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17권 - 19화
공항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구부러진 도로를 타고 빠르게 달렸다.
한국과 다르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영국 문화에 익숙한 강성태와 키란에게는 낯익은 구조였다.
“정말 다른 무기 없이 그렇게 두 분만 가십니까?”
빠르게 달리는 승용차의 조수석에서 은선곤이 우리말로 건넨 질문이었다. 막상 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강성태의 안전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권총을 구하려고 했다면 가디언스 조직원들 통해서 손에 넣었겠지. 하지만, 총성이 울리는 순간, 사건이 어디까지 커질지 몰라. 더구나 무조건 우리에게 불리한 홍콩이고.”
“그렇다면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삼합회가 더 악착같이 총기를 사용할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실패한다고 해도 금전적 손실이나 징계로 끝나는 일들을 하던 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답변 같았다.
왼편의 조수석에 앉은 은선곤이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원래 그렇게 무모하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조직의 보스라면 좀 더 몸을 아껴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도 담겨 있었다.
“은선곤.”
“예, 회장님.”
키란은 길게 이어지는 우리말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다. 전문용어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강성태의 음성에 담긴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키란이 혹시 문제가 있나 싶은 눈빛으로 은선곤을 바라보았다.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내가 싫어하는 깡패들의 인사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존에 있는 신강남파 식구들에 비해 더 나은 대우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도 있었고.”
빠르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드레일과 그 아래 시설물들이 오랜 세월을 품고 있어서 화려함을 기대했던 홍콩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멕시코 현장이라면 원하던 대로 바닥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함께해보자는 의미에서 식구로 받아들였고. 조직원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에 은선곤의 인생 전부를 걸라고 하지는 못한다.”
“물론 홍콩에서 총기를 사용한 싸움이 벌어지고 제가 연루됐다면, 그룹에서는 제가 독단적으로 움직였다며 버릴 겁니다. 그런 한이 있더라도 조직은 수장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은선곤이 질문을 건넸다. 그 외에도 앞으로 들어서야 하는 세상을 알고 싶은 열망이 마치 교수에게 질문하는 학생 같은 그의 표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싸움에서 내가 잘못된다면 차라리 그렇게 끝내는 게 나아. 안 그러면 이런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멕시코 현장에서 나를 믿고 따라준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될 테니까.”
“회장님.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많은 싸움을 혼자 하시지는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상체를 뒤로 돌리다시피 한 은선곤을 보며 강성태는 먼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뭐가 재미있지?
은선곤의 눈과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프게 잃은 두 사람이 있어. 그중 한 명이 내게 보스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죽음으로 일깨워주었고. 혼자 싸우지는 않지만, 보스라면 어떤 싸움에서도 앞에 있는 게 맞아.”
키란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다시 시선을 조수석으로 돌렸다.
“명심해. 나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림자고, 은선곤은 빛의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어둠에 물들라고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나와 내 식구들이 빛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함께 가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선곤이 볼을 씰룩였다.
그의 인생을 건 싸움을 앞둔 상황이었다.
멕시코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은선곤은 언제고 물러설 기회가 있다.
때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옭아매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은선곤은 마치 그런 순간을 맞이한 사람처럼 보였다.
시선을 떨군 은선곤이 말없이 상체를 앞으로 돌리며 차 안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은선곤을 좀 더 짓누르고 싶은 것처럼 승용차를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45분을 달렸다.
얼마나 더 달려야 바르지오 만시니가 납치된 빌라가 나오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쿠크리를 다리에 올린 키란이 양손을 기도하듯 앞으로 내밀고는 고개를 공손하게 숙였다.
신께 드리는 기도였다.
이 싸움에서 죽더라도 영혼을 바른 곳으로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남은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지켜달라는 소망을 전하는 구르카 용병 특유의 기도였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기습이었다.
뛰어드는 강성태와 키란이 알아본 건 빌라가 지어진 지 20년이 넘었다는 사실과 디지털 도어록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구형 손잡이라는 점, 2층 창의 섀시가 다른 빌라와 같다면 이중창이기는 한데 페어 글라스가 아니라는 게 전부였다.
비행하는 동안 은선곤이 최선을 다해 알아낸 정보여서 더 많은 걸 바라거나 요구하지도 못했다.
상황을 이해한 키란의 감각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든 양손에 이마와 코를 붙인 키란의 기도는 길었다.
키란에게서 고개를 돌린 강성태는 창밖에 펼쳐진 홍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싸움에서 실패한다면 남는 건 죽음밖에 없었다.
강성태가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는다면 곤잘레스 이두안은 적당한 절충안을 내세울 테고,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에서 크게 손실 나지 않는 선에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바르지오 만시니와 돌아간다.
조강치가 과거를 정리하는 마지막 싸움이었다면, 이건 빛을 향해 달리는 나의 첫 번째 싸움이다.
아침을 펼쳐놓는 홍콩의 하늘을 강성태는 다부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
바르지오 만시니는 의자에 묶여 2층 거실의 한가운데 있었다.
나무 의자,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팔과 상체를 꽉 묶어놓은 밧줄, 그리고 그를 구경거리처럼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는 십여 명의 삼합회 조직원들.
비록 강성태에게 구조요청을 하긴 했지만,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서 그는 앞으로 다가와 상체를 깊게 기울인 죽음이 건네는 키스를 코에 받은 듯한 심정이었다.
구조요청도 정말이지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자가용 비행기에 실려 납치된 것도 그렇지만, 빌라에 도착하기 무섭게 신발과 시계, 전화기, 반지를 빼앗고, 심지어 귓속을 확인하는 것까지, 삼합회는 보리스 파리오의 도움을 받은 게 분명했다.
독종들이었다. 그래서 만약 바르지오 만시니 본인이 납치된 게 아니라 이렇게 잡혀 있는 인질을 구해내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을 만큼 답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강성태라면, 그가 구르카 용병을 동원한다면….
주변에 있는 삼합회 덩치들을 돌아본 바르지오 만시니는 피가 시커멓게 굳은 입술 끝을 움직여 맞닥트린 현실을 비웃었다.
‘경고라고 생각하고 무리하지 마, 미스터 강. 내가 홍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곤잘레스 회장을 경호하는데 좀 더 신경 써. 이놈들이 나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수작에 당하지 마라.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다.’
강성태에게 속마음을 전한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경호라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용병들은 사업가의 치밀한 계산과 이익에 따라 변하는 판단을 이기지 못해.”
마지막 통화에서 강성태가 준 교훈은 아마 이런 순간을 조심하라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정보를 주고받는 담당으로 보리스 파리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강성태에게 엄청난 부담을 얹어놓은 꼴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바르지오 만시니는 두 가지 소망을 떠올렸다.
단숨에 죽어서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보내준 신호를 강성태가 받아서 반드시 보리스 파리오와 삼합회의 계획이 무너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신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는 거실 창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천으로 만든 잿빛 커튼을 뚫고 새로운 날을 시작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
경험이 많아지면 어느 순간부터 루틴이 생긴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현장까지 태연하게 다가가지만, 막상 들어서기 직전에 손을 모으고 신께 죽음을 고하는 키란의 동작이나 날카롭게 변한 강성태의 눈빛과 감각이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아파트 앞을 지난 승용차는 마치 방문자들을 태워왔던 것처럼 성태와 키란을 내려주고는 바로 출발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방법이었다.
은선곤은 공사를 따내겠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홍콩에 날아왔다. 강성태가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줄은 몰랐고, 다만, 불법적인 방법으로 홍콩 입국을 도운 건 인정한다.
은선곤이야 인생을 망치더라도 그룹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강성태의 결정이었다. 물론 그 뒤에 곤잘레스 회장이 은선곤을 버려두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뒤편의 낮은 산에서 올라온 태양이 아파트의 머리를 비추며 긴 하루를 펼쳐가는 시간이었다.
“시작해야지?”
강성태의 눈빛을 바라본 키란이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구르카 용병은 비겁한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된다.
죽는 순간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 신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남은 가족을 보살펴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부러져도 물러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느끼는 고통이 저축하듯 행복으로 쌓여 가족에게 돌아간다.
그런 믿음 덕분에 전장에 들어서는 구르카 용병은 무서우리만치 용맹하게 변했다. 그런 키란이 강성태를 의지하며 반걸음쯤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아파트의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을 걷던 강성태는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란.”
짧게 키란을 부른 강성태는 훌쩍 잡목이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다.
그때부터였다.
눈이 뒤집힌 호랑이 한 마리와 늑대의 우두머리가 함께 달리는 것처럼 강성태와 키란은 빌라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훌쩍, 강성태가 앞에 있는 작은 바위를 뛰어넘으면 그 옆에서 키란은 잡목을 피해 옆으로 튀었다가 돌아왔다.
나뭇가지가 어깨나 팔에 걸렸다가 튀는 소리, 발에 밟히는 작은 돌 소리가 울렸는데 도로에서 달려드는 소음에 묻혀서 무시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10분쯤 달린 뒤였다.
잡목 사이에서 16채의 빌라가 보였다.
“후우. 후우.”
걸음을 멈춘 강성태는 자세를 낮추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 뒤에 액정에 지도를 올리고는 위치를 확인했다.
빌라와 지도를 번갈아 보았던 키란이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2층 건물에 시선을 주었다.
빌라의 외관은 다른 빌라와 같았고, 창틀 역시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다.
홍콩은 이렇게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건가?
앞쪽 마당에 둘, 뒤편에 둘, 풍성한 정장 차림으로 서 있는 덩치들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명이었다.
제대로 된 기습이라면 이곳에서 낮과 밤을 보내고 새벽의 중간이나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들어가는 게 가장 유리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 강성태의 입국을 알게 될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바르지오 만시니의 목숨이 끝난다.
조심스럽게 다가설 거 같지?
그래서 바깥의 네 명과 투덕거리는 동안, 안에서 뛰쳐나오면 될 거라고 계산한 거지?
직선으로 달리면 1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스마트폰을 묵음으로 처리해 주머니에 넣은 강성태는 냉정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키란. 이번 일은 속도가 중요해. 우리 방식으로 간다.”
빌라에서 고개를 돌린 키란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강성태를 향해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그 위로 이마와 코를 깊게 기울였다.
지금까지 함께 싸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인사, 그리고 신께 강성태를 당부한다는 의미였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한 눈치였다. 그래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테니, 죽더라도 남은 어머니와 강성태는 행복하게 해달라는 마지막 소원을 전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든 키란을 향해 강성태는 픽 웃었다.
“내가 룰루다이다. 나, 너, 그리고.”
고개를 들어 빌라를 보았던 강성태는 다시 시선을 키란에게 돌렸다.
“바르지오 만시니와 함께 돌아간다.”
눈을 통해 말보다 진한 의지를 전한 다음이었다.
강성태는 허리에 꽂아두었던 쿠크리를 꺼냈다.
이것 또한 루틴처럼 싸움을 앞두고 늘 하는 의식이었다.
칼집을 왼팔에 올린 뒤에 보자기를 감아서 아래와 위, 두 곳에 매듭을 분명하게 지었다.
휘릭. 휘익.
강성태가 손을 돌려 쿠크리 날을 아래로 드는 것과 비슷하게 키란이 쿠크리를 거꾸로 쥐었다.
마당에만 네 명이었다.
1층과 2층에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이 끝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를 만큼 무모한 싸움이지만, 마카오 회의를 포함해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바르지오 만시니를 구하는 일이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까.
숨을 나직하게 마신 강성태는 빌라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시작하자.”
강성태의 말을 들은 키란이 왼손에 들고 있던 쿠크리의 칼집을 들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칼집의 틈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멀리 퍼지지 않는다.
하지만, 구르카 용병이 주변에 있다면 반드시 알아듣는 소리였다.
두 가지 의미였다.
이곳에서 구르카 용병이 전투에 들어간다.
같은 구르카 동료가 있다면 물러나라.
신이여.
나와 내 동료를 보살피소서.
칼집을 내린 키란이 삶과 죽음을 모두 담은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내가 앞, 네가 뒤.”
눈빛을 확인한 강성태가 훅 뛰었고, 그 바로 뒤에서 키란이 달렸다.
빌라를 향해 뛰어드는 길이었다.
보이는 적은 모두 죽인다.
이 싸움의 끝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두려움 따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싸운다.
이전보다 더 거칠게 나뭇가지가 달려들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파트의 머리를 비춘 태양이 앞으로 펼쳐질 광경을 외면하겠다는 듯 아직 빌라로 햇살을 넘기지 않은 시간이었다.
키란의 독한 숨소리를 들으며 강성태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빌라의 담벼락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이렇게 살았다.
교통사고, 악몽, 고개 숙이기를 강요하는 일진 놈들, 깡패, 마약, 힘겨운 훈련, 소말리아의 해적, 경호 대상을 노리는 카르텔 조직원, 앞을 가로막는 모든 벽을 뛰어넘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 사이에 최치곤과 같은 친구, 스승이자 더없이 든든한 동료가 된 이병렬, 그리고 함께 지옥을 넘나들던 키란, 절대 없을 줄 알았던 사랑하는 사람까지.
내가 이 정도에서 물러설 거 같아?
산에서 내려온 탄력 그대로 강성태는 담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뛰어올랐다.
담 위로 떠올랐던 강성태와 키란이 비슷하게 안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