했던 눈빛을 떠올렸다.
“혹시 홍콩으로 조용하게 들어갈 방법이 있을까?”
- 언제 말씀이십니까?
어지간한 질문쯤 태연하게 받는 은선곤이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일정을 되물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려고 했을 정도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 30분 안으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편하게 해. 대신 내가 홍콩으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해 줘.”
-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궁금해하는 이병렬과 김진용에게 통화 내용을 먼저 설명한 강성태는 이어 은선곤에 관해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누군지 얼굴 졸라 궁금하다.”
강성태의 설명을 들은 이병렬이 간략한 감상을 내놓은 뒤였다.
“출발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준비는 해놓자.”
강성태는 아르윈, 이종환과 차례로 통화해서 대강의 내용과 계획을 들려주었다.
통화를 마쳤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새벽 3시 30분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탑승 가능한 인원은 11명이고, 제가 포함돼 있습니다. 또, 회장님의 여권 대신 그룹 임원의 여권을 사용하겠습니다.
가짜 여권을 내밀겠다고?
은선곤이?
“여권을 그렇게 처리해도 되겠어?”
- 재벌가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사용해 홍콩에 갈 때, 간혹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언론에 드러날 정도의 사건만 아니라면, 귀국할 때도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홍콩에서 삼합회의 목을 가를 텐데 문제가 안 생길까?
강성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뒷감당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은선곤의 장래를 홍콩행 한 번으로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두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가는 건 나를 포함해 두 명인데, 올 때는 여권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탈 수 있어. 그것도 가능하겠어?”
- 그렇게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뭐가 이렇게 쉬워?
“올 때 탐승할 여권 없는 사람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 출발할 때 비서실 직원을 한 명 데리고 가겠습니다, 회장님. 그 직원 여권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럼 그 직원은?”
- 마카오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곤잘레스 회장님의 전용기를 이용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회장님.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정도 되면 그만한 능력이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온 대꾸였다.
물론, 곤잘레스 회장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 이전에 그의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이미 확인했던 일이기도 하고.
과정은 모두 확인했다. 그런데도 강성태가 쉽게 답하지 못했던 이유를 은선곤은 알아챈 모양이었다.
- 제 첫 번째 꿈이 회장님 같은 분과 함께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거고, 두 번째는 곤잘레스 회장님 같은 분의 비서실에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회장님.
최악의 경우가 오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밑으로 넣어주면 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물론 최악의 경우에.”
- 이미 체계가 확실하게 잡힌 신강남파 들어가려면 이 정도는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머리 쓰는 조직원이라니?
옅게 웃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홍콩에 다녀오는 비행기를 부탁하자. 어디로 가면 돼?”
- 얼굴이 드러나면 곤란하다고 하셨으니까 그룹의 임원 전용 차량을 이용하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논현동 쪽 방지병원.”
- 그러시면 차라리 곤잘레스 회장을 뵀던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옮겨타시면 어떠십니까? 2시 30분부터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마치 홍콩행을 미리 알고서 준비했던 것처럼 막힘없는 답이었다. 그리고 강성태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홍콩으로 출발하는 순간, 한식구가 된다.”
- 2시 30분에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 회장님.
강성태의 확인에 은선곤이 다부진 대꾸를 건네며 통화를 마쳤다.
강단은 있는 거 같고.
위기를 맞았을 때 어떤 반응과 모습을 보일지 은근히 궁금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통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안 나가?”
“일찍 나가봐야 눈에 띄기만 하지. 차라리 시간 돼서 나가자.”
“그런가?”
옷을 갈아입으려던 이병렬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
방지병원 앞쪽 도로에 늘어선 승용차와 승합차가 라이트를 켜고 대기했고, 그 주변에 선 덩치들이 비장한 얼굴로 지시를 기다렸다.
강성태가 이병렬, 김진용과 함께 주차장으로 나서자 병원 안쪽에서 기다리던 이종환, 아르윈,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이 상체를 깊게 숙였다.
“조성호. 부산에 다녀오는 동안, 응급실을 확실히 지켜.”
“예, 형님.”
거친 말과 표정으로 조성호를 상대한 이병렬이 광주 덩치들을 둘러보았다.
“부산에 가는 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응급실을 떠나지 마. 알았냐?”
“예, 형님.”
날렵한 몸매, 다부진 표정, 연기자를 했어도 이런 역할에서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은 만큼 실감 나게 으르렁거린 이병렬이 운전석 쪽 뒷자리로 움직였다.
덩치 한 명이 운전석 쪽, 이종환이 조수석 방향의 뒷자리를 열었는데 강성태를 대신해 김진용이 슬쩍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성태는 바로 옆에 세워둔 승용차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병원 주차장을 내려다볼 만한 건물이 마땅치 않아서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심정으로 준비한 과정이었다.
이병렬과 김진용이 탄 승용차가 주차장을 나서자 도로에서 대기하던 승용차와 승합차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저는 응급실에 있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해야지. 보스도 안 계시고 하니까 나는 그럼 신월동에 있는 카페에 가 있을 테니까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해.”
아르윈이 고갯짓을 던지자 승합차에 대기하던 필리핀 조직원이 움직여 운전석에 올랐다.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의 인사를 받은 아르윈이 뒷자리에 올라타기 무섭게 승용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1분쯤 달린 뒤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말해. 그래. 그럼 다음에서 바꿀 거니까 실수 없게 해.”
나직한 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아르윈이 운선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음 사거리에서 돌아.”
아르윈의 지시를 받은 필리핀 조직원이 앞에 나타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아르윈이 상체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됐습니다, 형님.”
아르윈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그제야 상체를 세웠다.
“우리가 돌고 나서 우회전하는 차선을 승합차로 잠깐 막았습니다, 형님. 뒤에 다른 차들이 안 붙은 거 보면 치밀하게 추적하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아르윈이 보고하는 사이에 승용차는 곤잘레스 회장이 묵고 있는 호텔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키란은 카페에 있던 조직원 두 명이 데리고 오고 있어서 비슷하게 도착할 겁니다.”
자정을 훨씬 넘겨 새벽으로 향하는 중간이었다.
빠르게 달린 승용차는 얼마 걸리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고, 바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저건가 봅니다, 형님.”
아르윈이 가리키는 방향에 비상등을 켜고 있는 승용차가 보였다.
“천천히 가봐.”
강성태의 지시대로 승용차가 옆에 붙었을 때, 조수석에서 은선곤이 내렸다.
강성태와 함께 차에서 내린 아르윈이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또 다른 승용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곧장 강성태를 향해 다가왔다.
필리핀 조직원과 키란이었다.
“다녀올 테니까 마카오에 가 있는 조직원들과 계속 연락해 봐.”
“조직원들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형님.”
아르윈에게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키란을 눈짓으로 불러 함께 차에 올랐다.
인사를 따로 할 틈이나 여유는 없었다.
대신 은선곤은 아르윈에게 고개로 인사하고는 조수석에 몸을 넣었다. 그가 타고나자 비상등을 끈 승용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정보국 요원들이 추적하고 있다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는데 반대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삼합회의 눈을 피하는 정도라면 충분하고 남을 대비였다.
호텔을 나선 승용차는 바로 올림픽 대로에 들어섰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합니다, 회장님.”
“알아서 해.”
짧게 답을 준 강성태는 옆에 앉은 키란을 돌아보았다.
“화이트 테일이 홍콩에 있어서 데리러 간다.”
“감사합니다.”
엉뚱한 대답에 강성태가 픽 웃었는데, 은선곤은 대화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