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2부 19권 - 5화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나서야 승용차는 그나마 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정영권입니다, 형님. 동생들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형님.
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명감 가득한 정영권의 전화가 시작이었다.
- 박배근입니다, 형님. 대전에서 동생들과 출발했습니다. 광주 식구들과 합류해서 부산에서 뵙겠습니다, 형님.
박배근이 출발을 알렸고,
- 중간에 휴게소 정해서 보세, 동생.
듬직한 박노익의 통화도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조태완이 대놓고 흐뭇한 표정을 보였다.
“이제 신강남파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멕시코에 신도시 건설하는 데 형님의 가르침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나 같은 퇴물이 뭘 안다고?”
말과 달리 조태완의 눈빛에 기대감이 슬며시 올라와 있었다.
“멕시코 카르텔, 중국 삼합회, 필리핀 조직들이 밀고 올 겁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건 제가 할 테니, 신도시에 업장과 식당 운영, 영업을 가르쳐 주십시오.”
강성태의 말을 듣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피가 뜨거워진 모양이었다.
조태완이 감추지 못하는 잔인한 미소를 그렸다.
“가르쳐 달랄 게 뭐 있어? 보스가 버튼을 누르면 나야 당연히 따르는 거지.”
“감사합니다, 형님.”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조태완이 길게 숨을 내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병렬이입니다. 여보세요?”
- 난데, 대림동과 신월동 식구들 데리고 광선이 잡으러 간다.
이럴 거 같았다.
이종환과 유섭우를 남겨달라고 할 때 어쩐지 이병렬이 나서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맴돌았었다.
- 이광선 같은 피라미가 보스를 씹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계속 생겨. 거기에 인천이 왜 갑자기 설치는지 확인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말려도 안 들을 거지?”
- 그러게 이광선이 개 짓거리했을 때 바로 섭우 보내서 두들겼으면 깨끗하게 끝났을 거 아냐?
뭐라 대꾸할 말이 없는 이병렬의 지적이었다.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라면 처음 유섭우의 당부와 지금 이병렬의 지적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또 배운다. 아직도.
“그깟 놈 잡으러 가서 다치거나 하는 거 아니지?”
조태완이 눈가를 좁히며 강성태를 돌아보고 있었다.
- 아이고, 보스님. 내가 보스 앞에서나 쪼골쪼골해지지, 전에는 영등포부터 종로, 명동, 아래로는 대전까지 꽤 유명했습니다. 네!
유쾌한 이병렬의 답에 강성태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알아서 해. 대신 이거 하나는 명심해. 깨져서 오면 내가 두 가지는 반드시 해준다.”
- 그게 뭔데?
“하나는 인천 아예 뒤집어엎는 거고.”
조수석에 있던 진용도가 움찔했다가 슬그머니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다.
“평생 나한테 놀림당할 거다.”
- 별? 다녀올게. 야쿠자 놈들이 벼를지 모르니까 부산이나 조심해서 다녀와.
“알았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렸다.
“병렬이가 광선이 달러간다는 전화지?”
“짐작하셨습니까?”
조태완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는 거지. 이광선이라는 새끼가 도망가서 달지 못하더라도 보스를 건드린 놈은 그냥 두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거고, 만약 최악의 순간에 저쪽이 우-, 달려들어서 깨져도 보스가 없는 상황이라 밀고 들어갈 명분이 생기거든.”
이렇게까지 계산하면서 움직였을까, 이병렬이?
“이런 거 보면 병렬이가 하여간 빨라. 전에 내가 병렬이를 강남으로 데려올까 하다가 괜히 영등포에 손대는 꼴로 보일까 봐 관뒀었거든. 그때 데려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흘러가는 말이었지만, 듣는 순간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가정이었다.
조태완을 호텔 커피숍에서 두들기고, 룸에 데려갈 때도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에 이병렬이 지키고 있었다면, 결과를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세상이 보스를 선택해서 이병렬을 묶어준 걸 테지. 다른 말로 하면 내 운이 다해서 병렬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걸 거고. 솔직히 병렬이가 없었다면 보스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부인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영등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달려오는 동안, 심지어 밀동에서 일진 아이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도, 이병렬은 쉬지 않고 강성태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강성태가 한 번 내린 결정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앞에 섰다.
“보스가 이광선과 통화해서 사과하라고 한 게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조직에서 보면 보스가 이광선에게 씹힌 게 돼. 거기에 이유가 어떻든 했어야 할 사과를 여태 안 한 거고.”
그렇게 되나?
강성태는 조태완을 바라보며 지금 듣는 말을 되새겼다.
“바꿔보면 쉽지. 보스가 인간적으로 사과하고 끝내라고 했다며? 그럼 인천 부천 연합이 막아주더라도 광선이 새끼는 어떡해서든 말리고 사과하는 게 도리지.”
뭔가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조태완의 주장이었다.
한 마디로 말문이 막힌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섭우한테 맡겨서 두들겼으면 인천 부천 애들도 뭐라 태클 걸 게 없어. 그리고 끝나는 거지. 그걸 인간적이니, 몰라서 그랬으니까 이해한다느니 하니까 이렇게 일이 꼬여버린 거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면 이광선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강성태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투로 조태완이 히죽 웃었다.
“일반인은 깡패랑 붙어서 절대 말빨로 못 이겨. 주먹이나 칼을 들이대며 우김질을 하니까. 조직끼리 붙는다고 다를 거 같아? 아니! 같아. 센 놈이 무조건 옳은 거지.”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조태완이 이해한다는 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인천 부천 연합이 황원남을 내세워서 이광선을 감쌌다는 건, 신강남파랑 해볼 만하다는 뜻이지. 불편하면 해보자는 의미고. 그래서 병렬이가 달려간 거야. 그래? 그럼 어디 붙어. 이렇게.”
그 짧은 순간에 바둑알을 빠르게 두듯이 계산했을 리는 없었다.
그저 강성태와 다르게 조직의 생리를 확실하게 꿰고 있던 조태완과 이병렬, 유섭우에게는 맞으면 주먹이 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게 분명했다.
용병의 세상에도 그들만의 룰이 있다.
조직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조태완이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영권이와 세아를 맡긴 김석문의 일도 마찬가지다. 김석문은 좋은 결과가 나온 거 같지만, 영권이는 아직 몰라. 그리고 그런 빈틈에서 연장이 들어와. 동팔이처럼.”
“알겠습니다.”
김동팔에게 당했던 조태완의 조언이었다.
그것도 날카로운 눈빛을 만들어가며 건네준 조언.
강성태는 군소리하지 않고 고개마저 숙이며 조태완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다음 휴게소까지 얼마나 남았냐?”
시선을 앞으로 돌린 조태완이 질문을 건넸고,
“30분쯤 달리면 나옵니다, 형님.”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본 진용도가 공손하게 답했다.
“거기에 잠시 들르자. 8시쯤 되겠지?”
“예, 형님.”
진용도에게 내린 조태완의 지시를 들으며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두 시간 뒤에 전화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두 시간 뒤가 저녁 8시쯤이었다.
차웅진과의 통화 언저리에서 휴게소에 들르겠다는 계산이었을까?
이병렬과의 통화, 조직의 생리를 배우는 사이, 사람이 멍청해진 건가 싶어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아카시 미키야토가 차웅진을 찾았다.
거실의 가장 안쪽 다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차웅진은 비서가 건네주는 스마트폰을 받아 공손하게 귀에 가져갔다.
“차웅진입니다.”
- 전화를 요구했다던데?
“송구한 말씀을 드릴 일이 있습니다.”
- 흥.
아카시 미키야토가 별것 아닌 일로 유난을 떤다는 투로 코웃음을 뱉어냈다.
CCTV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으면 마당에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거실로 들어와 차웅진을 감싸도록 정해져 있었다.
거실에 그득하게 들어선 경호원들이 차웅진이 있는 다실 앞에 촘촘히 늘어서 있어서 귀를 틀어막지 않는 한, 지금 통화를 모두 들을 수밖에 없었다.
- 부산에서 조강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바로 인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천과 부천 연합의 수장 함태준이 나섰을 테니 나머지는 그자와 의논하고, 필요한 걸 요구하면 들어줘.
“감사합니다, 회장님!”
- 자금은 물론이고, 약도 인천을 통해 들여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럼 강성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빠가야로!
“죄송합니다, 회장님.”
잘못한 게 뭔지도 모른 채, 차웅진은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고개를 조아렸다.
- 놈에게 붙여놓았던 우리 조직원 넷의 연락이 끊겼다. 본토에 있는 내가 아는 사실을 어떻게 그곳에 있는 네가 모른다고 하는가.
“제가 눈이 있어도 이미 썩었고, 귀가 있어도 막힌 것과 같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 너만큼은 조센징 특유의 게으름을 버렸다고 여겼더니 종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나.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회장님.”
상체까지 숙인 차웅진이 각오를 내놓은 다음이었다.
- 조센징은 교활해서 절대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지만, 너는 죄를 인정하는 솔직한 면모를 갖췄으니 기회를 받을 만하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회장님.”
- 부산에 내려가고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그곳에서 내가 해결해볼 테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인천의 함태준을 이용해서 제거할 테니까 검찰과 경찰의 눈을 가려줘.
“말씀하신 대로 절대 검찰이나 경찰이 함태준을 손대는 일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여든아홉 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웅진의 음성에는 각오가 단단하게 담겨 있었다.
- 근본과 은혜를 잊지 않는 마음, 한 번 꿇었다면 비록 칼을 받더라도 감사하게 고개 숙이는 충성, 비굴하게 사느니 배를 가르더라도 명예를 지키는 근성, 이것이 우리 아카시 구미를 지탱하는 힘이고, 네가 지켜야 할 도리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 이번 거래는 아카시 구미 전체의 명운이 걸려 있다. 이 거래를 반드시 성사시켜서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에 진출한다. 지금 마카오에서 우리 도움을 받는 삼합회가 방심하는 틈에 우리는 그들의 목을 모두 자르고 중국마저 손에 넣는다.
“말씀만 들어도 이 늙은 것의 피가 끓어오릅니다.”
- 요시.
차웅진의 각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카시 미키야토의 음성이 확연히 바뀌었다.
- 후원회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 돈과 여자로 그들을 이끌어서 대일본 제국의 은혜를 잊지 않는 자들을 계속 길러내라. 너는 그 목적을 위해 키워졌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 이 정도가 좋아. 조센징 깡패는 조센징이 상대하게 너는 잠시 물러나 있어. 혹시 지난 일로 부딪치게 되면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렇다면 검찰과 경찰을 이용해 체포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깡패 강성태는 역시 깡패가 처리하는 게 다른 조직들이 보기에도 깔끔하겠지. 특히 삼합회가 지켜보게 될 테니 지금은 힘으로 꺾는 게 더 좋은 방법이다.
“와까리 마시다.”
차웅진이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통화가 끊겼다.
그는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리고는 너무나도 공손한 태도로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몸을 세운 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강성태와 통화해야 할 시간이었다.
**
이병렬이 신월동 나이트 주차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종환과 유섭우가 다가왔고, 진용도가 없는 사이 신월동 숙소를 관리하던 덩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대림동을 지킬 인원을 빼고도 대략 백 명이었다.
아직 나이트에 손님이 있을 시간은 아니어서 근처 상가의 주인들만 서열에 따라 줄줄이 인사하는 덩치들을 불안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광선이 새끼 어디 있는지 알아봤냐?”
“여기 숙소 동생이 전주에 사는 또래 통해서 알아봤는데 부천 숙소에 그대로 있답니다, 형님.”
답은 유섭우가 내놓았다.
“그런데 형님. 인천 부천 연합 애들이 근처에 잔뜩 있답니다, 형님.”
“이 씨발 새끼들이 진짜 해보자는 거네?”
유섭우의 보고를 들은 이병렬이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저도 모시겠습니다, 형님.”
“너까지 나섰다가 빈집털이 당하면 보스한테 뭐라고 하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강서구랑 여기 나이트, 필요하면 대림동 지원까지 신경 써.”
유섭우의 청을 밀쳐낸 이병렬이 고개를 돌렸다.
“주소는 문자로 받고, 출발하자. 광선이 달아오는데 막아서는 놈이 있으면 모조리 두들겨.”
“예, 형님.”
이종환과 김진용이 대표로 답을 했고, 몰려 있던 덩치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병렬이 차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에 이종환이 덩치들을 향해 팔을 저었다.
우르르, 덩치들이 차에 올랐고, 이종환과 김진용도 각각 뒷자리와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고개 숙이는 유섭우를 향해 이병렬은 출격하는 파일럿처럼 검지와 중지를 들어 짧게 앞을 가리켰다.