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2부 18권 - 16화
바르지오와 헤어진 강성태는 곧장 방지병원으로 향했다.
하루하루, 숨을 틀어막듯이 새로운 위기가 달려드는데 기본 자료를 얻는 데만도 이틀씩 걸리는 터라, 자칫하면 대응할 시기를 놓칠 위험마저 도사렸다.
마카오 회담에 관한 자료, 삼합회와 보리스 파리오의 움직임, 마카오에서의 동선까지, 살펴야 할 게 산더미 같은 상황에서 차웅진이 등장했고, 이어 조직의 기강마저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급격하게 성장하며 세를 불렸던 탓에 내부 정리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조태완, 이병렬까지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강성태는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에도 버겁다는 점이었다.
피할 수 없으니 맞서야 한다.
하나씩 준비하고, 차례대로 해결한다.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각오를 다지는 강성태와 달리 조수석에 앉은 진용도는 자부심 넘치는 태도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강남파 보스를 직접 모신다는 역할에 만족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게 뭐라고.
물론 지금까지의 조직들이 보스의 눈에 들어야 업장 관리 하나라도 내려주었고, 또 중심에 가까울수록 힘을 썼으니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진용도를 보았던 강성태가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강성태입니다.”
- 차웅진 회장 비서실과 통화했는데 연락이 아직 없다.
조태완은 어딘가 기운이 빠진 음성이었다.
태완이파 보스로 거침없이 지내던 그가 강성태에게 눌리고, 이병렬에게 밀리며, 이제는 차웅진에게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돼서 그런가?
누가 뭐래도 신강남파 정신적 지주인 그가 맥빠진 음성인 건 좋지 않았다. 특히, 김정훈의 빈자리가 커지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애쓰셨습니다. 전화까지 하셨으니까 어떻게 나오나 기다려 보시죠. 여차하면 제가 달려가서 한바탕 엎어버리던가요.”
- 보스가?
“강남 삼대장 중 한 명인 신강남파 고문이 전화했는데 답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가서 비서실을 다 뒤집어 놓으면 뭔가 하겠죠.”
- 흐하하하.
언제 구속될지 모른다며 염려한 게 불과 두 시간 전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였다. 그런데도 강성태가 거칠게 나서자 조태완은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저녁은 예약하셨습니까?”
- 저녁?
“사모님과 스테이크 드신다고 하셨잖습니까?”
- 상황이 이런데 속 편하게 그래도 될까 싶네.
진짜 좋지 않은데?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형님께서 당당하게 나서주셔야 바깥이나 숙소에서 힘을 얻습니다. 강남 호텔이라고 하셨죠? 제가 예약할까요?”
- 예약이야 내가 하면 되지. 보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럼 진짜 마음 편하게 저녁 먹는다?
“그렇게 하세요.”
조태완을 다독이며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시선을 돌렸을 때, 승용차가 방지병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사무실로 들어선 박승양은 평소 버릇대로 킁킁대는 표정을 짓고는 박노익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이거 안 좋아요.”
“뭐가 또?”
“이전에 우리 박 회장 사무실에 들어오면 노릿한 돈 냄새가 났거든. 남들은 역겨울지 몰라도 나는 세상 그 어떤 향수보다 그 냄새가 좋았는데 지금은….”
말끝을 삼킨 박승양이 염려된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 일입니까?”
“나야 가까운 곳을 찾아서 식사를 함께 해결하는 버릇이 있지 않소?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 들렀지요. 우리 박 회장이 외롭게 식사하면 어쩌나 싶어서.”
아직 점심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박승양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내놓으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가끔은 진짜 지겹다, 저 너스레가.
특히, 지금처럼 속이 시끄러울 때는 유독 더.
박노익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때, 다행히 여직원이 들어와 차를 놓아주면서 잠시 틈을 만들어주었다.
“차 드시오.”
“그럽시다. 그나저나 어쩔 참입니까?”
“이번엔 또 뭐?”
“차웅진 회장이지 다른 게 있나?”
그 좋아하는 공짜 커피를 앞에 두고 박승양은 손도 내밀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박노익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박 회장. 내가 충고 하나 합니다. 어지간한 조직들은 차웅진 회장과 척을 질 필요가 없어요. 그가 하는 사업을 절대 건드리는 법이 없으니까. 최근에는 차웅진 회장도 나이를 먹으면서 시끄러운 일을 피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니까 나더러 엎드려라?”
“만약 박 회장이 차 회장 앞에 엎드리면 그 양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목을 내리칠 거요. 옆에 있는 놈들을 시켜서 말이오. 두꺼워서 한 번에 잘리기는 할까?”
실제로 두께를 살핀다는 투로 박승양이 박노익의 목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잠깐 외국에 나가 있든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남은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낼 각오를 했다면 먼저 그의 목을 쳐야지.”
퍼뜩 날아든 말에 박노익은 눈가를 좁혔다.
“차웅진 회장은 절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립니다. 아시지? 그 양반이 얼마나 지독하고, 야비한지? 그와 맞붙어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직 없어요. 하다못해 자식도 안 둔 양반이오. 약점이 된다는 이유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박노익도.
“그러니 붙을 거면 그 양반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빠르게 정리합시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교도소에 들어간 박 회장 접견 가면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하는 조언이오.”
“그 양반 목을 먼저 치고 교도소에 안 갈 방법이 있소?”
“그건 신강남파 보스와 의논해서 찾아야지.”
그럼 그렇지.
영양가 있는 답이 있겠나.
박노익이 픽 웃으며 찻잔을 잡을 때였다.
“대한민국에 새로운 공룡이 생겼다는 점도 잊지 마시오, 박 회장. 돈 되는 건 뭐든 삼키는 공룡이.”
“그게 뭐요?”
“역시 신강남파 보스와 답을 구해야 하지 않겠소?”
눈가를 좁힌 박노익 앞에서 박승양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
이병렬은 정영권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가 도착하지 않을수록, 시간이 1분, 1분, 흐를수록 살벌하게 바뀌는 분위기로 이병렬이 무언가 독한 각오를 세우고 있다는 걸 둘러선 덩치들은 물론, 김석문까지 모두 알았다.
40분이 더 지나고,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병렬이 몸을 일으켰을 때, 내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클럽의 문이 열렸다.
화려함을 포기한 클럽은 을씨년스럽고, 앙상한 느낌이었는데 정영권은 도축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소와 같은 태도로 이병렬 앞에 다가왔다.
왜 늦었냐고 묻지 않았다.
이병렬은 정말이지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정영권을 묵묵하게 보았다.
침묵이 일행을 짓누를 때였다.
“다들 나가 있어.”
이병렬이 지시했고, 가장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인 김진용이 둘러싼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진용아. 연장 하나 두고 너도 나가 있어.”
“예, 형님.”
말리고 싶었던 마음에 반 박자 느리게 답을 한 김진용이 품에서 회칼을 꺼내 이병렬의 뒤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올려두었다.
인사를 꾸벅 한 덩치들이 줄줄이 나간 뒤에 마침내 문이 닫혔다.
“너는 이 개새끼야.”
이병렬이 이를 악물며 독기를 뿜어내는 순간이었다.
털썩, 정영권이 허무할 정도로 이병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너무 겁이 나서 오는 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게 신강남파를 대표하는 클럽 책임자라고?
운빨이 좋아서 한 자리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병렬이 보기에 정영권은 정말이지 과분한 직책을 맡은 게 분명했다.
‘비겁한 새끼.’
정영권이 김석문처럼 제시간에만 왔었어도 정말이지 좋게 마무리 지으려 했었다.
이를 꽉 깨물며 이병렬은 강성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바깥에 커다란 적을 두었을 때는 적당히 다독일 필요도 있다던 당부를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깥에 커다란 적을 앞두었으니 이런 간사한 새끼를 먼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회칼을 집어 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돌이키지 못한다.
어떤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병렬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린 정영권의 정수리를 보며 독기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클럽의 대가리라고 다른 덩치들을 내보냈더니 넙죽 무릎을 꿇는 이 비겁함이라니.
이런 놈이 과연 상대 조직의 난동을 혼자 감당할 그릇이 될까?
이병렬의 눈에 독기가 한층 더욱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떤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전화는 받고.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이병렬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며 찬물을 끼얹은 라면 냄비처럼 끓어오르던 독기가 한순간에 식고 말았다.
고작 ‘우리 보스’라고 찍어놓은 이름을 보는 순간, 일어난 변화였다.
“여보세요?”
- 아직 안 끝났어?
“왜?”
- 잠깐 의논할 게 있어서 그런데 시간 돼?
씨발,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픽 하는 웃음이 나오는 게 그랬다.
“어디로 가면 돼?”
- 방지병원.
“10분만 있다가 출발할게.”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나직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여간 정영권, 이 새끼는 운빨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덩치가 아닐까?
“일어나.”
“예, 형님.”
“너는 이 새끼야. 보스가 믿고 클럽을 맡겼고, 부산에 직접 데려갈 정도로 신임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서 되겠어? 다른 놈은 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아니! 다른 놈들이 그러고 있으면 찾아가서 상을 엎어야지. 안 그래?”
“죄송합니다, 형님.”
“보스는 아직 너를 신임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더러 너는 좋게 다독이라고 하더라. 알겠냐?”
적당하게 마무리 지으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든 정영권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뭘 또, 왜 이렇게 쉽게 감동하는 건데?
“형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손가락 하나 올리겠습니다. 연장 한 번만 빌려주십시오, 형님.”
붉게 물든 눈, 떨리는 음성,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처럼 보였다.
“개새끼야. 그 각오 곱게 접어서 가슴 깊이 넣어둬. 언젠가 태완이 형님이나 보스가 위험할 때, 그때 꺼내. 그게 진짜 네가 반성하는 거야.”
이병렬을 바라보던 정영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너를 찾는 놈이 많아진다. 그럴 때 흔들리면 언젠가 진짜 회칼 들고 나랑 마주 서는 거고, 네가 중심을 지킨다면 신강남파의 진짜 간부가 되는 거다.”
“예, 형님.”
숨을 길게 내쉰 이병렬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비켜난 자리 뒤에 있던 의자가 반짝이는 회칼을 품은 채 정영권을 향하고 있었다.
**
오전이었다.
방지병원 주차장에 들어선 승용차를 광주, 대림동, 심지어 가디언스파 덩치들까지 고개를 기울이며 살폈다.
차에서 내린 강성태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보스의 위용을 지킨다고 해도 다른 곳 아닌 방지병원에서, 그것도 외래 환자들이 오가는 주차장에서 거추장스러운 인사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전에 말해놓은 것도 있었고, 눈치가 있어서 다들 조용하게 고개만 숙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거기까지 좋았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그러나 자부심 넘치는 태도로 조수석에서 내린 진용도가 운전한 덩치와 함께 상체를 깊숙하게 숙이며 하는 인사를 막지는 못했다.
뭐라 할 필요는 없었다.
강성태는 인사에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그대로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먼저 유충일이 누워 있는 커튼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조성호가 얌전하게 인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에 묻어있는 옅은 안도감이 먼저 보였고, 이어 침대에서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유충일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
처참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는데 알사탕에 묻은 설탕 가루처럼 옅은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잘 견뎠어.’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뒤에 유충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다독였다.
힘겨운 사람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서 불편하게 하느니 이런 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게 훨씬 현명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고생해.”
“아닙니다, 형님.”
조성호에게 유충일을 당부한 강성태는 걸음을 옮겨 최치곤의 커튼 안으로 움직였다.
“왔냐?”
혹시 유헌우 원장이 회복력을 키우는 주사를 놓아주었나 싶을 정도로 최치곤은 확실히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다만, 혈색이 돌아온 표정에 불편한 감정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왜 그렇게 불편한 얼굴이야?”
“죽만 먹으려니까 매콤한 거 먹고 싶어 미치겠다.”
툴툴대던 최치곤이 링거가 연결된 손으로 침대를 두들겼다. 서 있지 말고 앉으라는 권유처럼 보였다.
“나야 그렇다고 치고, 너도 무슨 일 있지?”
최치곤은 강성태의 고민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런 놈에게 숨길 게 뭐 있겠나.
“그렇지 않아도 병렬이를 불렀거든. 의논 좀 하려고.”
강성태는 조직을 관리해야 한다는 이병렬의 조언과 김석문의 일, 정영권의 행동, 그리고 마음에 걸리던 기운 빠진 조태완의 음성 등을 차례대로 들려주었다.
“별, 씨발.”
뜻밖에도 이야기를 다 들은 최치곤은 아무것도 아니란 투로 강성태의 고민을 툭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