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 18화 (350/513)

《350》17권 - 18화

제7장. 긴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가용 비행기의 날개 끝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전부인 어두운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은선곤이 조정실 뒤의 공간으로 비서실 직원을 데려간 사이, 강성태와 키란은 비행기의 중간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강성태가 쿠크리를 옆자리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음료수를 가져온 은선곤이 키란과 강성태 앞에 놓아주었다.

공항까지 오는 동안, 운전하는 직원과 출입국 심사 때문에 인사나 소개, 혹은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 바람에 밀어두었던 인사를 나누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인사하지. 이쪽은 키란. 이쪽은 멕시코 공사를 맡은 컨소시엄 총괄 책임자, 은선곤 씨.”

일부러 우리 말로 소개했다.

“키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선곤입니다.”

키란과 악수를 나눈 뒤에 은선곤은 바로 뒤편의 소파에 앉았다.

네 시간가량 날아가야 했다.

강성태는 먼저 스마트폰에 저장했던 지도를 열어서 키란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붉은 점이 찍힌 빌라인데 사진으로 봐서는 2층 구조인 거 같다. 독립 형태인 빌라니까 두 개 층을 모두 사용할 거고, 건물 규모로 봐서는 대략 10명에서 최대 20명 정도 있을 거라 예상한다.”

“옆 건물에 더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그러니까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끝내는 게 중요해.”

가죽으로 감싼 소파에 앉은 강성태는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의 사진을 줄였다.

“도로를 봐둬. 여기까지는 승용차로 움직이고, 아파트를 지난 이 자리에서 내릴까 하거든. 그 뒤에는 뒤편 산으로 돌아가는 게 그나마 시선에 띄지 않는다.”

강성태는 검지로 예정한 이동 경로를 보여주었다.

산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언덕 수준이어서 빌라로 접근하는 길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까지 대응하실 겁니까?”

“바르지오 만시니를 납치했다면 저쪽도 끝을 보겠다는 거겠지. 숫자도 그렇고, 처음부터 인질범을 상대하는 수준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생기더라도 조용하고 빠르게 바르지오 만시니를 구하겠다는 의지였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대응한다. 그래서 삼합회에 분명하게 경고한다.

강성태의 뜻을 알아들은 키란이 다부진 눈빛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상대방의 경계를 허물고 들어가 인질을 구출하는 법, 반대로 경계를 허문 뒤에 상대방이 지키는 인물을 암살하는 법, 그런 과정에서 적을 제압하는 법까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특수부대는 이런 종류의 상황을 이가 악물릴 정도로 훈련하고 또 훈련한다.

지금 보이는 키란의 다부진 눈빛은 그런 훈련의 반복과 실전 경험에서 나왔다고 봐야 했다.

“화이트 테일을 구출하고 나서 형제들을 마카오로 부르는 게 어떻습니까?”

조직 싸움이라고 여기기에는 마카오 회의를 노리는 적의 규모나 대응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긴 눈치였다.

“멕시코 공사를 진행하게 되면 근로자들을 따라 온갖 놈들이 몰려든다. 삼합회와 야쿠자는 물론이고, 마피아까지 넘쳐날 텐데, 멕시코는 총기를 얼마든지 구하는 나라다.”

안다미를 구출할 때 달려들었던 가페와의 교전을 떠올린 모양인지, 키란이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멕시코 정부에서 신도시 경비를 맡기는 하겠지만, 컨소시엄과 사업 주체가 자체 경비단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가페를 걱정하십니까?”

강성태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주었다.

“그 외에도 카르텔이 달려들겠지.”

짧은 설명을 던진 강성태는 뒤편에 앉았던 은선곤을 돌아보았다. 작은 키보드를 연결한 태블릿을 검지로 넘겨 가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함께 듣지?”

“그래도 됩니까?”

픽 웃은 강성태가 고갯짓으로 부르자 기다렸던 것처럼 은선곤이 건너와 키란의 옆에 앉았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는 모두 들었지?”

“가까이 있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키란을 배려해서 영어로 주고받은 대화였다.

“자체 경비단은 가페와 카르텔의 게릴라식 공격에 대한 대응과 기본적인 질서 유지 외에는 나서기 어렵다. 자칫하면 컨소시엄과 건설 주체가 지역 세력을 배척하는 모양새가 돼.”

“그런 면도 있군요.”

새로운 걸 배웠다는 투로 은선곤이 눈빛을 빛냈다.

“업소에서 폭력, 마약, 도박, 매춘 등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건 신강남파와 같은 조직이 해결해야 하는 거지.”

“폭력이나 도박이야 그렇다 치지만, 마약이나 매춘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자체 경비단도 있고, 위반자는 바로 근무지에서 추방하게 될 텐데요.”

“거짓말처럼 근로자 중에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구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면 제 발로 유혹을 찾게 된다.”

은선곤은 강단이 있었다. 수완은 말할 것 없고. 그러나 지금의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의외로 곱게 자랐다는 사실을 강성태는 대강이나마 짐작했다.

특히나 은선곤은 매춘이란 단어에 불결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 나라의 온갖 근로자들이 뒤섞인 공사 현장의 총괄 책임자가 말이다.

그런 면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접하게 될 살인, 그것도 마약에 젖어 벌인 처참한 현장을 보게 될 확률이 높은 은선곤이라면 그 정도 단어는 태연하게 넘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빛의 세상에서 엘리트 과정을 밟았고, 매사를 조심하며 성장하다 보니 어둠이 배출하는 욕망을 접한 경험이나 기회가 없었던 눈치였다.

약점이 전혀 없어 보이더니 이런 면이 있었네?

옅은 웃음이 올라왔으나 강성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미국인의 장례식에 두 번 참석한 적 있습니다.”

답을 들은 강성태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밤에 빌라 근처에 은선곤을 데려가는 것만은 확실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 제가 잔인한 장면을 못 견딜까 봐 염려하십니까?”

눈치는 또 빨라서 은선곤이 도전적인 눈빛으로 질문을 건넸다. 발끈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그 부분이 약점이라는 고백이기도 했다.

아직 거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탓이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그저 피를 보면 기절하는 사람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이병렬이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그 성격에 저런 반응을 봤다면 단박에 “씨발.”거리면서 으르렁댔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 정도 각오면 됐어.”

대화를 대강 정리한 강성태는 다시 스마트폰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오가는 이동 편을 준비해야 하는데 필리핀 가디언스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을까 하는데.”

“잠시만 지도를 봐도 됩니까, 회장님?”

뭔가 더 있어?

강성태는 대꾸하지 않은 채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은선곤이 지도를 확대하거나 줄여가며 잠시 들여본 다음이었다.

“이곳은 아파트나 빌라에서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택시든, 승용차든, 어디에서 멈췄는지, 누가 내리는지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뒤쪽에 멈춰서 여기를 타고 돌아가려는 거지.”

강성태가 검지로 보여준 경로를 확인한 은선곤이 그렇게 가도 괜찮겠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첫인상과 달리 온실에서 자랐던 은선곤과 야생에서 커온 강성태의 간극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염려하는 건 목표를 구출해낸 다음이다. 한 시간 시차를 계산했을 때, 홍콩 도착이 오전 6시 30분, 작전지역 도착 예정이 7시 30분.”

습관적으로 나온 작전지역이라는 표현에 지도를 확인하던 은선곤이 흘깃 시선을 들었다.

“작전 시간 한 시간, 순조롭게 진행돼도 오전 8시 30분에 종료인데 만약 바르지오 만시니가 부상이 심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기 힘들고, 공항에서도 여권을 인정해주기 쉽지 않아.”

“홍콩에 있는 그룹 소유 아파트에서 밤까지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르지오 만시니를 구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놈들이 출입국 사실을 확인할 거고, 일을 시끄럽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날뛸 텐데 아무리 멕시코 현장이 탐난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감수할 수 있겠어?”

강성태의 반문에 은선곤은 입을 다물었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해서 약 오른 영재의 눈빛이었다.

“우선 이동은 그룹에서 제공하는 승용차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남은 문제는 홍콩에 도착하기 전에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의 다부진 눈매를 본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새벽 5시쯤이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이병렬은 박노익의 전화를 받았다.

“이병렬입니다, 형님.”

- 부산에 간다면서? 무슨 일이야? 교창이가 문제 일으켰어?

정말 이교창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새벽인데도 박노익의 음성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잘했다, 이종환.’

가는 길에 말을 흘리라는 지시에 따라 한밤중인 데도 이종환은 박노익에게까지 말이 들어가게 손썼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님.”

- 그래? 잠시만. 야! 잠깐 나가 있어 봐.

화가 난 상태에서도 박노익은 이병렬의 청을 외면하지 않았다.

- 뭔데 그래? 말해봐.

이어서 날아온 질문에 이병렬은 지금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부산에 가는 길이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이병렬은 상황 하나하나를 모두 전해주었다.

- 흐아, 그것참.

사연을 모두 알아챈 박노익의 첫 번째 반응은 감탄이었다.

- 아니 달렸다는 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삼합회의 앞마당에 들어가서 코를 때리고 오겠다는 건데 달랑 하나만 데리고 가서 일이 되겠어?

그래놓고는 대번에 걱정을 쏟아냈다.

- 하여간 보스가 너무 뛰어나니까 이런 걱정을 다 하네. 막말로 다른 조직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중재해달라고 야쿠자를 만났거나 괜히 병풍 설 애들 먼저 잔뜩 보냈을 거 아니냐? 그걸 달랑 한 명만 데리고 달려가다니. 우리 쪽에서 도울 방법은 없는 거냐?

“이미 출발해서 제가 부산에 도착할 시간이면 홍콩에 내릴 겁니다, 형님. 그보다는 부산에서 소문만 듣고 들고일어나지 않게 연락이나 해주십시오, 형님.”

- 알았다. 내가 지금 교창이에게 말해 둘 테니까 적당한 장소로 들어가서 아침이나 함께 먹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제대로 인사 나눠야지 않겠냐?

“감사합니다, 형님.”

- 그래. 병렬이 네가 정말 고생이 많다. 잘하는 거야.

다독임을 끝으로 박노익과의 통화가 끝났다.

지금쯤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강성태를 떠올린 이병렬이 창밖을 향해 픽 웃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번에는 조태완의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이병렬입니다, 형님.”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반응이 박노익과 판박이처럼 같은지, 이병렬은 사연을 길게 풀어냈다.

- 고생한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올라와.

“예, 형님.”

조태완의 다독임을 끝으로 길었던 통화가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린 이병렬이 고개를 돌려 강성태를 대신해 오른쪽에 앉은 김진용을 돌아보았다.

“우리 보스 말이다. 볼수록 대단하지 않냐? 나더러 지금 신강남파 보스 자리 주고, 멕시코 공사 알아서 하라고 했으면 손에 들고 어쩔 줄 모르다가 잔돈푼 먹고 끝났을 거 같은데 이건 뭐 그릇이 달라.”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놓던 이병렬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일이 잘되면 분명 멕시코에 가 있을 거 같은데 너나 나나 영어 한마디 못 하잖냐. 가봐야 짐만 될 건데 그게 더럽게 아쉽다.”

뭐라 대꾸하지 못한 김진용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몸을 옆으로 기울인 이병렬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홍콩에 도착한 강성태는 키란과 함께 얌전한 태도로 은선곤의 뒤를 따랐다.

은선곤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아니면 이런 식의 입국에 익숙한 공항 직원이거나.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는 있었지만, 은선곤이 한꺼번에 내민 여권 셋을 펼친 직원이 군소리하지 않고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모시겠습니다.”

우리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공항 직원에게는 은선곤이 몹시 어려운 두 사람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보기에 적당했다.

세관 절차는 더 간단해서 은선곤이 바구니에 신고서를 넣는 것으로 끝이었다. 심지어 세관 부스 안쪽에 있는 직원들은 의도적으로 이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는 눈치였다.

공항을 통과한 은선곤은 막힘없이 입국장의 게이트로 향했다.

이미 이런 경험이 수차례 있어서 강성태는 느긋했고, 키란은 덤덤한 표정으로 움직였다.

입국장을 나선 은선곤은 정사면체의 블록이 곡선을 그리며 만들어진 건물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바로 도로를 향한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를 나선 다음이었다.

도로에 세워놓은 승용차 앞에서 서 있던 중년 남자가 은선곤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 역시 은선곤과 중년 남자에게는 익숙한 일로 보였다.

조수석 앞에 선 은선곤이 뒷문을 열었다.

키란을 먼저 태운 강성태는 차에 타기 전에 은선곤을 분명하게 돌아보았다. 악착같이 붙든 그의 태연한 표정과 눈빛에 옅은 긴장이 올라와 있었다.

‘약속한 대로만 움직여. 그게 전부야.’

‘제가 긴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성태의 시선을 다부지게 받는 은선곤의 눈 끝이 잘게 흔들렸다.

사람 죽이러 가는 경험을 아무나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특히나 은선곤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더.

픽 웃은 강성태가 뒷자리에 오르자, 입술을 굳게 다문 은선곤이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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